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우리 사이에 정산할 게 남아 있지?
일정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김영산 대통령에게 고영태 비서실장이 희소식을 전하였다.
“오현민 선수가 금메달을 따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금메달리스트가 생겼다는 소식에 김영산 대통령은 쾌재를 불렀다.
“그 친구가 해낼 줄 알았는데, 결국 금메달까지 따버렸군!”
“다른 체급에서 편파 심사 논란이 있었던 것과 달리, KO로 어떤 논란도 없이 깔끔하게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하하하, 그래? 결승에서도 KO라니. 정말 나라의 보배와도 같은 선수야.”
KO로 이긴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해외에 가서도 놀라운 성적을 거두지 않을까 싶었다.
‘새로운 복싱 영웅이 탄생하겠어.’
80년대 중반 이후로 조금씩 시들해지는 복싱의 인기가 다시 치솟을 것이 벌써 눈에 훤히 보였다.
‘그나저나 오현민 선수가 혜성의 지원을 받았다고 했던가?’
생계 때문에 복싱을 접으려던 찰나, 혜성의 후원을 받아 다시 복싱계로 복귀하였던 오현민 선수의 이야기는 언론에서도 크게 화제가 되었었다.
김영산 대통령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작게 감탄하고 말았었다.
혜성에서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현민 선수 말고도 혜성 장학회의 후원을 받는 스포츠 선수들이 하나둘 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며 크게 감탄하였다.
‘사실상 혜성에서만 금메달을 5개 이상 따낸 셈이나 다를 게 없군.’
어떤 기업도 이 정도의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5개는커녕 1개를 따낸 기업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김영산 대통령은 혜성 그룹을 다시금 ‘애국 기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애국심이 아니라면 돈도 안 되는 스포츠에 이만큼 투자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오 선수까지 금메달을 따냈으니, 우리의 금메달 수는 20개인가?”
“금메달 20개, 은메달 23개, 동메달 21개로 4위입니다.”
“4위라. 조금 아쉽긴 해도 이 정도면 자랑스러워해도 되겠어.”
“물론입니다. 외국에서도 한국의 성적에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국이 개최국이라 해도 한국이 높은 성적을 거두리라고 예상한 나라는 얼마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10위 안에 들면 대단하다고 평가했을 터.
그런데 무려 4위, 그것도 5위와 비교하면 금메달 수가 10개나 차이 나는 4위이니, 올림픽에 참전한 나라 모두가 한국의 선전에 놀라워하였다.
“단순히 성적에만 놀라는 거 같지는 않더군.”
김영산 대통령은 입가에 자부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탄하는 얼굴로 서울의 발전상을 이야기하던 스웨덴 국왕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어지지 않았다.
스웨덴 국왕뿐만이 아니라, 중동의 왕족들과 유럽의 왕족들 그리고 각국의 정부 관료들도 한국의 발전상을 보며 크게 감탄하였다.
특히 놀라워하던 것은 동유럽 국가들이었다.
북한의 악의적인 선전에 한국을 최빈국으로만 생각했던 그들은 자국의 수도보다 훨씬 발전해있는 서울의 모습을 보며 경악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대통령님 덕에, 자랑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게 어찌 내 덕인가. 우리 국민들의 덕이지.”
올림픽을 치르는 내내 국민들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경기장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도 자발적으로 정리하였고, 도로에서도 교통법규를 잘 지키며 운전하였다.
덕분에 보름간, 사건·사고가 이례적으로 적게 일어났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좋은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안색을 굳히는 고영태 비서실장의 모습을 보며 김영산 대통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게 걱정인가?”
“폐회식을 하게 되면, 올림픽으로 잠시 묻혔던 경제 관련 이슈들이 다시 수면 위로 터져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김영산 대통령은 쓰게 웃었다.
야당에서도 지적하고 있었지만, 김영산 정권은 올림픽의 수혜를 보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림픽만 아니었으면 언론에서 경제 위기를 들먹이며 온갖 안 좋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재벌의 미움을 샀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언론에서 그렇게 나오며 경제 위기를 들먹였다면, 높았던 지지율도 아마 동력을 잃고 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올림픽으로 인해 지지율은 높아져만 갔으니, 김영산 정권이 올림픽의 수혜를 본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환율을 방어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차라리 이쯤에서 재벌들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재벌 개혁을 멈추라는 뜻인가?”
“경제 위기가 해소될 때까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꼭 지금만이 기회는 아니니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나중을 기약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환율이 떨어지면서 언제 경제 위기가 올지 모르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재벌 개혁을 하다 정말 경기가 하락한다면 지지율이 큰 폭으로 떨어질 게 분명하였다.
“자네는 정말 나중에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나?”
“이제 겨우 1년 차시지 않습니까? 무려 4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재벌 개혁과 관련해서 여당에서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 그나마 1년 차라 이 정도야. 내년에는? 그리고 내후년에는 어떨까?”
“…….”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걸세. 오히려 지금이 개혁의 속도를 높일 때야.”
김영산 대통령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단순히 자신의 레임덕을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재벌들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차기 대통령, 아마 김태중 대통령이 당선될 때쯤이면 재벌들은 정부조차 함부로 건들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권력자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김영산 대통령 역시도 재벌 개혁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재벌들의 힘도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볼 수만도 없으리라.
