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휴대폰의 성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다
압구정동에 거주하는 이정은 해외 유학파 출신이었다.
강남 땅 부자인 부모를 두고 있어서 비싼 돈 내고 유학 갔다 왔는데, 사실 그는 공부보단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오늘도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외출한 참이었다.
“이놈들 언제 오는 거야?”
약속 시각이 되었는데도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끼던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라는 얼마나 구닥다리면 휴대폰을 구하기도 힘드냐!’
캘리포니아에서는 모토로라의 휴대폰을 잘만 이용했었다.
아는 형이랑 같이 구매한 거라 귀국할 때는 놓고 오긴 했었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자 휴대폰이 그립게만 느껴졌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네.’
다행히 친구들은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약속 장소에 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휴대폰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 몇 번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없었으면 모를까, 있다가 없으니 더더욱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희소식이 들려왔다.
모토로라에서 마침내 한국에 휴대폰을 출시한다는 소식이었다.
“이거지! 내가 이것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정은 망설이지 않고 다이나택을 구매하였다.
240만 원.
비싼 돈이었지만, 부모가 강남 땅 부자인 그는 한 달에 받는 용돈만 2백만 원이 넘었다.
생일이나 이런저런 경조사에 받는 돈을 다 포함하면 1년에 3천만 원 이상 용돈을 받는 그였으니 240만 원쯤은 아깝지 않았다.
애초에 돈이 떨어지면 다시 용돈을 받으면 되기도 했고 말이다.
‘흐흐, 이거 보면 애들, 깜짝 놀라겠지?’
외제차 자랑도 실컷 했으니 이제는 신문물을 자랑할 때였다.
그는 유학 가기 전에 잠시 다녔던 대학교의 동기들을 불렀다.
“와, 이게 뭐야?”
“카폰이랑 비슷한데, 이것도 전화기 아닌가?”
“나 이거 신문에서 본 거 같아. 이거 웬만한 자동차보다 비쌀걸?”
역시나 휴대폰을 본 그의 동기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크게 감탄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휴대폰이란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 2백 얼마였던데, 너희들도 하나씩 구매해라. 이거 나 혼자 쓰니까, 별로 재미가 없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가격을 듣고 그의 동기들은 더더욱 경악하였다.
“헐, 2백이 넘는다고?”
“미쳤다, 진짜.”
“이걸 어떻게 사냐? 전셋집 구할 돈도 없는데.”
동기들은 대부분 중산층의 자녀였지만 그래봤자 한 달 용돈으로 20만 원 받으면 많이 받는 거였다.
이제 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 초년생이 되었으니, 돈 쓰는 것을 더욱 주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흐흐, 내가 이런 반응을 원했다고.’
동기들의 반응에 이정은 우월감을 느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사실 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뭐, 군 문제도 빠질 수 없는 이유였지만 말이다.
대학교 동기들에게 휴대폰을 자랑한 이정은 다른 모임에서도 똑같이 자랑하였다.
이번에는 그의 고교 동창들이었는데, 여기서는 다른 반응이 나왔다.
“굳이 모토로라 것을 살 필요가 있었나?”
“그러게. 이거 완전히 벽돌이나 다름없는데.”
“다이나택 들고 다니다 보면, 너는 운동을 따로 안 해도 되겠다. 푸하하!”
예상과 달랐던 동창들의 반응에 이정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동창들이 그와 같은 강남 땅 부자의 자녀들이긴 했다.
240만 원 정도는 그들에게도 그리 비싼 가격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외 유학 한 번 가 본 적이 없는 국내파들이니, 휴대폰 같은 신문물을 경험하지 못했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들은 다이나택을 구매한 이정을 부러워하기는커녕 동정하거나 오히려 비웃었다.
“너희들, 모토로라가 어딘지 몰라? 여기가 휴대폰에서는 세계 1위잖아.”
“1위면 뭐해. 벽돌인데.”
