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이 정도 돈이면 재계 1위도 기정사실이지
‘뭐, 그렇게까지 도박을 할 생각은 없지만.’
미국 당국의 시선도 의식해야 하니, 원유 선물에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조 단위를 벌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리라.
‘그러고 보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도 곧 들어오겠군.’
혜성 정유의 지분 20%를 시중 가격보다 무려 5배나 비싸게 사준다던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심지어 일시불로 인수 금액을 지불한다 하였는데, 그 금액이 무려 2,400억이나 되었다.
쌍호 정유를 4백억 정도 되는 금액으로 지분 57%를 인수하였으니, 거의 열 배 이상의 수익률이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역시 주식을 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회사를 키우는 게 더 남는 장사 같군.’
몇 년 동안 주식을 해서 번 돈이 3천억인데, 혜성 정유의 지분을 전체도 아니고 20%만 팔아서 그에 근접하게 벌었다.
혜성 그룹의 이름값이 그만큼 올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투자 활동을 줄이고 내 사업에 더욱 비중을 높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회장님, 세계 그룹의 양희수 회장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사색에 잠겨 있는 나에게 이소희가 그 같은 말을 전해주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이 회장, 오랜만에 얼굴 좀 봅시다.
내가 전화를 받자 양희수 회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런 양희수 회장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 다른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존대를 하시고 그러십니까?”
-이 회장이 자식도 낳았고, 사회에서의 체면도 있으니, 이제는 예우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시는 게 저는 더 좋습니다.”
권오중 회장이 반말할 때는 가끔 기분 나쁠 때가 있었지만, 양희수 회장은 달랐다.
그는 나를 사위처럼 대했고 나 역시 그가 집안 어른처럼 느껴졌기에 반말을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편하군. 사실 요즘 얼굴을 자주 못 봐서 그런지, 자네와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아닌가 걱정했거든.
나이가 들면 오히려 어려지는 사람도 있다더니, 양희수 회장이 딱 그런 거 같았다.
겨우 몇 주 얼굴을 못 본 거 가지고 그런 걱정을 하다니 말이다.
“괜한 걱정을 하고 그러십니다. 저와 양희수 회장님의 관계가 겨우 얼굴 몇 번 못 본 것으로 깨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하, 그런가?
“오늘 시간 되시면 오늘 바로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늘? 이 회장, 시간 괜찮겠나?
“마침 저도 양 회장님께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양희수 회장도 투자자 중의 한 명이니, 일본 투자 상황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 투자했던 50억이 900억으로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양 회장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벌써 기대되는군.’
이전에도 내가 300억까지 기대할 만하다고 예고한 바 있었다.
겨우 6배 수익률로도 경악하는 반응을 보여주던 양희수 회장이었는데, 6배를 넘어 20배에 가까운 수익률을 거뒀다고 하면 엄청난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었다.
-알겠네. 오늘 잠실에서 보기로 하지.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아니야. 부탁할 것도 있으니, 내가 찾아가는 게 맞네.
부탁이라.
5공 시절이었다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부담될 게 없었다.
금전적인 지원이든, 아니면 정치적인 지원이든, 어떤 것이라도 거리낌 없이 지원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 *
“오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불편할 게 뭐가 있나. 그보다는, 혜성 그룹의 사옥을 보며 다시 감탄했을 뿐이네.”
“세계 그룹의 사옥도 국내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건물 아닙니까?”
“무리해서 세운 사옥인데, 자네라도 좋게 봐줘서 다행일세.”
양희수 회장과 대화를 나누는데, 양준현이 웃는 얼굴을 하며 커피를 건네주었다.
“커피 드십시오.”
“집에서도 준현이가 타준 커피는 마신 적이 없는데, 여기서 다 마시는군.”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귀하게 자란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 하도 엄하게 가르치셔서 궂은일도 많이 했었는데 말입니다.”
“이 녀석이?”
“농담입니다. 농담, 두 분 이야기 나누십시오. 저는 제 일을 하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양준현이 물러나자 양희수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은 30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성격이 가벼운 거 같아.”
“일할 때는 누구보다 진중한 모습을 보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자네는 기현이도 높게 평가하더니, 준현이까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양이군.”
“제가 괜히 비서로 쓰는 게 아닙니다. 유전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교육을 잘 받은 것인지, 둘 다 능력이 출중합니다.”
내 말에 양희수 회장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준현이에게는 너무 칭찬하지 말게. 그 녀석은 칭찬해 주면 기어오를 녀석이야.”
속으로는 누구보다 자식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구는 모습이 뭔가 우습게도 느껴졌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참 정신이 없는 거 같아.”
“정신이 없으시다니요?”
“청문회에, 금융실명제에, 거기다 범죄와의 전쟁까지 벌어지고 있지 않나? 나이 때문인지는 모르겠네만, 현실을 따라가기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정권이 바뀌고 재계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기는 했다.
이전에는 그저 정권에서 달라고 하는 대로 뇌물을 건네주기만 하면 모든 게 원만히 해결되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세계 그룹의 회장이신 양희수 회장님까지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군.’
5공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양희수 회장이었다.
그런 양희수 회장조차 정권이 바뀐 일에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김영산 정권이 어지간히 재계의 미움을 산 듯싶었다.
“다른 재벌 총수들이 괜히 은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예?”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퇴를 운운하는 것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왕 회장님이나, 구 회장님이나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나. 나도 슬슬 물러날 때가 된 거 같아.”
