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드려야지
혜성 건설 때문일까?
예전에는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상당한 규모의 수주도 받고 그랬으니까.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하는 한국 기업이 한둘도 아니고 혜성 그룹에만 관심을 보내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쩌면 우리를 투자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재계 순위가 10위에서 3위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매출이나 자산 규모도 그만큼 올랐다는 뜻이었다.
미국이나 다른 어디를 가도 신생 기업이 아닌 한 우리만큼의 성장세를 보이는 기업은 없으니, 돈 많은 아랍 자본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내도 이상할 게 없긴 했다.
“흠흠, 설령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혜성 그룹에 관심이 있다 해도 내 소개를 받고 만나는 것과 받지 않고 만나는 것이 똑같겠는가?”
“그건 그렇습니다.”
내가 억지로 동조해 주니, 권오중 회장이 헛기침하였다.
그러다 구혁재 회장을 보며 말했다.
“두 사람도 내기해 보는 게 어때?”
“갑자기 또 무슨 내기를 하라는 겁니까?”
“은성 그룹에서 휴대폰 사업을 시작했다며? 혜성에서도 휴대폰 사업을 시작했으니, 시장의 점유율을 가지고 내기를 하는 거지.”
“…….”
구혁재 회장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다니.
역시 유치한 면이 있는 권오중 회장이었다.
“저는 별로 내기에 흥미가 없습니다. 권오중 회장님과 했던 내기도 억지로 했던 거지, 흥미가 있어서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이한성 회장님과 내기를 하고 싶지는 않군요. 질 것이 뻔하니 말입니다.”
나와 구혁재 회장이 그렇게 대답하자, 권오중 회장이 혀를 끌끌 찼다.
“재미없는 사람들이군. 그리고 구 회장, 질 것이 뻔하다는 말을 하다니. 은성 그룹의 회장으로서 너무 자신감 없는 발언이 아닌가?”
“혜성 그룹보다 먼저 휴대폰 개발을 시작했다면 모를까, 이제야 개발을 시작한 입장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네만.”
“그나저나 혜성 그룹도 참 대단합니다. HS-88을 곧 출시한다면서요?”
화제가 HS-88로 넘어오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출시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과분한 기대를 받는 거 같았다.
뭐, 여론의 반응을 보면 그럴 만했지만 말이다.
“예. 양산 준비까지 끝나서 폐막식이 끝난 다음 주에 바로 출시할 예정입니다.”
“모토로라 휴대폰과 비교해도 성능 면에서 크게 밀리지 않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구혁재 회장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얼굴이었다.
휴대폰 개발이 지지부진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제가 대단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연구원들과 직원들이 힘을 써준 거뿐입니다.”
“인재를 뽑고 그 인재를 관리한 것은 이한성 회장님 아니겠습니까?”
“구 회장은 이 회장에게 아부하려고 왔나? 휴대폰 이야기는 그만하고 정부 이야기나 하지. 이 회장은 올림픽이 끝나고 정부가 어떻게 나올 거로 생각하나?”
계속 칭찬을 해서 부담스러웠는데 다행히 권오중 회장이 화제를 전환해 주었다.
“아무래도 김영산 대통령이라면 개혁의 속도를 한층 더 높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늦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인다고?”
“예,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내 말에 권오중 회장이 침음을 흘렸다.
“흐음, 이거 참 곤란하군. 환율 때문에라도 당연히 재벌 개혁을 중단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서 개혁의 속도를 더 높인다니. 전경련에서 말들이 많겠습니다.”
두 사람의 반응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저 추측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두 사람은 반쯤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재벌 개혁을 늦출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이 회장의 생각은 재벌 개혁의 속도를 높인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대비를 해야겠지.”
“…….”
권오중 회장의 답변을 들으며 나는 쓰게 웃었다.
‘앞으로는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아야겠군.’
추측 같은 것도 웬만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거 같았다.
* * *
파이잘 왕자가 생각하는 한국인은 굉장히 근면하면서 부지런한 민족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유가 상승으로 호황을 누릴 때, 한국인 근로자들이 대거 사우디에 파견을 왔었다.
이때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여 어떤 나라, 어떤 기업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빠른 공사 속도를 보여주었다.
파이잘 왕자도 이 시기에 한국이란 나라를 접하게 되었다.
가난하지만, 근면한 민족이 사는 나라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8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코리아에서 자동차와 선박을 수출한다고?’
이전의 한국은 남의 나라에서 건설 물량을 저가에 수주를 받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나라였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나라니, 중공업은커녕 경공업조차 제대로 육성하지 못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제3세계의 국가들만 봐도 신발 하나 만들지 못하는 곳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중 한 곳이었던 한국이, 중공업을 육성하여 자동차와 선박을 세계에 수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반도체와 컴퓨터 같은, 선진국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제품들까지 생산할 정도였다.
파이잘 왕자로서는 이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허어, 정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하였군.’
