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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97화 (197/300)

197화 원유 선물을 해 봐?

나는 오랜만에 일본으로 갔다.

“일본은 여전히 화려하군.”

한국도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일본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았다.

특히 낮보다는 밤이 화려하였다.

아직 한국의 밤은 어둡기 그지없는데, 일본의 밤은 형형색색의 현란한 네온사인들이 명멸하며 낮보다도 밝게 빛났다.

치안이 걱정되지도 않은지 여인들도 거침없이 밤거리를 행보하였고 말이다.

‘이런 나라의 경제가 2년 안에 붕괴한다니. 역시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네.’

사실 2년도 길게 본 것이다.

노사가 괜히 1988년인 지금부터 현금화하라고 한 게 아닐 테니까.

나비효과 때문에 나도 이제는 조심해야 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위기가 닥칠지 모르니 말이다.

어쨌든 도쿄의 밤까지 구경한 나는 첫날이기도 해서 아무런 일정 없이 호텔에서 쉬기로 하였다.

물론 내가 향한 호텔은 이베스 호텔 즉, 내가 소유한 호텔이었다.

“확실히, 구조가 색다르군요.”

“예, 고급스러움 대신 편안함을 추구하다 보니 이런 구조가 잡혔습니다.”

내 말에 이베스 호텔의 니시다 노리마사 일본 법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다른 지역의 체인점들도 모두 동일한 구조인가요?”

“예, 룸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침구류 제조사부터 창문 위치, 룸서비스 메뉴들까지 모두가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도박을 싫어하는 손님들 입장에서는 최고의 호텔이라 볼 수 있겠군요.”

이베스 호텔은 노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가성비 최고의 호텔이었다.

어떤 지점을 가도 동일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는데, 나라도 괜히 더 싼 모텔을 찾느라 발품 파는 것보다 이베스 호텔에서 숙박할 거 같았다.

운이 좋다면 시설이 좋은 모텔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비위생적이거나 비좁은 환경에서 숙박해야 했으니 말이다.

‘뭐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혜성 호텔 같은 고급스러운 호텔을 찾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성비 좋은 제품이 프리미엄 제품보다 퀄리티가 좋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 뒤로도 나는 니시다 대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다행히 이베스 호텔의 일본 법인은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긴, 원래도 도요코인이란 기업을 만들어 세계 최대 규모의 호텔 체인점으로 키우는 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음 날 오전에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과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혜성 그룹에서 제조한 휴대폰을 저도 사용해 봤는데 정말 잘 만들어졌더군요. 처음에 만든 게 그 정도니, 모토로라를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할 거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손정의 사장은 HS-88을 가장 먼저 언급하였다.

“과찬입니다. 이제 막 출시한 입장에서 모토로라와 비교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앱설루트 역시도 출시하고 1년도 안 돼서 돌풍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HS-88이라고 다를 거 같지는 않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나 일본에 수출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일본 수출이라.

물론 고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기로 하였다.

의류 제품이나, 주류 제품이면 모를까, 휴대폰이나 자동차 같은 고가의 제품이라면 절대 한국 제품을 선택하지 않는 게 일본인들이었다.

미래의 일성 전자도 일본 시장은 사실상 포기했다고 하니, 나 역시 일본 시장에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내년부터는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수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유통사는 어디를 고려하고 계십니까?”

“저야 물론 손정의 사장님과 유통 제휴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크게 반색하는 손정의 사장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작 나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손정의 사장은 HS-88의 성공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니 뭔가 미안하게 느껴졌다.

‘미래가 바뀔 수도 있으니 두고 봐야겠지. 가성비만 좋다면 일본인들이라고 우리나라 제품을 불매하지만은 않을 테니 말이야.’

아직은 거품 경제가 붕괴하기 전이라서 일본인들의 인심도 조금은 후한 상태였다.

노사가 이야기해 준 미래처럼 일본이 한국을 질투하며 한국산이라면 악착같이 불매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 일본의 휴대폰 시장을 공략한다면 일성 전자보다 좋은 성과를 볼 수도 있었다.

손정의 사장을 만난 뒤, 오후에는 유동연 대표를 만났다.

사실 일본에 온 이유는 유동연 대표를 만나기 위함이라고 봐도 무방하였는데, 나는 그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유 대표님, 내년에는 한국으로 돌아오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부동산을 정리하실 생각입니까?”

유동연 대표는 내 말에 놀라지 않고 되물었다.

하긴, 내가 올해 들어 부동산 매입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행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니 그가 그런 추측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큰 것들은 올해 안에 정리하고 내년 초에 자잘한 것들까지 전부 정리하십시오.”

일본의 빌딩 중에는 한국 돈으로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빌딩도 적지 않았다.

내가 보유한 빌딩 중에서도 그만한 가치를 지닌 빌딩이 두어 개 있었는데, 일단 그것들부터 정리해야 할 거 같았다.

그 정도로 덩치가 큰 매물은 제아무리 돈이 많은 일본인들이라 해도 쉽게 인수할 수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엠파이어 빌딩은 도요타에다 팔아버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도요타에다 말입니까?”

“가장 비싼 돈을 제시했지 않습니까? 악연이 있다는 이유로 구태여 도요타를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입가에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요타가 제시한 인수가는 무려 6,700억 엔.

