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너도 이제 세계적인 부자야
(그런 조언을 했다고?)
“예, 지현이도 그렇고 지은 씨도 치안을 걱정하는 일이 많아지니, 이참에 치안 문제도 해결할 겸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고영태 비서실장과 했던 대화를 노사에게 전해주었다.
그러자 노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부가 바뀌어도 조폭들은 죽을 운명이었구나.)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조폭들은 사라져 주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뭐, 완전히 사라질 일은 없을 거다. 어떻게든 양지로 기어 나오려고 하겠지. 아무튼, 김영산 정부가 너에게 많이 의지하는 거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지한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고, 그저 저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는 한 거 같습니다.”
(그래?)
노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화제를 전환하였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기 전에 주식은 전부 다 뺐겠지?)
“물론입니다. 이미 올림픽 폐막식 전부터 주식을 전부 정리해서 현금화한 상태였습니다.”
내 말에 노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내가 자신의 말을 잘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거 같았다.
나야 스승이기도 한 노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전부 현금화했으면 아무리 못해도 3천억은 있겠구나.)
“예, 대략 그 정도 됩니다.”
(일본의 부동산 자산도 조금씩 정리하고 있지?)
“올해 안에는 일본의 자산도 거의 다 현금화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노사가 경고했던 일본 경제가 붕괴할 날도 머지않았다.
내후년에는 일본 경제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하여 부동산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는데, 다행히 아직은 수요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기업이고, 일반 서민이고, 현금이 말라가고 있었지만, 은행에서 거의 제한이 없게 느껴질 정도로 대출을 해주니 일본 경제가 붕괴한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래가 활발하였다.
(그렇다면, 올해 말쯤에 네 손에 쥐어지게 될 현금 자산이 아무리 못해도 2조는 넘겠는데?)
나는 내심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노사가 회귀하기 직전까지도 한국에서 조 단위의 현금을 쥔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었다.
현금 가치가 10배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근접할 정도로 비교가 된다고 하니, 나는 그야말로 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현금 부자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 미국 자산까지 합치면 2조 하고도 2천억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면 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혜성 그룹의 지분 가치까지 포함한다면 아마 세계적인 부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뭐 그래봤자, 일본의 부자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했다.
일본에는 우리 돈으로 5조가 넘는 부자들만 5명이나 됐으니까.
심지어 일본 1위이자 세계 1위인 츠츠미 요시아키란 사람은 거의 20조에 가까운 자산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고.
“혜성 그룹의 가치가 워낙에 낮게 평가되고 있어서, 아직은 세계적인 부자라고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한테까지 겸손한 척하기는.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구나. 확실히, 혜성 그룹도 그렇고 한국의 기업들은 기업 가치가 낮게 평가되고 있긴 하지.)
“그나마 광풍에 가까울 정도로 주가가 상승한 덕에 혜성 건설의 시가총액이 2천억을 돌파했습니다.”
(아마 내년이 되어도 혜성 그룹의 주가만큼은 계속 오르지 않을까 싶다. 네가 회장으로 있는 한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안 그래도 혜성 전자나, 혜성 반도체 등 주요 계열사의 지분을 매입하고 싶어 안달 난 투자자들이 적지 않았다.
혜성 건설이나 혜성 정유처럼 상장되어 있는 회사밖에 혜성 그룹의 주식을 구할 수 없으니 당연히 주가는 계속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현금이 그렇게 있으니 네 성격대로라면 기업을 인수할 거 같은데, 어떤 기업을 인수할 생각이냐?)
노사의 말처럼 나는 막대한 현금을 토대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 단위의 현금을 얻었는데 부동산에만 투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선 노키아의 통신 사업부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90년대에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1위의 휴대폰 기업이 될 곳이 바로 노키아라는 회사였다.
지금은 파산 위기일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니, 타이어나 고무장화 같은 사업부는 제치고 통신 사업부만 인수한다면 좋을 거 같았다.
(노키아라. 나쁘지 않구나.)
“그리고 해운 회사들도 몇 개 인수할 생각입니다.”
나는 노사의 눈치를 살피며 그 같이 말했다.
여전히 나는 해운업에 대해서는 크게 뜻이 없었지만, 노사 때문에라도 해운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워낙 해운에 집착하는 노사였으니 말이다.
‘뭐 어차피 해운 회사들이라면 통째로 사들여도 얼마 안 하니 상관없지. 내년부터 전성기라 할 정도로 시장 상황이 좋아지기도 할 테고 말이야.’
해운으로는 천억?
많아 봐야 1,500억 정도만 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잘 생각했다. 저평가된 해운 회사들이 많으니, 그것들만 골라 인수해도 재미를 볼 수 있을 거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어디를 인수할 거냐?)
“이전에 말씀드렸듯,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기화 자동차.
나는 자동차에 뜻을 품은 뒤로부터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때야 노사조차도 현실성이 없다고 했었지만, 지금의 나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2조가 넘는 현금을 가졌는데 기화 자동차가 아니라 미래 자동차라고 인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기화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포르쉐 같은 고급 스포츠카 전문 제조 기업들도 인수하고 싶은데 이건 노사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해운에는 기껏해야 천억 정도 쓰면서 자동차에는 조 단위의 현금을 쓴다고 하면 노사가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뭐, 나중에는 결국 말해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기화 자동차냐?)
