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나는 아직 배고프다
“미치겠군. 한화가 690원까지 내려갔어.”
누군가 환율 이야기를 꺼내자 여기저기서 한숨을 내쉬었다.
“호황도 이제 끝난 거지.”
“환율 흐름을 보면 호황이 끝난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언론이 호들갑 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더 무서워졌어.”
“정인수, 너의 그룹은 그래도 내수 회사 위주잖아. 네가 맡는 계열사도 내수 회사고. 나처럼 수출 회사 맡지 않는 게 어디야?”
“지금 그런 거 구분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 다 죽어 나가는데.”
“정부는 이럴 때 우리를 도와줘야 할 텐데, 도와주기는커녕 죽으라고 등에 칼을 꽂고 있단 말이지.”
대화의 화제가 정부로 옮겨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불만이 터져 나왔다.
“5공 때가 차라리 나았어! 뇌물 몇억씩 주는 게 낫지, 지금 이게 뭐야?”
“웃긴 게, 그렇다고 뇌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던데? 장관이고, 여당 의원들이고 죄다 돈 달라 그러고 있어.”
“정치인이 다 그렇지. 6공이라고 깨끗할 리가 없잖아?”
“더러운 건 상관없는데, 우릴 죽이려고 작정해서 달려든다는 게 문제야. 이번에 금리 자유화도 한다며?”
금리 자유화.
김영산 정권은 구제금융, 정책금융, 지시금융 등 정경유착의 악취가 물씬 났던 금리에 대한 직접 규제를 폐지하기로 하였다.
“그건 우리에게 오히려 유리한 정책 아니야? 우리가 은행에 기여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그만큼 은행들의 목소리도 올라간다는 뜻이잖아. 별로 좋은 건 없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구제금융을 못 받으니,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거야.”
“쯧, 도움이 안 되는 정부네.”
“적어도 재벌인 우리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정부지. 노조, 그 빨갱이 새끼들이면 또 모르겠지만.”
그때, 고림 그룹의 부회장 민건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꼭 모든 재벌에게 도움 안 되는 정부는 아닐걸? 혜성이 있잖아.”
민건우가 혜성을 언급하자 다시 화제는 혜성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혜성이 6공의 특혜를 받고 있다지?”
“대통령부터가 이한성 회장을 총애한다잖아. 심지어 여당에서도 말이 많을 정돈데 더 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근데 혜성 그룹이 정부로부터 정확히 어떤 도움을 받았다는 거야? 언론에서도 의혹만 제기하고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는 언급이 없던데?”
그러자 민건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른 게 특혜겠어? 혜성에서 샤롯 그룹의 계열사를 인수하는 것을 눈감아 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나 다름없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나저나 혜성 그룹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이번에 샤롯 제과와 샤롯 식품, 샤롯 백화점을 인수하면서 단번에 재계 2위가 되었다지?”
“뭐 그런데 혜성이 재계 2위에 오르는 것은 이전부터 정해진 수순 아니었나?”
“정해진 수순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걸?”
“애초에 혜성 그룹 자금력의 한계는 얼마인 거야? 신진호 회장을 저리 굴복시킬 정도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자금을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듣기로 일본에만 몇천억 엔이 있다더라.”
“원도 아니고 엔이 그만큼 있다고? 그게 말이 돼?”
“소문이니 과장된 게 있겠지. 하지만 우리 돈으로 몇천억 이상은 분명 가지고 있을 거야.”
“허어, 몇천억이라니. 사우디아라비아의 투자를 받아 얻은 2,400억 만해도 부러워 미칠 거 같던데.”
“무섭군. 이러다 샤롯 그룹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이한성 회장의 사업욕이라면 얼마든지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
혜성 그룹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재벌들은 경각심을 가졌다.
안 그래도 김영산 정권의 총애를 받는다고 소문 난 혜성 그룹이었다.
그런데 혜성 그룹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가졌다는 소문까지 더해지자 더욱더 혜성 그룹을 경계하게 되었다.
* * *
“혜성 그룹이 은성 그룹을 뛰어넘어 재계 2위가 되었는데, 장본인인 구 회장은 어떤 입장이야?”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미래 그룹의 왕재구 회장의 질문에 구혁재 회장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크게 신경 안 쓰고 있는데?”
“이한성 회장, 그 친구 때문에 재계 순위가 낮아졌는데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우리 기업의 가치가 낮아진 게 아니라, 혜성의 가치가 높아져서 재계 순위가 달라진 건데 어쩌겠어?”
구혁재 회장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그러자 왕재구 회장은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너는 자존심도 없어?”
“갑자기 뭔 자존심 타령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안중에도 두지 않던 혜성 그룹이야. 그런 혜성 그룹이 슬금슬금 빅 4가 되더니, 이제는 너의 그룹까지 뛰어넘었어. 그런데도 자존심이 안 상한다고?”
물론 자존심이 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재계 순위가 내려갔다는 것은 단순히 2위에서 3위가 됐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영향력도 큰 차이를 보일 테고,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도 재계 3위라는 이유로 이전보다 대우가 낮아질 터.
특히나 지금 같은 재계 모임이 있을 때가 가장 자존심이 상했다.
적나라하게 비교를 당하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자존심이 상해도 어쩌겠어?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그러지 말고 나와 힘을 합치는 것이 어때?”
“힘을 합치자고? 힘을 합쳐서 혜성 그룹을 공격하자는 거야?”
“우리가 힘을 합치면 혜성이 지금처럼 나댈 수 있겠어?”
구혁재 회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래 그룹은 그룹 매출이 10조를 넘긴 시점에서 독보적인 기업으로 인정받았었다.
