203화 인수하기 쉽지 않을걸?
하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언제쯤 승진을 할 수 있을까?’
현재 고려일보는 간부 비율 과다 등의 이유로 인사 적체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수별 승진 안배까지 고려되면서 다음 직급으로 승진하는데 최소 3년이란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나도 집안이 좋았으면 지금쯤 승진했을 텐데.’
그의 동기 중 빽 있고 힘 있는 동기들은 하나둘 승진하고 있었다.
학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그가 월등히 좋은데도 승진에서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 이름이 박태인인가?”
“예, 그렇습니다!”
올해는 반드시 승진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던 그에게 이인식 인사부장이 갑자기 찾아와 말을 걸었다.
“자네가 그 유명한 혜성 장학생 출신이라지?”
이인식 인사부장의 질문에 박태인 기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안 그래도 혜성 장학생 출신이란 이유로 은근하게 견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앞의 이인식 인사부장도 같은 부류인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인식 인사부장이 어딘가 언짢아 보이는 기색으로 말했다.
“쯧, 자네가 혜성 그룹을 취재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더니, 역시 혜성 장학생 출신이라서 그런 모양이야?”
“아닙니다. 혜성 장학생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반대를 한 것입니다.”
“말로는 그렇게 하겠지만, 자네 속을 누가 아나?”
“…….”
“그렇다면 이거 하나를 물어보지. 혜성 그룹을 여느 재벌들과 비교했을 때, 어떻다고 생각하나?”
“정확히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일세. 혜성 그룹이 다른 기업들보다 깨끗하다고 생각하냐는 거야.”
박태인 기자는 잠시 고민하였다.
솔직하게 답변한다면 분명히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혜성맨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될 수도 있겠지.
그는 고민을 멈추고 이인식 인사부장의 질문에 답변하였다.
“적어도 다른 10대 재벌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재벌들과 달리, 5공으로부터 어떤 특혜도 받지 않은 채 재계 2위까지 성장했으니 말입니다.”
“5공의 특혜는 받지 않았어도 6공의 특혜를 받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한다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혜성 그룹이 6공의 특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거 참, 뼛속까지 혜성맨이로군.”
이인식 인사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이인식 인사부장의 모습에 박태인 기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이인식 인사부장이 갑자기 그에게 악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지.”
“예, 예?”
박태인 기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이인식 인사부장의 손을 맞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혜성 그룹을 싫어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다가, 갑자기 잘 지내보자는 말을 하니 그로선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한성 ‘세기의 기부’로 수천 명의 아이가 혜택을 보다.>
<‘초일류 경영’을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시 돈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무차별적 특혜 시비에 휘말렸던 혜성 그룹은 단번에 ‘초일류 경영’을 실천한 사회 기업이 되었다.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었고 말이다.
‘하긴, 10억, 20억도 아니고 백억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화끈하게 쏘길 잘한 거 같았다.
10억, 20억 정도였으면 괜히 어정쩡하게 찬사를 받고 끝났을 터.
여론도 지금처럼 극적으로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타이밍 좋게 기부를 했더구나.)
“예, 노사의 조언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돈을 쓸 때는 아까워하지 말고 확실하게 쓰시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그 조언에 따랐을 뿐입니다.”
내 말에 노사가 피식 웃었다.
(사치만 하지 않는다면 돈 쓰는 것이 뭐가 아깝겠어?)
“맞는 말씀입니다.”
(뭐, 그렇다고 기업들을 마구잡이로 인수하지는 마라. 지금도 거의 한계에 가까워 보이니까.)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포르쉐라던가, 스포츠카 제조 기업을 인수하려고 했었는데, 노사의 지적을 들으니 나중으로 미루어야 할 거 같았다.
“그럼 기화 자동차만 인수하고 내실 경영에 집중하겠습니다.”
무려 2조에 달하는 현금이 있으니, 잠재력 있는 기업들을 전부 인수하여 몸집을 불릴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유한 기업들도 충분히 잠재력이 있는 기업들이었다.
그러니 마구잡이로 인수합병하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기화 자동차는 예외였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얼마나 인수하셨습니까?”
(대략 12% 정도 인수했다.)
“12%라…….”
나는 작게 감탄하였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기화 자동차 급의 기업 지분을 12%나 매입했다니.
역시나 노사는 대단한 거 같았다.
“바로 인수전을 진행해도 괜찮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냐?)
“예?”
(네 자금력이라면 기화 자동차의 지분이야 어떻게든 인수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정부나 재벌들은 어떻게 하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그게 골치긴 했다.
다른 기업도 아니고 매출이 3조에 가까운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는 일이었다.
정부에서도 그저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미래 그룹을 비롯하여 다른 기업들은 두말 할 것도 없었고.
“원래 저의 역할이 정부를 설득하는 일 아닙니까? 정부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김영산 대통령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나는 애써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려스러운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를 향한 김영산 대통령의 총애는 진짜였다.