“예.”
(1997년만 되어도 정부의 돈을 지원받은 채, 값싸게 인수할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나비효과 때문에 역사가 어떻게 바뀔지도 확신할 수 없고 말입니다.”
애초에 기화 자동차가 부도한 상황에서 인수한다면 부채를 갚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기화 자동차 정도 되는 회사가 부도할 정도라면 부채가 조 단위는 된다는 뜻이었으니.
‘미래 자동차가 경쟁자인 이상, 입찰에서 반드시 이기리란 보장도 없지.’
그러니 지금이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적기였다.
작년에 자동차 합리화 조치가 끝난 뒤로 승용차 부문으로 사업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자금 경색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내가 조금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이전처럼 그저 정보를 주는 도움을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물밑 작업으로 기화 자동차 지분을 몰래 인수해 줄 테니, 너는 다른 일을 먼저 진행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인수하겠다니?
노사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이라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지분을 인수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다. 네가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띄지 않겠어? 5%는커녕 3%만 인수해도 세상이 다 알게 될 거다. 혜성이 기화 자동차를 노린다는 사실을. 그러니 내가 대신 움직여주겠다는 거다.)
확실히, 노사가 움직이면 비밀은 확실하게 보장될 것이다.
혜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자본이었으니, 나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노사의 자금력이었다.
“기화 자동차의 주가가 만만치 않은데, 어떻게 지분을 인수하려고 그러십니까?”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억 단위의 현금은 가지고 있다. 나쁜 놈들이 워낙에 기부를 많이 해줘서 말이야.)
“예?”
노사의 말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천억 단위라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기에 그만한 돈을 벌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노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군. 재벌조차도 천억 단위의 현금을 만지지 못하는데, 벌써 그만한 돈을 벌다니 말이야.’
나로서는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누가 귀신 아니랄까 봐, 돈 버는 것도 귀신 같았다.
* * *
“범죄와의 전쟁이라.”
김영산 대통령은 턱 끝을 쓰다듬었다.
한성이 내놓은 해결책은 그에게도 굉장히 의외의 것이었다.
기껏해야 전경련과의 온건한 합의를 제안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총독부를 철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해결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영태 비서실장의 말에 김영산 대통령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본래 내년 3월 1일을 기해 총독부를 철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총독부 철거를 목표로 세웠기에 여론이 어수선해지자 오히려 기회라고 여겼다.
그래서일까?
고영태 비서실장이 총독부 철거를 반대하는 식으로 말하니, 언짢게 느껴졌다.
“총독부는 언젠가 없애긴 해야 하네. 그 흉물스러운 건물을 언제까지 서울의 중심부에 둘 수는 없으니 말이야.”
“…….”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네의 말처럼 범죄자를 때려잡는 것이 더 나을 거 같군.”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총독부 철거는 급한 것이 없는 일이었다.
건물이 어디로 도망치는 것은 아니니, 임기가 끝나기 전에만 철거하면 되는 것이다.
하여 그는 한성이 조언했던 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먼저 치르기로 하였다.
“잘하면 범죄와의 전쟁을 금융실명제와 연계할 수 있겠어.”
“연계라고 하시면?”
“조직 폭력에 연루되면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일세. 이를테면, 은행 계좌 개설을 못 하게 만든다던가,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게 한다던가 말이야.”
“관용이 없다고 비난을 받지 않겠습니까?”
“전쟁에서 관용이 무슨 상관인가.”
“하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요즘 젊은것들 하는 꼬락서니를 보세. 오렌지족이라고 부른다지?”
“예, 오렌지가 귀해서 그런지, 어느샌가 사람들이 그런 단어를 쓰더군요.”
“모든 젊은 친구들이 그런 것은 아니고, 강남 땅 부자의 자식들만 그런 것이겠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이 유흥이나 폭력에 너무 친숙해지고 있네. 조폭을 동경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고 말이야.”
조직 폭력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한다면 조폭을 동경하는 사람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은행 계좌도 만들 수 없는데 누가 조폭을 동경하겠는가.
“확실히 효과가 클 거 같기는 합니다.”
“그나저나 범죄와의 전쟁까지 선포한다면, 내 목숨이 두 개여도 부족하겠어.”
김영산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같이 말했다.
“설마 대통령님의 목숨이 위험할 일이 생기겠습니까?”
고영태 비서실장이 그럴 리가 있겠냐는 식으로 말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었다.
김영산 대통령이 적으로 돌린 사람은 하나같이 기득권 세력이었으니, 그들이 어떤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가 않았다.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로 지하 자본까지 적으로 돌렸네. 여기서 범죄와의 전쟁까지 선포한다면 내 목숨을 노릴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게 돼.”
“경호를 다시 늘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민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 청와대 경호원의 수를 크게 줄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건 실책이었던 듯싶다.
“고민 좀 해봐야겠어. 하하.”
아직 어떤 징후가 발견된 것도 아니니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범죄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때 대비를 해도 충분하리라.
‘저쪽에서 어설픈 시도를 해준다면 오히려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