아무리 같은 빅 4라 해도 다른 세 기업과는 급이 달랐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보니 미래 그룹은 어지간한 일에서는 다른 기업과 힘을 합치는 경우가 없었다.
오히려 다른 기업들이 힘을 합쳐서 미래 그룹을 견제하는 일이 더 많았다.
이런 미래 그룹이 혜성 그룹을 견제하기 위해 은성 그룹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구혁재 회장으로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성 그룹이 어지간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나 보군.’
하긴, 미래 그룹이라고 이제 안심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지금까지의 성장세를 생각하면 혜성 그룹의 매출이 미래 그룹의 매출을 추월하는 것도 그리 멀지 않았다.
늦어도 1990년대 안에는 미래 그룹을 추월할 것이 분명하였다.
1990년대에는 왕주형 명예 회장도 대선에 나가, 상왕 노릇도 더는 못하게 될 터.
그때부터 본격적인 왕재구 회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니, 그가 혜성 그룹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반 혜성 동맹을 만들었던 신진호 회장이랑 김종우 회장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서도 혜성을 공격하자는 거야?”
구혁재 회장으로선 왕재구 회장의 뜻에 따라줄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반면교사로 삼을 기업들이 세 곳이나 존재하였다.
고림 그룹과 쌍호 그룹 그리고 샤롯 그룹까지.
혜성에 덤볐던 그룹들의 최후는 하나같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천하의 은성 그룹이 혜성 따위를 두려워하게 된 건가?”
“보지 않아도 될 피를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거야. 솔직히 혜성 그룹을 공격한다고 우리 기업의 재계 순위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들이 반격이라도 하면 우리만 피해를 볼걸?”
괜히 혜성 그룹과 싸웠다가 다른 기업들만 어부지리 취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기에 구혁재 회장은 왕재구 회장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우리 둘이서 혜성을 공격하자는 게 아니야.”
“그럼?”
“혜성의 독주에 우려를 표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아마 30대 재벌 대부분이 혜성의 독주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을걸?”
“혜성이 뭐 했다고?”
“재벌 개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쌍호 그룹의 계열사와 샤롯 그룹의 계열사를 연달아 인수했어. 가늠도 안 되는 천문학적인 자금력을 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 엄청난 자금력이 남아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경각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구혁재 회장은 미간을 좁혔다.
왠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거 같았다.
왕재구 회장이 다른 기업들과 무언가 교감을 했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정말 다른 기업들까지 움직일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계 그룹이나, JS 그룹, 일성 그룹 등 혜성 그룹과 친분이 깊은 기업들이야 침묵을 지키겠지만, 다른 기업들은 어떨지 몰랐다.
혜성의 기세가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재계 안에 존재하는 불문율을 무시하는 혜성 그룹이 언제 자신의 계열사를 인수하려 들지 모른다는 공포도 있었고.
‘하지만 그들이 힘을 합쳐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구혁재 회장은 혜성 그룹과 한성을 높게 평가하였다.
미래 그룹을 중심으로 세워질지, 안 세워질지 모르는 반 혜성 동맹보다 혜성 그룹 하나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오히려 혜성의 편에 남아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혜성은 어쩌면 지금의 미래 그룹을 넘어서는 독보적인 기업이 될 수 있으니까.’
지금의 미래 그룹은 총매출 10조를 달성했다고 독보적인 지위로 인정받았다.
10조도 이러했는데, 20조, 아니, 30조면 어떨까?
만약 혜성이 그 정도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된다면 이런 말까지 나오게 될 것이다.
혜성이 망하면 나라 전체가 망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구혁재 회장이 생각하기에 혜성 그룹의 매출이 그 정도가 되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은 거 같았다.
길어야 10년?
‘지금 기세를 보면 10년도 길지. 어쩌면 7년 안에 그룹 매출 20조에서 30조 정도가 될 수도 있어.’
* * *
1989년이 되었다.
나는 작년에 인수했던 기업들을 안정시키는 것에 집중하였다.
노키아의 통신 부문부터 해운 회사들과 샤롯 그룹의 계열사들까지.
한 번에 너무 많은 기업을 인수해서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또 다른 회사의 인수전을 준비하였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그도 그럴 것이, 재계 1위가 코앞이었다.
미래 그룹을 넘어설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재계 1위가 되어 미래 그룹을 넘어선다 해도 나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노사가 이야기했던 대로 내 상대는 이제 국내의 기업들이 아니었으니까.
‘기화 자동차만 인수해도 일단 재계 1위는 확실하게 되겠어.’
당연한 이야기였다.
비록 지금의 기화 자동차가 파업으로 인해 공장을 전면 가동 중단하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지만, 매출만 3조에 가까운 기업이었다.
작년, 1988년 혜성 그룹 총매출이 7조가 넘었다.
1987년에는 4조가 조금 안 됐었으니, 거의 3조 가까이 증가한 것.
올해도 그 이상 성장할 테니, 기화 자동차까지 합치면 매출 10조는 거뜬히 넘었다.
기화 자동차 말고 다른 기업들까지 인수한다면 미래 그룹을 뛰어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다만,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면 다른 재벌 그룹의 견제가 장난 아니겠군.’
지금도 재계에서 말들이 많았다.
내가 샤롯 그룹의 계열사를 사실상 강제로 인수한 모습을 보고서, 자신들도 같은 꼴을 당할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다 합해서 매출 1조가 안 되는 회사들을 인수할 때도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데,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때는 파급력이 더욱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서 기화 자동차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앱설루트로 세계의 프리미엄 시장을 점령하고 기화 자동차는 대중차로 세계에 진출하는 것이 내 목표였다.
국내의 재벌들이 어떤 견제를 한다 해도 그 목표는 결코 수정하거나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노사의 활약으로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많이 인수한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