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네 상대는 그들이 아니야
나는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신진호 회장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마디로 저에게 사과하시고 싶다, 이 말씀입니까?”
“예……. 작년부터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에는 저의 사과를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신진호 회장의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처음부터 이렇게 사과를 했으면 됐지, 뭘 그렇게 구구절절 변명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한 귀로 흘려들을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래서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준비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과하러 오셨다면서요. 설마 말로만 사과할 생각이었습니까?”
내가 따지듯 묻자 그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 그럴 리 있겠습니까? 사죄의 뜻으로 이한성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잠실의 부동산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겨우 그 정도로 제가 용서해드릴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럼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사실 신진호 회장님이 저를 찾아왔을 때, 저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샤롯에서 어떤 것을 가져와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
내 말에 신진호 회장은 순간 굴욕적인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투항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 모습에 그로서는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인내하였다.
투항하는 자리에서 나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편의점 사업을 하면서 제가 하나 가지고 싶은 게 생기더군요. 바로 식품 관련 회사인데, 마침 샤롯 그룹에 제가 원하는 식품 회사가 있습니다.”
“설마 샤롯 식품을 원하시는 겁니까?”
“샤롯 식품만이 아닌, 샤롯 식품의 지주 회사인 샤롯 제과 전체를 원합니다.”
신진호 회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마 그로서는 샤롯 식품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샤롯의 모태 기업이나 마찬가지인 샤롯 제과까지 내달라고 하니, 당혹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샤롯 백화점 역시도 탐이 나서 그러는데, 프리미엄을 잘 쳐줄 테니 샤롯 식품과 샤롯 제과, 샤롯 백화점 이렇게 세 개의 회사를 넘겨주시죠.”
나는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사듯, 기업을 달라 요구하였다.
당연하겠지만 신진호 회장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이런 일로 농담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신진호 회장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투자 자금으로 2천억이 생겼다는 사실은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2천억으로도 샤롯 그룹의 계열사를 인수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애써 당당한 척하는 그의 모습이 같잖게만 느껴졌다.
‘확실히 2천억만으로는 샤롯 식품은 몰라도 샤롯 제과까지 인수하기는 힘들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내 자금력의 한계가 이천억일 때 하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혜성 정유의 지분 20%를 팔아 벌어들인 2,400억이 내가 보유한 현금의 전체라고 믿는 것부터가 황당한 일이었다.
이전부터 부자라고 소문났던 나인데, 주식까지 정리했으면 얼마나 돈이 남아돌겠는가.
이런 면에서는 신진호 회장도 단순한 구석이 있는 거 같았다.
‘아무래도 현실을 조금 일깨워줄 필요가 있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신진호 회장에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 신진호 회장님은 일본 유력자들과 친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군요.”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이런 소문 못 들어보셨습니까? 한 달 전에 매각된 일본 긴자의 엠파이어 빌딩 소유주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7천억 엔에 팔렸다는 그 빌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 한국인이 과연 누구일 거 같습니까?”
신진호 회장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이한성 회장님께서 도요타에 엠파이어 빌딩을 매각했다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신진호 회장이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닫았다.
7천억 ‘원’도 아니고 7천억 ‘엔’이다.
말 그대로 조 단위의 현금이었으니, 그가 기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래도 제가 샤롯 그룹을 인수하지 못할 거 같습니까?”
“제, 제가 조금 말실수를 한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자금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신진호 회장은 그 즉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는 더 들어봐야 의미가 없을 거 같고, 제 요구에 대한 답변만 듣고 싶습니다.”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간이라.”
나는 피식 웃었다.
간절한 목소리로 시간을 요구하는 신진호 회장의 모습은 꽤 비참해 보였다.
‘그래 봤자 봐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지만.’
저런 성격이니 오히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줘야 했다.
혜성 그룹에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이다.
“조금만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답변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신진호 회장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틀이면 충분하겠지?”
내가 말한 약간의 시간을 신진호 회장은 몇 주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 정도의 관대함은 없었다.
단 이틀.
이틀 안에 답변이 없으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 * *
예상했던 대로 이틀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신진호 회장 쪽에서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측근들과 회의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그 회의를 조금이라도 일찍 끝내기 위해 샤롯 그룹 계열사의 지분을 공개 매집하기 시작하였다.
<2천억 ‘잭팟’의 주인공, 혜성 그룹. 다음 타깃은 샤롯 그룹?>
<혜성 그룹의 공격적인 지분 인수로 샤롯 그룹 전 계열사의 주가가 10% 이상 오르다!>
당연하겠지만 시장은 즉각 반응하였다.
안 그래도 혜성 그룹의 자금이 어디로 향할지 모두가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으니, 시장이 즉각 반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이 회장님! 저에게 시간을 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샤롯 그룹의 지분을 공개 매집하기 시작하자, 신진호 회장이 전화를 걸어 따지듯 말했다.
물론 신진호 회장의 이 같은 말에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래서 드렸지 않습니까? 이틀이란 시간을?”
-이익!
“답변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신진호 회장님에게도 좋을 게 없을 겁니다.”
나는 그리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마 신진호 그놈은 샤롯 제과를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을 거야. 물론 샤롯 백화점도 마찬가지고.)