뭐에 쓰려는 것인진 몰라도 비싸게 사준다면 나야 좋았다.

‘내후년에 손해가 아주 엄청나겠어.’

악연이 있는 도요타가 엠파이어 빌딩을 인수하고 크게 손해 볼 것을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 * *

도요타 데쓰로는 혜성 그룹과의 거래가 파탄이 났음에도 끝내 엠파이어 빌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엠파이어 빌딩의 입지는 일본 수도의, 그것도 도쿄 긴자의 주요 상권에 위치하였다.

몇 년만 지나도 몇천억 수준이 아니라, 1조 엔 이상까지도 올라갈 것이 분명하였기에 도요타 데쓰로로서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하여 도요타 데쓰로는 한성의 자산을 대신 관리하는 유동연 대표를 찾아갔다.

한성을 찾아가봤자 협상에 실패할 것이 분명하니, 그의 수하인 유동연 대표를 설득하려는 생각이었다.

“유 대표님, 부동산을 조금씩 정리한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으나, 엠파이어 빌딩을 매각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동연 대표는 도요타 데쓰로가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단호하게 거절을 표하였다.

회장인 한성이 도요타와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그라고 모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요타 데쓰로는 그런 유동현 대표의 태도에 굴하지 않고 말했다.

“유 대표님은 일본에 돈을 벌려고 오신 거 아닙니까?”

“투자하기 위해 오긴 했습니다만, 도요타는 제값을 잘 쳐주는 기업이 아니라서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는 제가 시세를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때의 일은 제가 다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한국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수치스러웠지만, 엠파이어 빌딩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올해에만 거의 3배 이상 가격이 오른 엠파이어 빌딩이었다.

일본의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으니, 내년에도 더 오르면 올랐지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요타 데쓰로는 자존심보다 실리를 택하였다.

“지금은 시세를 잘 쳐줄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얼마까지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다소 노골적인 질문에 도요타 데쓰로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7천억 엔. 현재 시세보다 더 쳐서 7천억 엔을 드리겠습니다.”

“……!”

언제나 무표정이었던 유동연 대표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그 표정은 다름 아닌, 경악이었다.

‘당연히 놀라야지. 시세보다 몇백억은 더 쳐줬는데 말이야.’

도요타 데쓰로는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었다.

아깝게도 느껴졌지만, 길게 보면 몇백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년만 가지고 있어도 시세가 수천억은 오를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시세는 제대로 쳐준 거 아닙니까?”

“흠…….”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습니까?”

망설이는 유동연 대표의 모습을 보며 도요타 데쓰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유동연 대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돈을 많이 쳐준다 해도, 도요타에 매각하는 것을, 회장님께서 좋게 봐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한성을 무시하지도 않았을 텐데, 참 아쉽게 됐다.

‘혜성 그룹이 그렇게 힘이 센 기업일 줄 누가 알았겠어.’

한국의 기업이라고 무시한 게 실책이었다.

“유 대표님. 유 대표님이 굴리는 자산이 얼마입니까? 몇조 엔은 족히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중에 유 대표님의 자산은 얼마나 됩니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커미션으로 10억 엔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에게 엠파이어 빌딩을 넘겨주시지요.”

도요타 데쓰로는 통 크게 10억 엔을 주겠다고 말했다.

엠파이어 빌딩을 얻을 수만 있다면 커미션 10억 엔쯤은 감당 못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0억 엔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유동연 대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제안에 마음이 동한 것이리라.

“조, 좋습니다. 거래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현명한 결정입니다.”

도요타 데쓰로는 쾌재를 불렀다.

지지부진하던 엠파이어 빌딩을 마침내 인수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한성 회장이라고 했던가? 그자도 참 멍청하군. 앞으로 더 오를 일만 남았는데 하필 이런 시점에 발을 떼다니 말이야.’

뭐 돈이야 많이 벌었겠지만, 대출 다 갚고 나면 얼마나 남을지 의문이었다.

그냥 2, 3년만 더 갖고 있었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벌었을 텐데…….

도요타 데쓰로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한국 기업이 제때 빠져줬으니 기뻐하면 기뻐할 일이지,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 * *

도요타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엠파이어 빌딩을 매각하는 데 성공했으니, 더는 일본 부동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제 곧 엠파이어 빌딩처럼 규모가 큰 물건은 인수자를 찾기도 어려워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부동산 가치가 아무리 높아져 봐야 의미가 없는데, 다행히 제때 털었으니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빚도 거의 다 갚았으니, 자잘하게 남은 부동산만 현금화하고서 한국으로 들고 오면 될 거 같았다.

“2조라.”

세금과 대출 그리고 양희수 회장이나 다른 투자자들에게 돌려줄 돈까지 계산해도 내게 떨어지는 돈은 모두 2조였다.

‘이 돈이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회사들을 모두 인수하고도 돈이 남겠지?’

다시 생각해 봐도 2조란 돈은 실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대기업이라면 계열사 전체를 통째로 인수하고도 남을 금액이었던 것이다.

‘돈이 남으면 유가에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한국의 미래는 많이 바뀌었어도 세계의 미래는 크게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야.’

석유 파동 때만큼 유가가 널뛰기할 날도 머지않았다.

나비효과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2조도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돈을 벌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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