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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89화 (189/300)

189화 나에게도 원수야

(그나저나 청문회가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 다른 것도 미리 대비하는 게 좋겠다.)

노사의 말처럼, 역사가 많이 바뀌었다.

원래라면 5공 청문회는 11월부터 진행이 된다고 했는데, 나비효과로 다음 주부터 5공 청문회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다른 거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가 상승이 1989년이 아니라, 올해 멈출 수도 있고, 아니면 금융실명제가 갑자기 실시될 수도 있지 않겠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가야 노사의 말처럼 어떻게 튈지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안 그래도 원화 절상으로 경기 하락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과연 김영산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습니까?”

원화는 꾸준하게 절상하고 있었다.

8백 원이 뚫린 지도 벌써 한 달째.

언론에서는 곧 750원이 될 것이고, 만약 원화가 750원까지 절상한다면 한국 경제가 폭삭 무너질 것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상황이었다.

내가 만약 김영산 대통령이었다면, 이 같은 상황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김영산 같은 인물이 상식의 선을 지킬 거라고 확신하지 마라. 원 역사도 내가 가르쳐줬잖아?)

“틀린 말은 아니군요.”

하기야, 노사가 가르쳐준 원 역사의 김영산은 확실히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단일화 실패나 IMF 같은 과오가 있기는 했으나,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준비했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는 그 결단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위인이라 칭할 인물은 절대 아니었지만.

‘주식을 지금부터 정리해야겠어.’

일본 부동산에 대부분의 자산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국내에도 상당한 자금이 남아있었다.

만약에 노사의 말처럼 주가 상승이 멈추거나 금융실명제가 실시된다면 투자 손실이 클 것이니 지금부터 정리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그리고 전대환에 대해서도 내가 한 말 잊지 마라.)

나는 피식 웃었다.

노사의 뒤끝은 역시 대단한 거 같았다.

“잊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대환은 나에게도 원수였다.

굳이 노사가 말하지 않았어도 전대환이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 * *

대선에 변수가 생기면서 노태호가 아닌, 김영산이 대통령에 올랐을 때, 전대환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었다.

그가 한 고민은 어떤 수단을 써서 선거 결과를 뒤집을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 미국의 경고를 받았다.

허튼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살벌한 경고였다.

결국 전대환은 평화롭게 대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전대환이 아무런 대책 없이 정권을 넘겨주지는 않았다.

빠르게 비자금을 세탁하고 사법부와 긴밀한 끈을 만드는 식으로 대책을 마련하였다.

‘올림픽이 코앞인데, 지금 시점에 청문회를 연다고? 오히려 좋다.’

대비책이 갖추어진 상태여서 그런지, 전대환은 청문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려 기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열릴 청문회였다.

그에게는 시기가 문제였는데, 7월에 열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잠깐만 버티면 국민들의 관심이 올림픽으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 아깝긴 해도, 해일재단의 비자금 일부는 기부하는 게 좋겠어.’

해일재단은 전대환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재단 중 하나였다.

주로 전경련을 비롯한 재벌들에게 뇌물을 받았는데, 청문회가 열리면 재벌들이 증인으로 참석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정리해놓는 것이 좋았다.

전부를 기부할 필요도 없었다.

정부에서 소재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30억에서 40억 정도의 자금만 기부하면 그걸로 충분하였다.

‘여당 놈들도 내가 이 정도로 나서준다면 더 강하게 압박할 수 없겠지. 그랬다간, 내가 쥐고 있는 정보들을 풀 수도 있으니 말이야.’

여당이라고 깨끗한 정치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새처럼 이리 붙고 저리 붙어서 여당 의원이 된 정치인도 적지 않았고, 운동권 출신의 의원들도 알게 모르게 비리들을 저질렀다.

이들은 자신의 2선, 3선을 위해서라도 전대환을 압박하는 일에 소극적으로 나올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다가 전대환이 30억 정도의 거액을 기부하는 액션까지 취해준다면 그것을 명분으로 감면을 요구할 것이고 말이다.

7월 23일.

마침내 5공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전대환이 예상했던 것처럼 첫 조사대상은 해일재단이었다.

“돈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줬습니다.”

“나는 시류에 따라 삽니다.”

왕주형 회장은 국회의원들의 추궁에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5공 정권에 기부 명목으로 뇌물을 바쳤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웅성웅성.

너무 쉽게 국회의원들이 바라는 대답을 해준 왕주형 회장의 모습에 청문회장이 웅성거렸다.

‘쯧. 내가 힘이 없어졌다고 바로 저따위 짓을 해버리다니.’

TV를 통해 청문회를 지켜보던 전대환은 혀를 찼다.

미리 경고했음에도 왕주형 회장은 전혀 들어먹지 않았다.

왕주형 회장이 저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전대환의 권력이 그만큼 퇴조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언젠가 이날을 후회하게 해주리라.’

전대환은 이를 악물며 다짐하였다.

지금 당장이야 권력을 잃었어도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전경련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하며 정부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재벌들이 야당의 편을 들면 언론도 그에 합세할 것이니, 정권이 바뀌는 것도 충분히 기대해도 될 거 같았다.

‘물론 가장 후회하게 해줄 놈은 이한성 회장, 바로 그놈이지.’

낙관적으로 예상했던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가 김영산, 김태중 두 후보가 단일화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후보가 단일화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가 바로 한성이었다.

