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은성이 뭐라고
“어쨌든, 수고 많았다. 이렇게 빨리 성과를 낼 줄 몰랐는데 말이야.”
“회장님께서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나도 알고 있어. 거의 모든 부서에서 시기를 받았다지?”
내 말에 김동윤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에 김동윤의 담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쉽게 버틸 수 없었을 터.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동윤을 높게 평가하였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의지 역시 남다르니, 앞으로 더 중대한 일을 맡겨도 될 거 같았다.
“이제는 누구도 너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누가 너를 욕한다면 당당하게 맞서 싸워도 좋아.”
나는 김동윤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러자 김동윤이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직원들에게도 수고했다고 전해.”
“예, 꼭 전하겠습니다.”
“그냥 수고했다고만 하면 부족하겠지. 성과급도 지급될 거야. 월급의 300%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혜성 그룹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고소득자였다.
휴대폰 사업부 직원들의 경우 한 달 월급이 거의 100만 원에 가까울 정도였다.
월급의 300%에 해당하는 성과급이라면, 중소기업 종업원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니 결코 작다고 볼 수 없었다.
“추, 충분합니다.”
“내가 말한 300%는 어디까지나 개발 성과급이고 양산이 시작된다면 추가로 성과급을 지급할 테니까, 그것도 기대해 봐.”
김동윤이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300%의 성과급이라도 체면을 세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을 텐데, 추가 성과급까지 약속하니 그로선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너에게도 보상이 있어야겠지.”
“저 역시 300%의 성과급을 받을 텐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야. 내 기대를 충족시켰으니, 일단 승진을 시키는 것이 좋겠어.”
“승진 말씀입니까? 하지만 저는 아직…….”
“사람들이 하는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네 성과라면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지 못할 테니까.”
물론 뒤에서야 말들이 많을 것이다.
매제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편애를 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상장된 혜성 건설이나 다른 기업이라면 모를까, 혜성 전자는 내가 지분을 90%나 갖고 있었다.
사실상 내 개인회사나 마찬가지였기에 누구를 어느 자리에 앉히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김동윤 정도라면 그룹의 임원들도 크게 불만이 없을 것이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승진하고서도 회장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김동윤의 눈가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다크서클로 검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집에 거의 가지 않고 회사에서 일만 했다더니, 정말 그런 거 같군.’
저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개발 끝냈으니까, 직원들에게 말해. 한동안 푹 쉬라고.”
“예. 알겠습니다.”
“너도 휴가 좀 갔다 와라. 2주 정도.”
“2주씩이나 말씀입니까? 그렇게까지 길게 휴가를 갈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김동윤도 어지간히 일 중독자가 다 된 것인지, 휴가를 준다는데 오히려 싫다는 뜻을 내비쳤다.
“지현이가 힘들다는데, 2주 정도는 같이 있어 줘야 위로가 되지 않겠어? 신혼여행 때 그랬던 것처럼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갔다 와.”
지현이 이야기를 꺼내니,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휴가 복귀하면, 그때부터는 야근이나 일요일 출근은 자제하도록 해. 토요일에도 다른 부서처럼 웬만하면 오전 근무만 하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대충 대답하고 말 게 아니라, 직원들을 위해 하는 말이야. 괜히 휴대폰 사업부에서 퇴근을 안 한다면 다른 부서나 계열사도 눈치를 보게 된다고.”
내가 단단히 경고를 주자 김동윤이 그제야 뚝 부러진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봐.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예!”
김동윤이 물러나고 나는 피식 웃었다.
14일이나 휴가를 주기로 했으니, 이제 지현이의 잔소리가 조금은 줄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을 가라고 했는데, 어디로 보내줘야 지현이가 좋아할지 모르겠군.’
* * *
김동윤과의 대화가 끝난 뒤, 나는 배승민 전무를 불렀다.
참고로 배승민 전무는 내가 없었으면 탱크 박사라고 불렸을 마케팅의 귀재였다.
지금의 혜성 전자를 만든, 바로 그 탱크주의의 창시자란 뜻이었다.
뭐 지금은 나에게 가려져서 명성을 크게 쌓지는 못했지만, 그 능력은 확실히 대단해서 앱설루트와 혜성 전자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여기 앉으십시오.”
“예!”
“이 휴대폰 좀 봐주시겠습니까?”
