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아예 사형까지 가야지
‘꼴 좋군.’
전대환이 강제 연행되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을 할 때 얼마나 같잖게 느껴졌던가.
마침내 그가 가야 할 곳을 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 형을 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자금은 전부 환수할 수 있겠지?’
만약 노태호 정권이 들어섰다면, 5년이란 시간 동안 비자금을 철저하게 숨겨놔서 되찾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영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자금을 숨길 시간이 부족했을 테니, 대부분의 비자금은 국고로 환수될 거 같았다.
‘아예 사형까지 갔으면 좋겠군.’
3천억에 해당하는 비자금이 국고로 환수되는 것만으로도 전대환에겐 끔찍한 형벌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IMF든, 아니면 정권이 바뀌든, 무슨 변수가 생긴다면 국론 통합을 명분으로 원 역사처럼 전대환을 사면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이왕이면 김영산 정권 때, 확실하게 역사에서 퇴장시켰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사형이었다.
‘전대환이 사형에 처하면, 노사께서도 만족하시려나?’
원 역사에서 혜성 그룹을 무너뜨린 게 바로 전대환이었다.
이한철 명예회장도 사실상 전대환에 의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노사의 분노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부족할 수도 있겠군. 노태호 대표라던가, 아직 5공의 인물 중 일부는 멀쩡히 권세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야.’
전대환만으로는 부족하였다.
혜성 그룹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썼던 모든 이들이 몰락해야 노사도 만족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들이 멀쩡히 권세를 유지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김영산 대통령이나 김태중 국무총리나 참 대단하군.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하나회까지 척결해버리다니. 어쩌면 노태호 대표만큼은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될 거 같단 말이지.’
과오가 많은 대통령이지만, 노사의 평가대로 그 결단력 하나는 인정할 만한 거 같았다.
아마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노태호 대표도 무사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지금이야 정치적 보복이니, 야당 탄압이니 그런 말들을 의식해서 노태호 대표에 대한 수사는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거 같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전대환에게 그랬듯 거침없이 체포 명령을 내릴 것이리라.
* * *
“아버님이 큰 고초를 겪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유지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전대환이 체포되었지만 5공 청문회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청문회를 향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더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역시 총선 때 힘을 쓰길 잘했어.’
5공 청문회를 주관하는 국회의원 일부는 사실상 혜성맨이나 다를 게 없었다.
나의 도움을 받아 총선에서 승리하였으니 그런 것인데, 당연히 그들은 증인으로 참석한 이한철 명예 회장에게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그 결과 이한철 명예 회장은 다른 재벌 총수들과 달리 어떤 고초도 겪지 않았다.
고초를 겪기는커녕 동정 여론이 만들어지며 혜성 그룹의 이미지가 더 좋아졌을 정도다.
‘우리는 특혜를 받은 것이 없으니 그럴 만하지.’
특혜는커녕 오히려 박해를 받았었다.
그런데도 재계 10위에서 재계 3위까지 승승장구했으니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다른 분들은 앞으로가 고생일 거 같군요.”
“다른 분들이요?”
“권오중 회장님이나, 구자성 회장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나와 사이가 좋았던 재벌 총수들이라고 5공 청문회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정우 그룹의 경우 5공의 특혜를 받은 기업 중의 하나여서, 권오중 회장은 의원들에게 날카로운 추궁을 받고는 했다.
아마 5공 청문회가 끝나면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래봤자 신진호 회장이 겪는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권오중 회장은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켜가며 특혜를 받았었다.
하지만 샤롯 그룹과 쌍호 그룹은 최소한의 선도 없이 특혜를 받았는데, 돈으로 따지면 수천억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특혜를 받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었다.
신진호 회장의 경우는 5공 청문회가 끝나더라도 한동안 계속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올해 말, 아니 어쩌면 내년까지도 말이다.
‘아예 징역을 살았으면 좋겠군.’
전경련에서 재벌 총수들이 징역을 사는 것은 최대한 막고 있지만, 김영산 대통령의 의지를 생각하면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로서는 잘못했으면 같은 재벌 총수여도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그게 신진호 회장이나 김종우 회장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미래 그룹의 왕주형 회장님도 이번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신다는데, 맞나요?”
“예, 나이도 있고 해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난다고 하시더군요.”
재계 1위인 미래 그룹이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왕주형 회장의 경우, 너무도 솔직한 발언들을 했기에 야당의 미움을 산 상태였다.
고령이기도 하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은 왕주형 회장으로서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구자성 회장도 명예회장으로 추대받았다는데, 창업주나 1세대 경영인들은 대부분 물러나게 되겠군.’
곧 2세 경영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혜성 그룹은 2세 경영을 가장 먼저 시작한 만큼, 가장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증여세나 상속세 같은 세금 문제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고.
“그나저나 태한이가 다닐 유치원은 정하셨습니까?”