88 올림픽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파이잘 왕자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선박이나 자동차를 수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하였었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이 쉽게 지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한국을 오니, 한국에 대한 인식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빌딩 숲만 봐도 그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앱설루트도 한국의 것이었다지?’
미국에서 크게 화제가 됐었던 앱설루트.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아들 때문에 그도 앱설루트의 이름을 들어봤었다.
물론 한국제라는 소식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벤츠의 기술력을 빌려 운 좋게 성공했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보니, 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의 저력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평가하게 된 것이다.
‘앱설루트를 만든 게 혜성 그룹이라고 했던가. 이 나라의 발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발전하는 기업이야.’
혜성 그룹.
한국의 다른 기업이 그러하듯,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수주를 받던 건설 기업 중 하나였다.
그런데 80년대 초중반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아니 아랍을 떠나더니 건설이 아닌 다른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였다.
각종 가전제품에 반도체, 그리고 컴퓨터와 자동차까지.
그야말로 생산하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생산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유 사업까지 한다니. 이거 참,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기업이군.’
한국의 석유 화학 사업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일각에서는 한국을 아시아의 핵심 원유 정제 기지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혜성 그룹이 인수했던 쌍호 정유는 그중에서도 기술력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었다.
이러니 파이잘 왕자로서는 혜성 그룹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투자를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회장이란 자가 한국 제일의 부자라지? 그의 마음을 사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써야 할지, 기대되는군.”
정제 기술도 상당한 데다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혜성 그룹.
파이잘 왕자의 생각으로는 투자를 안 하면 손해였다.
* * *
권오중 회장의 소개로 파이잘 왕자와 만났는데,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에게 우호적이었다.
“제 아들이 앱설루트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미국에서 대단히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요?”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유명세를 탔을 뿐입니다.”
“겸손하시군요. 제가 듣기로 약간의 유명세 정도가 아니던데.”
“과찬입니다.”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리 대답하자, 옆에 있던 권오중 회장이 과장하는 태도로 말했다.
“이 친구가 사업의 천재입니다. 천재. 자동차 사업도 제대로 시작한 지 불과 3년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3년 만에 미국 전체가 감탄하는 그런 자동차를 만든 겁니다.”
“호오, 그래요?”
“자동차뿐이 아닙니다. 혜성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역시도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본의 반도체보다도 더 말입니다.”
권오중 회장이 과장되게 그리 말하자, 나는 손사래를 쳤다.
“반도체 1위인 일본보다 인기가 많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입니다.”
“그래도 권오중 회장님께서 이 정도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인기가 상당하긴 한가 보군요.”
“작년부터 조금씩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일본을 넘어설 정도는 아닙니다.”
“저로서는 반도체 1위인 일본과 비교 대상으로 불린다는 것부터가 부러울 따름이에요. 우리 사우디에서는 반도체 하나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데 말이죠.”
파이잘 왕자는 그렇게 자조적인 말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혜성 그룹도 그렇고, 한국에 와서는 정말 감탄뿐인 거 같습니다. 분명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발달한 나라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사우디아라비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게, 한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한성 회장님께서 그리 생각해주시니 정말 영광이군요.”
왕자라서 걱정했는데,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통역가가 잘 통역을 해줘서 그리 느끼는 거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말씀하십시오.”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혹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싶은데 자금이 부족하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
파이잘 왕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자금이 부족하지 않냐고? 나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는 것인가?’
사업가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직설적인 물음이었지만, 그거야 상대가 왕자이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보다 그의 투자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고민이었다.
‘일단 뜸을 들여볼까?’
불쑥 그의 제안을 물기보다는 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었다.
애초에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투자를 함부로 받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파이잘 왕자님께선 제 발언이 같잖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자금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하, 이 친구가 이래 봬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친구입니다. 아마 이 친구의 개인 자금이 웬만한 기업의 사내 보유금보다 많을 겁니다.”
아까는 과장하던 권오중 회장인데, 이번에는 축소해서 이야기했다.
내 개인 자산은 결코 ‘웬만한’ 기업의 사내 유보금 정도가 아닌데 말이다.
‘하긴, 권오중 회장도 내 개인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오히려 일본의 도요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조차도 일부였지만.
“혜성 그룹의 계열사를 살펴보니, 혜성 건설과 혜성 정유, 혜성 자동차 등이 시장에 공개되어 있더군요. 제가 시장 가격에 5배를 쳐줄 테니, 지분을 인수할 수 있을까요?”
권오중 회장이 입을 떡 벌렸다.
5배라니.
강제합병할 때도 이렇게까지 돈을 쓰지 않는데,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정유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했는데, 혜성 정유의 지분을 인수하시겠습니까?”
나는 파이잘 왕자의 제안에 망설이지 않고 그 같이 말했다.
아무리 내가 돈이 많다고 해도 주가의 5배나 비싸게 주고 사준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가 혜성 정유의 대주주가 된다면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거야.’
당장 몇 년 뒤에 걸프전도 벌어질 텐데,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 파이잘 왕자에게 5배의 돈을 받고 지분을 파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