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범죄와의 전쟁
파이잘 왕자가 혜성 정유의 지분을 인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사 역시도 한성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걸프전 때 역대급으로 유가가 폭락할 텐데,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와 20년 계약을 한다면 앞으로 어떤 변수가 발생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본래 역사에서도 H 오일이 20년 공급 계약을 하여 주가가 폭등한 적이 있었다.
석유는 보통 1년 계약이 일반적이니, 20년 계약을 한다면 그만큼 시장에서 안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맺을지가 관건이겠지만 말이야.’
아람코야 세계 여러 곳에 투자하는 기업이었다.
혜성 정유가 특별해서 투자 대상이 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뜻.
그러니 앞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석유의 공급량도 달라질 것이다.
‘후, 한국에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군.’
미래를 아무리 바꿔도 한국에 없던 자원이 갑자기 뿅 생기는 일은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사우디아라비아나 소련 같은 곳에서 안정적으로 각종 자원을 공급받는 것이 최선일 것이리라.
아니면 통일을 해서 북한의 지하자원을 개발하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노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신 행세를 하던 그지만, 그렇다고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신이 아닌 한, 역사에도 없던 통일 한국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혜성 그룹이 미래의 애플, 구글, 아마존 급의 거대 기업이 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나저나 김영산이가 결국 금융실명제를 하기로 했군.’
지금은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아니라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정보지만, 노사는 알고 있었다.
정부에서 곧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거라는 사실을.
물론 한성에게도 이 정보를 전해준 상태였다.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전부 매도하였으니, 대비는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있을 터.
이제 남은 것은 노사가 이 금융실명제를 어떻게 이용할지였다.
‘눈먼 돈은 줍는 사람이 임자지.’
금융실명제가 갑자기 시작된다면, 지하 자본은 크게 당황할 것이 분명하였다.
아마 일부는 해외로 자금을 옮기려고 들 텐데, 그 과정에서 노사가 노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천억 단위 정도는 챙길 수 있으리라.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해외로 유출된 자본이 조 단위라고 하니, 어쩌면 1조 가까이도 챙길 수 있겠어.’
* * *
1988년 10월 7일.
떠들썩하게 광고했었던 혜성 전자의 HS-88 제품이 마침내 출시되었다.
“가격이 190만 원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싼데?”
“190만 원이 뭐가 싸?”
“다이나택을 보고 이걸 봐봐. 50만 원이나 차이 나잖아.”
가격은 무려 190만 원.
하지만 소비자의 반발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전셋값이었지만, 몇 개월 전에 먼저 출시했던 다이나택과 가격을 비교하면 훨씬 저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모토로라도 가격을 낮춘다는군!”
“혜성폰이 위협적이었나 보지?”
“근데 가격을 낮춰도 200만 원이 넘네.”
“220만 원과 190만 원이라. 30만 원이나 차이가 나는데?”
“다이나택은 외제고 혜성폰은 국산이니 그 정도 가격 차이는 당연한 거 아닌가?”
혜성 전자의 휴대폰 출시에 위협을 느낀 것인지, 모토로라는 자사의 제품 가격을 대대적으로 낮추었다.
240만 원에서 220만 원으로 무려 20만 원이나 가격을 낮춘 것이다.
모토로라 지도부는 이 20만 원으로 여론을 완전히 뒤집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토로라는 세계 1위의 기업이었다.
올해 처음 개발을 시작하고 이제 막 양산 준비를 끝낸 혜성 전자의 제품과 비교하기에는 너무 급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소비자 여론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그래도 나는 이왕 살 거면 혜성폰을 살래. 국산 제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시기에 외제를 사는 것은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야.”
“애국도 애국이지만, 기능부터가 혜성폰이 더 좋다더라.”
“맞아. 다이나택은 잔고장이 많은데, 그게 다 우리나라 지형에 맞지 않아서 그렇데. 하지만 혜성폰은 혜성 그룹에서 만든 제품이니, 통신이 갑자기 먹통이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가격도 저렴한데 성능까지 더 좋다고? 그럼 뭐 선택은 뻔한 거지.”
혜성 그룹은 HS-88을 출시하는 이 날을 위해 엄청난 광고를 하였다.
<순수 우리기술의 순수 우리 휴대폰!>
<우리나라의 제품은 우리나라의 지형에 강하다!>
<고기능에 가격은 저가격으로!>
이 같은 마케팅의 효과가 바로 지금의 소비자 여론이었다.
* * *
은성 그룹에서 휴대폰 사업부를 총괄하는 정원석 사장이 구혁재 회장에게 HS-88을 건네주었다.
“이게 혜성에서 생산한 휴대폰입니까?”
“예, 제품명은 HS-88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작군요.”
구혁재 회장은 HS-88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혜성 그룹의 휴대폰이 잘 나왔다는 이야긴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실물을 보니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작은 데다 뭔가 있어 보이는 외양을 하고 있군.’
자동차를 만들 때도 그랬지만, 혜성 그룹은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었다.
HS-88 역시 외양이 범상치 않았는데, 모토로라의 제품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HS-88이 훨씬 더 세련되어 보였다.
“지금 이 제품의 인기가 상당하다죠?”
“나흘에 걸쳐 1만 대 이상의 제품이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1만 대라. 엄청나군요.”
