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악연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
<혜성 그룹, 삼라 상선 전격 인수.>
<해운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나?>
11월 4일.
재계는 혜성 그룹이 삼라 상선을 인수했다는 소식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가전과 자동차, 반도체에 이어 이제는 해운업인가?”
“의외로군. 휴대폰 사업에 집중할 줄 알았는데.”
“휴대폰이야 아직 시장이 커지기는 이른 시점이니, 해운업을 먼저 공략하려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혜성폰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으니 말이야.”
“하긴, 해운업의 불황도 옛말이니 혜성 그룹이 해운업을 확장하려는 것도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겠어.”
혜성 그룹은 재계 10위로 출발하여 6년도 안 되어 재계 3위까지 치고 올라온 기업이었다.
전자부터 반도체, 자동차까지.
모두가 도박이라고 이야기했던 사업들을 전부 성공시킨 기업이었으니, 재계의 인물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 들었어? 혜성 그룹이 선정 상선도 인수한다더군.”
“삼라 상선을 인수한 지 얼마나 됐다고 선정 상선까지 인수해?”
“허, 지금도 선박 수가 가장 많다고 하던데, 이제는 매출로 따져도 독보적인 1위 기업이겠어.”
“단순한 1위가 아닐걸? 시장 점유율로 따지면 아마 50%도 넘을 거야.”
삼라 상선을 인수하기 무섭게 또 다른 해운 기업을 인수한 혜성 그룹.
해운 업계에서는 비상이 걸렸지만, 대부분의 재계 인사들은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해운업은 미래 상선과 혜성 해운이 양분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기에 혜성 그룹에서 사업을 확장한 것으로 유난 떨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혜성 그룹의 소식을 듣고는 재계의 인사들은 매우 놀라고 말았다.
<혜성 그룹, 핀란드의 노키아 기업에 인수 의사 타진.>
혜성 그룹은 국내에서 한창 해운 기업들을 인수하고 있으면서도 외국에서 또 다른 인수전을 진행하였다.
“노키아? 거기는 어디지?”
“통신 사업도 하고 타이어랑 이것저것 생산하는 기업이라던데?”
“갑자기 거기는 왜 인수한다는 거지?”
“무슨 이유로 인수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떤 자금으로 인수할지가 중요한 거지.”
“그러게. 대출을 받았다는 소식은 없는데, 혜성 그룹은 무슨 돈으로 노키아까지 인수한다는 거야?”
언론에서 전해지는 노키아의 인수 자금은 아무리 못해도 수백억대였다.
물론 혜성 그룹의 자금력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과 관련된 기사를 조금만 찾아봐도 대부분의 영업이익이 반도체 생산 시설과 자동차 생산 시설 등, 각종 사업에 재투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현재의 혜성 그룹은 사내 유보금이 그리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혜성 그룹은 거침없이, 심지어 들어본 적도 없는 외국의 기업까지 인수하고 있었다.
재계의 인사들로서는 혜성 그룹의 자금력에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재계 전체가 혜성 그룹을 주목하고 있을 때, 또다시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이란 다름 아닌,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기업이 혜성 정유의 지분 20%를 2,400억에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중동이 석유 때문에 돈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2,400억이라니? 미쳤군!”
“혜성의 돈이 왜 저렇게 남아도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2,400억이면 오히려 아직도 여력이 남았겠는데?”
“여력이 남은 정도겠어? 기업 몇 개는 더 인수하고도 남을걸?”
혜성 그룹이 다음에는 어디를 또 인수할지 재계의 인사들 모두가 집중하여 지켜봤다.
* * *
샤롯 그룹의 신진호 회장 역시, 혜성 그룹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한성, 그 독하기 그지없는 놈이 복수를 포기할 리가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노리고 있을 게 분명해.”
신진호 회장과 사실상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는 쌍호 그룹의 김종우 회장은 이미 쌍호 정유를 내주며 한성에게 무릎을 꿇은 상황이었다.
쌍호 정유를 내준 이후, 김종우 회장은 모든 의욕을 상실하였는데 40대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후계자 이야기가 거론될 정도였다.
한때 5위까지 올랐던 재계 순위가 18위까지 떨어진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같은 쌍호 그룹의 상황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는데 신진호 회장이 방심할 리는 없었다.
“혜성 그룹에서 노키아를 인수한다고 합니다.”
“노키아라.”
허영민 기획조정실장의 보고에 신진호 회장은 턱 끝을 쓰다듬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혜성 그룹은 샤롯 그룹의 계열사를 노리지 않고 있었다.
노키아를 인수할 자금이면 샤롯 그룹의 계열사 한두 개 인수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으니, 신진호 회장으로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건가?’
은성 그룹까지 거의 제쳤다고 이야기 나오는 혜성 그룹이었다.
사실상 혜성 그룹과 맞설 수 있는 기업은 미래 그룹밖에 없다는 뜻.
재계 10위에 간신히 드는 샤롯 그룹이 하찮게 느껴진다 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의 성격상 이대로 넘어갈 리가 없는데.’
작년에도 신진호 회장은 한성에게 사과하며 넙죽 숙이려 하였지만, 한성은 그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었다.
아직 그에게 앙금이 남아있었으니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샤롯 그룹을 적으로 두고 있다는 말인데,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오히려 수상하게만 느껴졌다.
“회, 회장님!”
“무슨 일이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혜성 그룹에 2,400억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뭐?”
신진호 회장은 입을 떡 벌렸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제일 부자라고 소문났던 한성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2,400억이라는 추가 돈이 생겼다니!
‘그놈은 재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누구는 추징금과 벌금으로 낼 돈을 모으느라 등골이 휠 지경인데, 한성은 앉아서 2,400억을 벌었다니 샘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질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수천억의 자금이 생긴 한성이 다음으로 어떤 기업을 인수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한성 회장이 다음에 노릴 곳은 어디일까?”