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국 법인의 모태 기업인 샤롯 제과야 말할 것도 없고, 샤롯 백화점 역시 신진호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키우는 기업이었다.
내가 몇 마디 협박했다고 그 회사들을 포기할 리는 없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토해내게 만들면 그만입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어? 차라리 샤롯 그룹의 심장부를 직접 노리는 게 어떻냐?)
“심장부요?”
(일본 샤롯을 말하는 거다. 신진호가 지금 저리 뻗대고 있는 것도 일본 샤롯의 지분을 믿고 그러는 거잖아?)
노사의 말처럼 샤롯 제과든, 샤롯 백화점이든 아니면 샤롯 호텔이든 간에 최대 주주는 일본 샤롯이었다.
일본 샤롯이 샤롯 호텔과 샤롯 제과의 지분 20%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두 회사가 나머지 계열사의 지분을 30% 이상 가지고 있는 구조였다.
그 외에도 신진호 회장의 우호 지분이 5%에서 10% 정도씩 가지고 있었으니, 신진호 회장의 자신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신진호 회장을 완벽하게 굴복시키려면 노사가 말한 것처럼 일본 샤롯을 인수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으리라.
“하지만 일본 샤롯을 인수하려면 너무 많은 자금이 소요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일본 샤롯만 인수한다면 샤롯 그룹 전체를 인수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비상장 회사인 일본 샤롯을 인수하려면 처음 생각했던 자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일본 샤롯을 소유한 주주들은 전부 신진호 회장의 우호 세력일 텐데, 그들에게서 지분을 받아내려면 샤롯 그룹의 지분 가치를 크게 인정해주는 수밖에 없어. 아무리 못해도 두 배 이상으로 말이야.’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깝게 느껴졌다.
굳이 큰돈을 써가며 샤롯 그룹을 인수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게 어때서?)
“예?”
(너는 아직도 네가 가진 부를 체감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2조야. 2조. 일본에 있는 현금 자산만 2조에 가깝다고. 네가 가진 돈이면 샤롯 그룹 정도야 몇 개도 거뜬히 인수하고도 남아.)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확실히 2조란 돈이 크게 느껴지기는 했다.
(돈 아깝게 생각하지 말고, 이참에 확실하게 응징하도록 해. 그깟 돈이야 이제 얼마든지 벌 수 있잖아?)
“알겠습니다.”
일본 샤롯을 인수한다면 몇천억은 소요될 게 분명했지만, 확실히 노사의 말처럼 돈 몇 푼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수천억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내가 너무 소심하게 굴었군. 예전의 내가 아닌데 말이야.‘
노사의 조언을 들은 나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아직 일본에 있는 유동연 대표를 시켜 일본 샤롯의 주요 주주들에게 지분 인수 의사를 타진하였다.
처음엔 단호하게 거절하던 주주들이지만, 내가 가격을 더 높게 부르니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두 명이 지분을 팔기 시작하자 신진호 회장 쪽에서 다시 반응이 왔다.
-이한성 회장님!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원래는 계열사 두 개 정도로 만족하려 했는데, 신진호 회장님이 미련을 못 버리시는 거 같아서 아예 샤롯 그룹 전체를 인수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회사가 저만의 것도 아니고 관계사들을 설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건 신진호 회장님 사정 아닙니까? 그리고 관계사들을 힘들게 설득할 필요 없습니다. 그룹 전체가 저에게 넘어오면 그들은 오히려 기뻐할 겁니다.”
아마 지금도 웃음을 짓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 때문에 주가가 엄청나게 오르고 있었으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미 몇 번이나 말했는데, 또 말해야 합니까? 샤롯 제과와 샤롯 백화점, 샤롯 식품 이렇게 세 개를 넘기십시오. 그러면 조용히 끝날 일입니다.”
신진호 회장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세 회사를 넘길 테니, 일본 샤롯은 더 건드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노사의 말대로였다.
한국 샤롯 계열사를 노릴 때는 끝까지 버티는가 싶더니, 일본 샤롯을 노리니 바로 투항을 선택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일본 샤롯을 노릴 걸 그랬다.
“제가 약속은 확실하게 지키는 성격이라서, 이미 인수하기로 약속했던 지분은 인수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일본 샤롯이 신진호 회장의 역린인 것을 알았으니, 지분 몇 % 정도는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다.
단 1%만 가지고 있어도 신진호 회장에게는 엄청난 압박일 테니 말이다.
(신진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투항하는구나.)
“저야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
(그렇겠지. 샤롯 제과에 샤롯 백화점까지 얻었으니.)
“하하, 샤롯 식품까지 세 개의 기업을 인수하면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재계 2위입니다.”
처음 빅4가 되었을 때만큼 기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특히나 기분 좋은 사실은 재계 1위가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겨우 그런 거에 만족하지 마라. 네 상대는 국내의 기업들이 아니라, 세계의 글로벌 기업들이니까.)
오랜만에 듣는 노사의 따끔한 충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재계 2위가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으니, 새삼스레 기뻐할 필요는 없었다.
도요타부터 시작해서 모토로라, 애플 그리고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까지.
앞으로 넘어야 할 적들이 무수히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