매출로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없어 보이긴 했다.
고작 200억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시장 점유율로 본다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거의 20%가 넘는 수치였으니 말이다.
‘휴대폰 시장은 앞으로 계속 커지겠지. 만약 혜성이 지금의 점유율을 유지한다면, 휴대폰 사업 하나만으로 조 단위의 매출이 나올 수도 있어.’
물론 적어도 1990년대 중반은 되어야 그 정도 매출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휴대폰이 대중화되기에는 아직 많이 이른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혜성 그룹이 노리는 것은 언제나 세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 단위의 매출이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었다.
“우리 그룹에서 이 정도의 성능을 가진 휴대폰을 개발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적어도 6개월은 주셔야 가능할 거 같습니다.”
구혁재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6개월이라니.
혜성 그룹에서 HS-88을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6개월은 너무 늦었다.
“그렇게 개발이 늦어진다면 우리가 출시할 때쯤, 혜성 그룹에서는 훨씬 성능이 좋은 휴대폰을 출시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앞당겨도 5개월 정도가 최선일 거 같습니다.”
“올해 안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이로군요.”
“그, 그렇습니다.”
정원석 사장의 모습을 보며 구혁재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버지 말이 옳았군.’
그의 아버지, 구자성 명예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혜성 그룹이 먼저 시장을 개척했다면, 혜성 그룹을 추월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2위를 확실하게 지킬 것만 생각하라고 말이다.
구혁재 회장이 생각하기에도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처럼 혜성 그룹을 아등바등 쫓아가 봐야 좋은 꼴은 볼 수 없었다.
그저 모토로라를 넘어서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 현실적이리라.
물론 세계 1위인 모토로라를 넘어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 * *
HS-88, 일명 혜성폰이라 불리는 휴대폰이 성공적으로 출시하자, 나는 휴대폰 사업부를 크게 치하하였다.
기대했던 만큼, 아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벌써 이 정도의 기세라면 모토로라를 누르는 것쯤은 일도 아닐 터.
‘세계 진출을 조금 더 서둘러도 되겠어.’
이왕이면 90년이 되기 전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휴대폰 회사가 되고 싶었다.
물론 90년대 중반부터는 모토로라를 누르고 압도적인 세계 1위의 회사가 되는 게 목표였고 말이다.
‘그나저나 금융실명제를 결국 실시하고 말았군.’
HS-88의 성공적인 출시를 크게 자축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
김영산 대통령이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선포한 이후, 금융 거래를 반드시 실명으로 하도록 하는 법률 즉,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하였고 언론에서는 경제 위기를 매일같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당연히 재계에서도 좋지 않은 반응이 나오는 중이었고.
‘뭐 주가야 검은돈이 주식 시장으로 유입될 테니 다시 오르긴 할 테지만, 민심은 어떨지 모르겠네.’
이미 주가가 내려갔다는 이유 하나로 불만을 터뜨리는 투자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경기가 하락하기라도 한다면, 투자자뿐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의 지지율도 크게 흔들릴 것이다.
-이한성 회장님, 고영태 비서실장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회장님의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고견이라면?”
-요즘 경제 위기와 관련해서 정부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정부에서는 시급히 여론을 진정시킬 만한 해결책을 찾고 있는데,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이한성 회장님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내가 무슨 해결사도 아닌데 이런 부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애초에 이럴 거면 금융실명제를 하지 말던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야당을 생각하면 또 어쩔 수 없이 김영산 대통령을 도와주기는 해야 할 거 같았다.
노태호 대표가 무수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화제를 돌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화제를 돌리자면, 어떤 식으로 돌리는 게 좋겠습니까?
“요즘 범죄 관련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제 가족들도 그렇지만, 치안에 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범죄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이면 어떨 거 같습니까?”
-범죄자라.
고영태 비서실장은 아리송한 목소리를 하였다.
해결책이랍시고 범죄자를 잡아들이라고 하니, 그로서는 황망한 기분일 것이다.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겁니다.”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이란 말에 수화기 너머로 탄성이 전해졌다.
원래,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었다.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이지만, 있어 보이게 ‘전쟁’을 붙이니 뭔가 엄청난 것처럼 느껴졌다.
노사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실제로 범죄와의 전쟁이 여론을 환기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고 하니, 이번에도 효과를 볼 것이 분명하였다.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조폭들만 때려잡아도 민심이 얼마나 좋아지겠습니까? 아마 시장 상인들은 정권이 바뀌고 처음으로 느낄 겁니다. 세상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말입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김영산 대통령에게 강력히 추천하지 않을까 싶었다.
뭐, 김영산 대통령이 어찌 반응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재벌과의 전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나중으로 미룰 수도 있겠지.’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제부터는 나의 손을 떠난 문제라고 봐야 했다.
정치에 정도 이상으로 간섭해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이한성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조언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란 말을 듣는 순간부터 저는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정권의 위기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거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젠가 이 은혜는 갚겠습니다.
은혜를 갚겠다고?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었다.
재벌 개혁을 가장 중요시하는 김영산 대통령이라면 혜성 그룹도 결국 개혁 대상일 뿐일 텐데 말이다.
‘뭐, 5공처럼 다른 기업에 특혜 주고 우리에게만 야박하게 구는 것보다, 차라리 공평하게 때려주는 것이 훨씬 낫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