“이렇게 정정하신데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러십니까?”
“정정하기는. 늙어서 글자도 제대로 못 보고 있다네. 머리도 제대로 안 돌아가고 말이야.”
“…….”
양희수 회장은 은퇴하기로 확실하게 마음을 굳힌 듯하였다.
나로서는 말리고 싶었지만, 사실 크게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시대가 변한 만큼, 1세대 경영인들이 물러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니까.
“내가 이 회장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도 다름이 아니라, 기현이를 잘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걸세.”
무슨 부탁을 하나 했더니, 겨우 그런 부탁이었나.
양기현을 보살피는 일이야 굳이 양희수 회장의 부탁이 아니어도 어련히 잘할 생각이었다.
사적으로는 내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공적으로는 든든한 동맹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거는 굳이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네. 나는 이 회장이 너무 큰 사람이 되어 버려서 괜히 걱정했었네. 혹여나 우리가 거추장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나는 그의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양희수 회장이 해준 것이 있는데 내가 세계 그룹을 하찮게 생각하겠는가.
사실, 양희수 회장이 지원해준 돈으로 일본에서 얼마를 벌었는지만 생각해도 나로서는 세계 그룹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를 너무 기회주의자처럼 보시는 거 같아 섭섭합니다.”
“늙어서 그래, 늙어서. 오해해서 미안하네.”
“아무래도 재계 순위가 낮아진 일로 상심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뭐, 그렇기도 하고.”
“다시 기업을 확장하셔야 할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화제를 돌릴 겸, 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양희수 회장이 반색하며 말했다.
“세계 그룹에서 할 만한 사업 아이템이라도 있는 건가?”
사업 아이템이라.
그는 내가 무슨 사업적으로 조언해 줄 것을 기대했나 보다.
“아이템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바로 현금입니다.”
“현금? 갑자기 무슨 현금을 말하는 거야?”
“잊으셨습니까? 양 회장님께서 저에게 50억을 투자하셨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 일본에 투자했다는 그 돈을 말하는 건가?”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가 투자를 시작하고 3년간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왔습니다.”
양희수 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역시 일본의 소식을 듣고 있었을 테니, 내 말에 기대감을 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그래서 얼마나 올랐나?”
“제가 전에 얼마까지 오를 거라고 했었죠?”
“자네는 3백억까지 오를 거라고 했었지.”
“3백억은 아닙니다.”
“흠, 괜찮네.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 나는 두 배 정도만 따도 만족이야.”
두 배라니.
기대치가 낮아도 너무 낮았다.
겨우 그 정도 벌 거였으면 일본까지 가지도 않았을 거다.
“3백억이 아니라, 정확히 그 세 배인 9백억입니다.”
“……응?”
“양 회장님께서 투자하신 50억이 9백억까지 올랐습니다. 물론 세금이나 수수료 등을 제외한 액수입니다.”
잠시 양희수 회장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9백억이란 액수가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양희수 회장은 이내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9백억이라고?!”
나는 예상했던 반응을 지켜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10대 재벌의 총수가 내 말 한마디에 눈을 부릅뜨며 놀라는 모습이 이상하게 재미있게만 느껴졌다.
“아까 했던 이야기를 번복해야 할 거 같네. 은퇴하겠다는 말은 취소할 테니, 신경 쓰지 말게나.”
“예?”
그러던 중, 양희수 회장이 불쑥 그 같은 말을 하였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9백억이라는 돈이 생겼는데 은퇴하는 것이 뭔가 아깝게 느껴져서 말이야.”
양희수 회장의 그 같은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까 은퇴하겠다고 말했을 때의 그 초연했던 모습이 마치 연기처럼 느껴졌다.
‘역시 돈의 위력은 대단하군.’
* **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아무리 그래도 9백억이라니.’
양희수 회장은 혀를 내둘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대를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성의 투자 실력이야 오래전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더군다나 일본의 땅값이 엄청난 상승세를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도 듣고 있었기에, 수익률을 어느 정도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9백억이면 거의 20배 가까이 오른 것인데, 일본의 땅값이 아무리 올랐다 해도 20배까지 오를 일은 절대 없었던 것이다.
‘이 회장이 괜히 재신 소리를 듣는 게 아닌 거 같군.’
원래도 한성을 높게 평가하던 양희수 회장이었다.
그런데 2,000%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수익률까지 경험하고 나니 한성이 마치 재신처럼 느껴졌다.
돈의 신이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할 거 같은 수익률이었으니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나저나 나에게 9백억을 줄 정도면 이 회장은 얼마를 벌었다는 거지?’
문뜩 그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성은 3년 전에도 이미 양희수 회장보다 재산이 많았었다.
당연히 일본에 투자한 자금도 양희수 회장의 50억보다 훨씬 컸을 터.
심지어 양희수 회장이 투자한 자금도 수수료 형태로 50% 이상 가져갔으니, 한성이 벌어들인 수익이 천문학적일 것이란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3천억쯤 될까? 아니, 어쩌면 5천억이 넘을 수도 있겠어.’
설령 그가 생각하는 액수만큼은 아니어도 천억 단위는 벌어들였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 정도만으로도 실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당장 양희수 회장만 해도 9백억으로 재계 순위를 7위까지 올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중이었으니.
‘이 회장이라면 나보다 더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테니, 재계가 다시 혜성으로 인해 시끄러워지겠는데?’
차라리 9백억으로 혜성 그룹의 주식을 사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혜성 그룹이 재계 1위가 되는 것도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