“맞아, 그거 들면 폼이 안 난다고.”
“애초에 들고 다닐 수가 없다니까? 1㎏에 가까운 걸 누가 들고 다녀. 나는 고등학교 때 책도 거의 안 들고 다녔었는데.”
이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역시 다이나택의 외관이 썩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다이나택이 무시당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이미 비싼 돈을 주고 다이나택을 구매한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너희들이 휴대폰을 안 써봐서 그러는가 본데, 이거 써보면 말이 달라져. 어디서든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니까?”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건 아닐걸? 혜성 광고 못 봤어? 외국 제품은 우리나라 지형에 맞지 않아서 통화가 잘 안 된다잖아.”
“맞아. 실제로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전화 안 통할 때가 더 많다던데?”
갑자기 혜성 이야기가 나오자 이정은 눈을 끔뻑였다.
“혜성 광고? 그게 뭔데?”
“11월에 혜성폰이 출시되잖아. 출시 예고하면서 혜성폰은 한국 지형에 강하다고 홍보하더라고.”
“혜성에서 휴대폰을 출시한다고?”
“어, 몰랐냐?”
“전혀 몰랐어.”
신문이나 TV 광고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혜성폰이라. 하필 혜성에서 휴대폰을 출시할 줄이야.’
만약 다른 기업에서 휴대폰을 출시한다고 했다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유학파 출신으로서 서구 문화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그에게 한국산이란 싸구려처럼 느껴졌다.
재계 1위라는 미래 그룹의 제품들조차 미국에서 별로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니 그가 이런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혜성은?
‘앱설루트를 사고 싶어도 못 샀었는데.’
비싸서 못 산 것이 아니라, 수량이 없어서 못 샀다.
그만큼 인기가 많았었는데, 이정은 그때 처음으로 한국인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한국산이 프리미엄 브랜드로 이렇게 인기를 끈 적은 이번이 처음이니 서구 문화에 집착하는 그로서도 자부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기업은 몰라도 혜성 그룹만큼은 인정하였다.
혜성의 제품이라면 미국산에 비해도 꿀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제 처음 개발해서 생산하는 휴대폰이 세계 1위의 휴대폰과 같겠냐? 세계 1위의 휴대폰이 훨씬 더 낫지.”
하지만 이정은 애써 그런 말을 하며 자기합리화하였다.
비싼 돈을 주고 호구 짓을 했다고 인정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동창들이 반발하였다.
“그렇게 따지면 혜성이 처음 개발하지 않은 게 뭐가 있냐. 자동차도 처음 개발했는데 저렇게 미국에서도 열광하잖아?”
“나는 다른 거 때문이 아니라, 가벼워서 혜성폰을 사려는 거야. 무게 차이가 엄청나다던데, 어쩌면 혜성폰은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을걸?”
동창들의 말에 이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갑자기 모토로라 휴대폰을 산 것이 후회되었다.
* * *
모토로라의 한국법인인 모토로라 반도체 통신, 박희준 대표가 휴대전화 사업부의 김한규 상무에게 화를 내듯 말했다.
“김 상무, 어떻게 된 겁니까. 출시하자마자, 히트를 할 거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했으면서 지금 이게 뭐예요?”
“죄송합니다.”
김한규 상무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였다.
세계 1위의 휴대폰 기업이 모토로라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1위로서의 자존심에 먹칠했으니 김한규 상무로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사과를 들으려고 이러는 거 같아요? 원인이 뭐냐고 묻는 거지 않습니까! 이렇게 판매량이 저조한 원인을!”
“아무래도 혜성 전자의 광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혜성? 아직 출시도 안 한 혜성 전자의 광고 때문에 판매량이 저조하다는 말입니까?”
박희준 대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혜성 전자는 단지 출시 광고만 했을 뿐인데, 벌써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만약에 사전 예약이란 것을 했다면 벌써 몇만 대는 예약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혜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혜성의 브랜드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요. 아는데, 그래도 아직 출시조차 안 한 제품이 그리도 인기를 끈다는 말입니까?”