“뻔한 거 아니겠어? 당연히 샤롯 호텔을 노리겠지.”
“샤롯 호텔? 거기는 작년에 포기한 거 아니었나?”
“쌍호도 끝까지 응징하여 결국 쌍호 정유까지 토해내게 했던 이한성 회장이야. 신진호 회장이라고 용서할 리가 있겠어?”
아니나 다를까.
재계에서도 혜성 그룹이 곧 샤롯 그룹의 계열사들을 인수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랍 놈들은 왜 엄한 곳에 돈을 써가지고!’
신진호 회장은 얼굴도 모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들에게 이를 갈고는 허영만 기획조정실장에게 물었다.
“혜성 그룹이 어떻게 나올 거로 생각하나?”
“자금도 넘쳐나니, 지난 악연을 정리하려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 허영만 기획조정실장의 의견도 그와 같았다.
“우리 기업을 인수하려 들까?”
“차라리 그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으나, 이한성 회장의 성격이라면 정부도 이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부를?”
“예, 김영산 정부가 가장 총애하는 기업인이 이한성 회장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정권의 표적이 된 상태인데, 이한성 회장의 입김까지 더해진다면 내년의 상황도 지금보다 더 좋아지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5공 청문회가 시작했을 때부터 곤욕을 겪던 신진호 회장이었다.
지금도 계속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언제 다시 징역을 살게 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이 수천억의 자금을 활용하여 본격적으로 샤롯 그룹을 괴롭히려 든다면 신진호 회장으로선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을 것이다.
‘제기랄. 다시금 그놈의 사옥을 찾아가야 하는 건가?’
이번에는 진짜로 무릎을 꿇던가 해야 할 거 같았다.
그 정도로 샤롯 그룹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 * *
노키아 인수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부도 위기에 처한 상태라서, 저쪽이 오히려 급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실무진끼리 조율을 마무리한다면 올해 안에는 인수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도 잘 진행되고 있다지?’
사실 노키아보다 중요한 것은 기화 자동차였다.
매출만 해도 조 단위의 회사였던 것.
다행히, 노사가 인수 과정을 맡아준 덕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지분을 벌써 3% 가까이 인수하였다.
시간이 제법 걸리기는 하겠지만, 내년 중에는 기화 자동차와의 인수합병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정부에서 어떻게 나올지가 문제인데.’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김영산 정권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준 것도 있는데, 정당하게 인수합병한 것을 가지고 문제 삼을 수는 없을 테니까.
뭐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회장님. 여기 지시했던 내용은 다 정리해놨습니다.”
그때, 양준현이 보고서 하나를 건네며 그 같이 말했다.
“샤롯 그룹의 지분 현황을 말하는 거지?”
“예.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복잡하게 꼬여있군.”
“뭐, 일본 샤롯도 끼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한 거 같습니다.”
“인수하는 게 쉽지는 않겠어.”
하기야, 쉬웠다면 진즉에 샤롯 그룹의 계열사 하나 정도는 가져왔을 것이다.
샤롯 유통이든, 샤롯 호텔이든, 샤롯 계열사 중에 탐나는 회사가 꽤 있었으니까.
“정말로 샤롯 그룹의 계열사를 인수하실 생각입니까?”
“이미 재계에 소문이 퍼지지 않았나? 내가 샤롯을 인수할 거라고?”
“소문을 듣긴 했는데, 회장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저로서는 오히려 금시초문이었던지라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헛소문은 아니다. 이참에 샤롯 그룹의 계열사 한두 개 정도는 인수할 생각이야.”
“흠, 쉽지는 않겠습니다. 샤롯 그룹이 매출이나 자산 규모야 적다지만, 오너 일가의 재산은 다른 재벌 총수들과 비교해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니, 말입니다.”
양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한 말처럼, 신진호 회장의 개인 자산은 상당한 편이었다.
내부 지분율도 높아 경영권 방어에 유리한 면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 정권이 재벌 개혁을 진행하면서 샤롯 그룹도 큰 타격을 받았지. 지분 구조를 개편하라는 압박도 받고 있고. 단기간에는 힘들어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상장 기업 한두 개쯤 인수하지 못할 것도 없어.”
단순히 샤롯 그룹의 기업이 매력적이라서 인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이른바 본보기였다.
혜성에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 본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샤롯 그룹에 타격을 줄 생각이었다.
“회장님께서 그런 마음을 품으셨다니. 왠지, 신진호 회장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인과응보지.”
신진호 회장이 애초에 나에게 덤비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아니면 김종우 회장이 나에게 굴복했을 때, 같이 굴복했던가.
내가 샤롯 그룹과 끝을 보려는 것은 결국 신진호 회장의 잘못이었다.
“그런데 회장님.”
“왜?”
“저희 아버지에게 무슨 영약이라도 주셨습니까?”
그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영약이야?”
“아니, 분명 저번 달까지만 해도 건강 걱정이 들 정도로 힘이 없으셨는데, 회장님을 만나고 나서 기운이 넘치지 뭡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9백억을 벌었는데 기운이 넘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사업을 확장한다고 하시는데, 지금 그 일 때문에 세계 그룹 전체가 난리도 아니랍니다.”
“좋은 일이네.”
“저야 좋기는 한데, 갑자기 저리 바뀌시니 뭔가 어색합니다.”
똑똑!
그렇게 양준현과 대화를 나누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소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샤롯 그룹의 신진호 회장이 면담을 청하였습니다.”
이소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교롭기 짝이 없었다.
하필 지금 시점에 나를 찾아오다니 말이다.
신진호 회장도 양반은 못 되는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