나는 화제를 돌릴 겸, 태한이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참고로 태한이는 내년부터 유치원에 다니기로 하였다.
내년이면 세 살이고 워낙 영특하니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 근처에 좋은 유치원이 많더라고요. 특히 영재 교육을 잘하는 유치원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보낼까 생각 중이에요.”
“그렇습니까?”
“근데 한 가지 걱정인 게, 잠실도 그렇고 워낙에 세상이 흉흉해서 태한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렵네요.”
그녀의 걱정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래에는 달라지겠지만, 유지은이 걱정하는 것처럼 지금의 한국 치안은 썩 좋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마약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인신매매나 강간도 숱하게 벌어졌다.
특히 조직폭력배에 의한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편이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김영산 대통령에게 치안 문제 좀 해결해달라고 부탁해야겠군.’
김영산 대통령이 이왕이면 재벌과의 전쟁보다는 범죄와의 전쟁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청문회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혜성 그룹의 일도 아닌데 언제까지 청문회에 신경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청난 이벤트가 예정된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달이 안 남았군요.”
“올림픽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올림픽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다음 달이면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될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몇 위를 예상하십니까?”
“글쎄요.”
진봉현 비서실장의 기대 섞인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기대하는 예측력은 더 보여줄 수 없었다.
나비효과로 미래의 일은 나도 모르게 되었으니까.
“준비를 잘했으니, 성적도 어련히 잘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인들에게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점점 애국자가 되는 거 같았다.
늘 일본과 비교되며 무시당하는 처지여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국격이 조금이라도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잠실 하나만큼은 외국인들의 반응을 기대할 만합니다.”
“하긴, 잠실의 발전이 빠르긴 하죠.”
“빠른 정도가 아닌 거 같습니다. 사옥 근처만 해도 거의 한 달에 한 채씩 빌딩이 세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뭐 그렇죠.”
“저희 사옥도 그렇고, 백화점이나 호텔도 외관이 잘 꾸며졌으니, 외국인들이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깜짝 놀라는 김에 우리 혜성의 이름이 각인되었으면 좋겠군요.”
내 목적이 그거였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혜성의 이름을 알리는 것.
아직 혜성 그룹은, 자동차 말고는 외국에선 거의 인지도가 없다시피 하니 이런 국가적 이벤트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선수촌 근처에만 해도 혜성 편의점에 혜성 백화점에 혜성 호텔 등, 혜성의 이름을 단 건물들이 수두룩하게 깔려 있으니 혜성의 이름은 확실하게 각인될 거 같습니다. 선수촌의 가전제품도 혜성의 것이고 말입니다.”
“비서실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들도 혜성 그룹을 주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뭐 겨우 올림픽 하나로 그렇게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나저나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에 꽤 대단한 사람들이 참석할 거 같군요.”
“각국의 고위인사 말고도 유럽과 중동의 왕족들도 많이 참여한다고 들었습니다. 스웨덴의 국왕 부처부터 영국의 앤 공주와 룩셈부르크 대공, 그리고 사우디의 파이잘 왕자까지. 공산주의 진영의 인사들도 대거 참석하니 꽤 요란한 개회식과 폐회식이 될 거 같습니다.”
나는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일본의 총리까지 개회식에 참석한다고 들었으니,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인 것은 확실한 듯싶었다.
“단순히 혜성의 이름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각국의 인맥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유럽과 중동의 왕족들을 만나 보겠는가.
특히나 중동의 왕족 쪽은 정유 사업 하는 입장에서 꼭 만나보고 싶었다.
중동 왕족과 인맥이 생긴다면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앱설루트나 휴대폰 등을 잘 홍보한다면 그들이 먼저 혜성 그룹에 관심을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각국의 주요 인사들은 혜성 호텔에 묵을 가능성이 크니, 인맥을 얻을 기회는 생길 거 같았다.
* * *
한창 청문회에 시달리던 권오중 회장이 혜성 그룹의 사옥을 방문하였다.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하도 자주 와서 그런지 내 집에 오는 것처럼 편안했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후우, 참 그룹을 경영하는 게 쉽지 않아.”
“청문회 때문에 그러십니까?”
“뭐 그것도 있고, 여당 의원들이 워낙에 난리를 피우지 않았나?”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잘못도 있으니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 근데 조금 억울한 건 사실이야. 왕 회장, 그 양반이 한 말처럼 우리는 시류에 따라 산 거밖에 죄가 없는데.”
권오중 회장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나는 말 없이 커피만 마셨다.
불가항력이었다고 하나, 그렇다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뇌물을 건네고 특혜를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물론 이 회장이나 세계 그룹의 양 회장님처럼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저항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
“우리 그룹에서는,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나오네. 대선 때 김영산 대통령을 지지한 게 실수였다고.”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권오중 회장이 김영산 대통령을 지지한 것은 나 때문이었다.
지금 권오중 회장이 고초를 겪는 것도 어찌 보면 나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뜻.
그래서인지 뭔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