내가 직접 나서서 설득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내가 지금까지 해 준 것이 있는데, 기화 자동차 인수를 막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노사는 이런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인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김영산이야 어떻게 설득해도, 여당이 문제일 거다.)
“야당도 아니고, 여당이 문제라는 말씀입니까?”
(야당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지. 어차피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반대할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여당도 너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습니까?”
(이종석이라고 알지? 그놈이 특히 너를 싫어하는 거 같더구나.)
나는 노사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종석 의원이라면, 킹 메이커로 유명한 4선 의원이었다.
여당에서는 거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이기도 했다.
“제가 김영산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니,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요.”
(이유야 그거 하나뿐이겠냐? 아무튼, 정부를 설득하고 나면 여당도 어떻게든 회유하든지 해라. 괜히 일이 잘 안 풀리면 기껏 인수했던 지분을 다시 토해야 할 수도 있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그런 일이 있을까도 싶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시장의 권력은 아직 정치의 권력을 넘어서지 못했고, 심지어 그 시장의 권력조차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정부에서 기화 자동차 인수합병을 반대한다면, 노사의 말처럼 진짜 지분을 토해내야 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그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었다.
“이종석 의원이 나중에 대선에 나간다고 했었죠?”
(정확히는 경선에 나간다. 뭐, 결국 경선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대선은 나가지도 못했지만 말이야.)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대선에 도전할 정도라면 단순히 킹 메이커라는 지위에 만족하지 않는 거 같았다.
‘일단 한번 만나는 봐야겠어.’
정확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 * *
“혜성 그룹이 확실히 돈 하나는 많긴 많은 거 같습니다. 한 번에 백억이란 돈을 기부하다니 말입니다.”
이종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여론을 환기하려고 백억이나 쓸 줄은 몰랐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이한성 회장의 자금력은 천문학적입니다. 일본에만 수천억 원의 자금이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수천억이라. 기업 전체의 자산도 아니고 일개 개인이 그 정도의 자산을 갖는 게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왕재구 회장의 말에 이종석이 불신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신빙성은 있습니다. 일본 샤롯도 혜성 그룹의 자금이 아닌, 이한성 회장의 개인 자금에 인수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한성 회장은 정말 애국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만한 자금을 한국이 아닌, 일본에 투자하다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5공에 박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혜성 그룹이 깨끗해서 박해를 받은 게 아니라 애국심이 약해서 박해를 받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종석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해대며 혜성 그룹을 깎아내리는 왕재구 회장의 모습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얼마나 혜성 그룹을 위협적으로 생각하면 왕재구 회장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정계에서 혜성 그룹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역시 재계만큼은 아닌 듯싶었다.
하긴, 혜성 그룹에 무릎을 꿇은 재벌 그룹만 세 곳이나 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당에서 곧 혜성 그룹을 저격하는 의원들이 나올 겁니다.”
“저격이라면?”
“다른 재벌 그룹들이 그랬듯, 혜성 그룹도 공평하게 세무조사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기 넘치는 초선 의원들이 당의 여론을 형성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말을 듣자, 왕재구 회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선 때 야당을 지지하거나 중립을 지켰던 기업들은 하나같이 세무조사와 검찰 조사를 받으며 엄청난 곤욕을 겪었었다.
미래 그룹도 마찬가지였는데, 추징금과 벌금으로만 무려 5백억을 냈었다.
누구는 온갖 찬사를 받으며 백억을 기부할 때, 미래 그룹은 온갖 욕을 먹으며 5백억을 뜯겼던 것이다.
왕재구 회장으로선 당연히 이 사실이 못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의 실세인 이종석이 혜성 그룹도 미래 그룹과 똑같이 세무조사를 해 준다고 약속하니 왕재구 회장이 반색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감사합니다!”
“왕 회장님께서 감사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미래 그룹에 무언가 특혜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저는 그저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연한 일을 하는데 칭찬을 받으니 이거 참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하하.”
그렇게 이종석이 왕재구 회장과 화기애애한 대화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려는데, 그의 비서가 이 같은 소식을 전하였다.
“의원님,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이 1시간 전에 전화했었습니다.”
“이한성 회장이?”
이종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영산 대통령과의 친분만 믿고 지금껏 이종석을 무시하였던 한성이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고 하니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데?”
“의원님과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대화라.”
재미있는 일이었다.
왕재구 회장과 만나서 혜성 그룹을 어찌 다루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한성이 만남을 요구하다니.
어디까지나 우연에 불과하겠지만, 정말 공교로운 시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이한성 회장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볼까?’
큰 기대는 없었다.
김영산 대통령을 밀어준 것과 별개로 한성은 정치권과 불가근불가원 원칙을 고집하는 기업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만나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비록 좋은 관계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렇다 해서 왕재구 회장처럼 한성과 적대 관계인 것은 또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