“순수 우리 기술의 순수 우리 휴대폰이라고 떠들썩하게 홍보하고 있는 혜성 전자입니다. 저희 모토로라 제품을 사면 마치 매국노라도 되는 양 몰고 있어서 판매에 지장이 생기고 있습니다.”
“쯧! 제품으로 승부를 볼 것이지, 혜성은 항상 마케팅 쪽으로만 재미를 보려고 하는군요.”
“그런데 제품의 성능 자체도 무시할 게 못 되는 거 같습니다. 무게는 우리보다 훨씬 가볍고, 사용 시간도 크게 밀리지 않습니다.”
“아니, 혜성에서 휴대폰을 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박희준 대표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반도체의 전문가이지, 휴대폰의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다이나택과 HS-88의 차이점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성능만큼은 당연히 모토로라에서 압도할 줄 알았다.
세계 1위의 제품인데, 이제 막 개발이 끝난 한국산 휴대폰보다는 성능이 좋은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김한규 상무는 단호하게 말했다.
두 휴대폰의 성능 차이는 거의 없다고.
오히려 무게나 외양을 생각하면 HS-88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혜성에 괴물들이 있다더니, 그게 진짜인 거 같군요.”
“일단 회장인 이한성 회장부터가 괴물인 거 같습니다.”
김한규 상무의 말에 박희준 대표는 쓴웃음을 지었다.
‘혜성 그룹에서 영입 제안을 했을 때, 그냥 혜성 그룹으로 갈 걸 그랬나?’
그는 과거에 혜성 전자에서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혜성 그룹이 재계 8위 정도에 불과해서 제안을 거절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결정이 실수였던 거 같았다.
‘쯧, 그래도 모토로라 임원이 될 기회를 얻었는데, 후회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김한규 상무에게 물었다.
“우리는 모토로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세계 1위인 우리가 국내의 기업에 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점유율을 압도할 방법을 말해 보세요.”
“아무래도 가격을 내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거 같습니다.”
“가격을 내린다라.”
별로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240만 원은 원가를 생각해도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었고 말이다.
“흠, 좋습니다. 그러면 혜성폰이 출시될 때를 맞춰서 가격을 대대적으로 낮추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혜성 전자에서도 휴대폰 개발에 투자한 자금을 만회하려면 HS-88를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밖에 없을 터.
세계 1위 회사로서 자존심이 상했지만,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를 본다면 HS-88을 압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 *
(광고를 아주 떠들썩하게 했구나.)
노사는 한눈에 봐도 흡족하게 느껴지는 얼굴로 그 같이 말했다.
“노사께 배운 대로 해봤습니다.”
(잘했다. 일단 국내에서의 성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겠어.)
“두고 봐야 아는 일 아니겠습니까.”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는 모토로라의 인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은 안심할 단계라고 볼 수는 없으리라.
(너도 확신하고 있으면서 겸손한 척하기는. 해외 출시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국내 출시도 안 했는데 해외 출시를 물어보다니.
노사도 어지간히 HS-88의 성공을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내년이나 내후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쁘지 않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노사가 불쑥 물었다.
(사업이야 잘되고 있으니, 알아서 하면 될 거 같고, 정치는 어떻게 할 거냐?)
“일단 청문회를 대비하고 있기는 합니다. 절대 아버지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 아버지의 잘못도 크지 않은 데다 네가 여당이나 정부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으니, 아버지에게 피해 가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야.)
맞는 말이었다.
샤롯 그룹, 고림 그룹, 쌍호 그룹 등등.
5공의 특혜를 받아 자산 규모를 몇 배로 불린 기업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 기업들을 놔두고 우리 기업을 공격한다면 일단 나부터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하는 의원이 있다면 그 의원의 임기는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