“금융실명제도 실시할 생각이네.”
“그, 금융실명제도 말입니까?”
“지금처럼 지지율이 높을 때 한 번에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면 5공 범죄자들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1982년에 있었던 장희자 사건 같은 일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 * *
소련은 올봄부터 영사단을 서울에 주재시켜 한국과의 경제 교류를 추진해 오고 있었다.
현재 소련은 한국 자본에 의한 시베리아 개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혜성, 정우, 은성 이렇게 세 개 그룹의 회장들이 만났다.
사실상 소련에 진출할 회사는 이 세 그룹뿐이기 때문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군.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에서 사업을 다 한다니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권오중 회장의 말에, 구자성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혁재 회장이 호응하였다.
“이 회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갑자기 뭘 물으십니까?”
“소련에서의 사업, 어떻게 잘 될 거 같나?”
나는 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모스크바에 최한길 본부장을 보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계시는데, 뭘 그런 걸 묻고 그러십니까.”
세 기업 중 가장 적극적인 것이 정우 그룹이었다.
권오중 회장부터가 올림픽 끝나면 바로 모스크바에 갈 거라고 인터뷰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회장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래.”
“저도 소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시장이 크니 선점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내가 그리 답하자 권오중 회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하하, 역시 이 회장도 나와 같은 생각이군.”
화통하게 웃는 그를 향해 구혁재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한성 회장님과 권오중 회장님께서는 정말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서 제대로 된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련의 인구가 몇이야? 3억이잖아. 3억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3억이라.
과연 3년 뒤에도 3억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된다면 인구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 테니 말이다.
‘뭐 그렇다 해도 큰 시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우리나라의 인구에 몇 배나 되는 큰 시장이었다.
선점만 한다면 매출은 분명 무시 못 할 수준일 것이다.
“저는 솔직히 3억이란 인구보다는 소련이 가진 자원이 매력적입니다.”
“이 회장은 소련의 지하자원을 노리는 건가?”
“예. 소련에 합작 기업을 두어 지하자원을 수입하는 것에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물론 가전제품이나 다른 제품들도 차근차근 진출할 예정이다.
소련의 혼란이 끝날 때쯤 말이다.
‘지금 당장은 지하자원을 저가에 수입하고 연구소를 세워, 실직자가 될 과학자를 끌어들이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지.’
내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할 때, 구혁재 회장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두 분의 생각이 그렇다면, 저희 은성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베리아 개발에 참여하는 게 좋겠군요.”
“그러게. 소련에서 같은 한국 기업끼리 으쌰으쌰 잘해 보자고.”
“하하, 물론입니다.”
화목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권오중 회장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권 회장님. 우리 사이에 정산해야 할 게 하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권오중 회장이 몸을 움찔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천연덕스럽게 반문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정산이라니?”
“그렇게 시치미 떼시면 곤란합니다. 금메달을 누가 더 많이 딸지를 두고 내기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 말하자, 구혁재 회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두 분이 그런 내기를 하셨습니까?”
“저는 딱히 생각이 없었는데, 권오중 회장님이 먼저 내기를 제안하셨습니다.”
“권오중 회장님도 참 딱하십니다. 하필 혜성 그룹을 상대로 그런 내기를 하시다니.”
구혁재 회장이 동정하듯 하는 말에 권오중 회장이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라고 알았겠나? 혜성이 저렇게 금메달을 많이 딸지?”
“이한성 회장님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좋으신지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혜성 팰리스만 봐도 야구의 천재들만 모였지 않습니까.”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나는 스포츠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혜성 장학회를 운영하는 일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혜성 장학회에서 후원하는 인재들은 하나같이 남다른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사실 나보다는 어머니에게 인재를 보는 눈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내기에는 무엇을 거셨습니까?”
“나는 잠실의 빌딩을 얻기로 했고, 이 친구는 중동 왕자를 소개받기로 했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파이잘 왕자를 말이야.”
“파이잘 왕자라. 이거 참, 이한성 회장님이 내기에서 이기셔서 다행이지, 지셨으면 크게 손해를 볼 뻔하셨군요.”
“그게 뭔 소리야?”
권오중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역시 구혁재 회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제가 손해 보는 내기였다는 말씀입니까?”
“이 회장! 그럴 리가 있겠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파이잘 왕자야. 파이잘 왕자쯤 되는 고위인사와 인맥을 얻는 게 쉬울 리가 없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구혁재 회장님이 저리 말씀하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구 회장,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설명하게. 방금 한 말이 무슨 의미야?”
권오중 회장이 따지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구혁재 회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가 알기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혜성 그룹에 관심이 상당하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저희 그룹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 제가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아마 권오중 회장님의 소개가 없더라도, 파이잘 왕자가 이한성 회장님께 먼저 접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혁재 회장의 추측에 나는 놀랐다.
어지간한 확신이 없다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터.
일성이 반으로 쪼개진 이후, 사실상 한국에서 제일가는 정보력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한 은성 그룹이니, 어떤 정보를 듣고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니. 흥미로운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