전대환으로선 한성에게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불손하게 느껴지던 놈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쯤 제대로 손을 봐줄 걸 그랬군.’

뭔가 항상 운이 좋았다.

혜성을 압박하려 할 때면,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생겨서 제대로 손 보지를 못 했었다.

하지만 전대환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직 기회는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저는 결단코, 재벌 회장들에게 기금 출연을 강요한 사실이 없습니다. 물론 출연한 기업에 특혜를 준 적 또한 없습니다!”

왕주형 회장이나 한성을 응징하려면 일단 위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하여 전대환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극동제강 측이 기부한 42억 중 26억 원의 행방이 묘연한데, 이 돈을 착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재단의 회계는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조사가 시작되었으니, 결과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장인인 이기동 씨가 고속도로 시멘트 시공의 이권 개입을 비롯한 온갖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사 결과를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박형진 의원이 전대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3백억 이상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답변해 주십시오!”

“근거 없는 소리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사용한 통치 자금만 100억이 넘는데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기자들의 추궁은 끝이 없었다.

퇴임 후 처음으로 하는 기자회견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전대환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제 가족의 재산은 연희동 집 안채와 두 아들이 결혼해서 사는 바깥채, 서초동 땅 2백 평뿐입니다! 금융 자산은 모두 합해서 32억 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32억 원을 전부 기부하고 오늘부로 사회에서 은퇴하겠습니다.”

전대환의 말에 기자회견장 분위기는 숙연하게 바뀌었다.

무려 대통령, 그것도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었으니, 기자회견장의 분위기가 바뀐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32억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데?”

“이 기자는 저 말을 믿어?”

“저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데 못 믿을 건 없잖아.”

“지금까지 밝혀진 비자금만 얼만데 32억이야. 믿을 걸 믿어야지.”

“통치 자금으로 썼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32억을 모두 기부하고 은퇴한다잖아. 돈이 얼마나 있든, 이 정도 성의라면 용서 못 해줄 것도 없지.”

“이 기자가 뭔데 용서하고 말고를 결정해? 광주 시민들이 저 양반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몰라서 그래?”

“그건 그렇긴 한데, 저 양반도 나이가 있고, 은퇴한다고까지 하니 불쌍하잖아.”

기자들은 작은 목소리로 그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한마음 한뜻으로 분노하였던 기자들이 가식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전대환의 모습을 보며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제법 잘 통한 거 같군.’

전대환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장 공격적이어야 할 기자들의 반응이 저렇다면, 그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충격적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32억은 전부 거짓말인가?>

<비자금이 3백억? 전대환 전 대통령의 차명 계좌가 밝혀지다!>

<박형진 의원, 3백억은 빙산에 일각이라며, 최소 천억 이상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 제기!>

마치 그가 기자회견 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다음 날이 되기 무섭게 그의 비리 의혹들이 세간에 드러났다.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한 보도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전대환 전 대통령의 딸 전선호, 비자금을 용돈처럼 받아 썼다. 밝혀진 ‘용돈’만 23억!>

<이옥순 전 영부인, 30억 원 상당의 관양돈 산 127번지 임야를 소유!>

아들, 딸 그리고 아내와 장인어른, 처남 등등.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족들에게도 전 방위적인 공격이 들어왔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전대환은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게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었건만, 자신에 대한 비리들이 왜 하필 지금 시점에 터져 나온단 말인가.

‘심지어 구체적이기까지 하잖아!’

단순히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몇 가지 비리에 대해서는 아예 계좌 정보나 등기부등본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누가 배신을 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았다.

권력이 절정이던 시절에 은닉하였던 재산까지 폭로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배신자를 찾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여론이 완전히 넘어가게 돼서는 안 된다!’

안 그래도 그의 저택 앞에서 매일같이 시위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국민 절반 이상이 그의 체포를 고대하고 있는 상황.

여론이 더 악화한다면 김영산 대통령도 더는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반발을 무릅써서라도 그를 체포하려고 들 터.

“노 대표. 나, 전대환일세.”

야당의 대표인 노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 의형제나 다를 게 없는 노태호 대표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각하, 안 그래도 전화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하루빨리 백담사로 피신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나보고 백담사로 도망치라고?”

-제가 백방으로 각하를 지키려 하였지만, 도저히 방도가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백담사로 피신하는 것이 각하께서 살아날 유일한 방도입니다.

전대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노태호 대표만은 그를 지켜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릴 줄은 몰랐다.

“내가 죽으면 다음 차례는 노 대표야.”

-압니다. 그러니 백담사로 가십시오. 가셔야 저도 살고 각하도 삽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전대환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전화기를 책상 위로 내리쳤다.

콰직!

“이 나라의 지존이었던 내가 유배를 당해야 한다니!”

전화기를 부수고도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32억을 기부하기까지 했는데 유배당하는 처지가 되니 억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목숨은 누구보다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노태호 대표의 조언처럼, 지금 살아날 방법은 오직 하나.

절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딱 한 달. 한 달만 버티면 올림픽이다. 올림픽 때문에 개돼지들이 조용해지는 날,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야!’

전대환은 그런 생각을 가지며 백담사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전대환에 대한 여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온갖 의혹들이 폭로되며, 오히려 그의 여론은 더욱더 악화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김영산 대통령이 체포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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