나는 김동윤이 두고 간 HS-88의 시제품을 배승민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그룹에서 만든 휴대폰입니까?”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배승민이 눈을 크게 떴다.
벌써 휴대폰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로선 놀랍기만 할 거다.
“모토로라보다 훨씬 가벼워 보입니다.”
“맞습니다. 김동윤 상무의 말로는, 100g 정도 가볍다고 합니다.”
“오!”
배승민이 크게 감탄하였다.
100g을 경량화시킨 것은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그 대단한 모토로라의 제품들도 여전히 700g대라는 것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가볍다면, 광고하기가 쉬워질 거 같습니다.”
“예. 제가 배승민 전무이사님을 부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벌써 마케팅을 기획하고 계신 겁니까?”
“모토로라가 곧 한국에 상륙하는데, 우리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맞는 말씀입니다.”
“배승민 전무이사께서 HS-88 광고에 사력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모토로라가 아무리 세계 제일의 휴대폰 기업이라도 한국에서만큼은 우리가 최고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리 말하자, 배승민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외양도 이 정도면 멋진 편이고, 가볍기까지 하니, 모토로라보다 앞서는 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국산이라는 것을 강조한다면, 더욱더 광고 효과가 커질 겁니다.”
88 올림픽이 다가오고 있다 보니, 애국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산제를 강조한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산도 국산이지만, 우리 그룹이 혜성 그룹이지 않습니까? 혜성 그룹을 향한 민심이 좋으니, 소비자들은 웬만해선 우리 제품을 선택할 것입니다.”
배승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가격이나, 성능 등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모토로라라고 가격이 저렴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노사가 이야기해 준 대로라면 모토로라 제품의 가격은 대략 250만 원 정도였다.
HS-88은 조금 손해 보더라도 200만 원 이내의 가격으로 팔 예정이니, 가격 경쟁력도 우위에 있다고 봐야 했다.
‘성능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으니, 휴대폰 싸움은 반드시 이길 거다. 단지 어느 정도의 점유율을 차지하는지가 중요할 뿐이야.’
내가 원하는 것은 70%였다.
7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해야 안심하고 우리의 휴대폰을 세계로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 * *
“아무래도 이한성 회장은 전경련 회장직에 관심이 없어 보이더구나.”
구자성 회장의 말에 후계자이자 그룹 부회장인 구혁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명예를 생각할 때라서 당연히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군요.”
“명예보다 정부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 생각하는 거겠지. 원래 이한성 회장은 실속을 가장 중요시하는 인물이니 말이야.”
“저희로서는 대단히 곤란하게 된 거 같습니다.”
정권이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전경련의 회장직은 누구나 바라는 그런 영예로운 자리였다.
하지만 김영산 정권이 들어서자, 전경련의 회장직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경련과 정부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정부의 압박을 가장 거세게 받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이한성 회장만이 김영산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회장이 저렇게 소극적으로 나오니 전략을 바꾸어야겠어.’
한성이 전경련의 회장이 된다면 정부가 전경련을 대하는 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재벌 개혁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겠지만, 개혁 강도를 조금이라도 낮추었을 터.
하지만 한성이 전경련 회장직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혜성 그룹을 이용하려는 전략은 취소해야 할 거 같았다.
“그나저나 혜성 그룹이 또 한 번 사고를 터뜨린 거 같더군.”
구자성 회장은 화제도 전환할 겸, 혜성 그룹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고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올해 초부터 개발하기 시작했던 휴대폰을, 벌써 양산 준비를 하고 있다더구나.”
“휴대폰을 그렇게 빨리 개발했다는 말씀입니까?”
구혁재가 눈을 부릅떴다.
그 역시 혜성에서 휴대폰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혜성 그룹의 사업은 재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이란 것이 이렇게 빠르게 개발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아무리 빨라야 올해 말쯤에야 시제품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능이나 다른 것도 나쁘지 않다는 소문이다.”
“허어, 믿어지지 않는군요. 선진국 기업들에서도 쉽게 생산하지 못하는 휴대폰을 그렇게 일찍 개발하다니.”
혀를 내두르는 구혁재를 보며 구자성 회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혜성의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휴대폰 개발을 이렇게 일찍 끝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결과물도 범상치 않다니 당혹스럽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도대체 혜성에는 어떤 괴물들이 있는 것인지.’
은성에서 휴대폰을 개발했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1년?
어쩌면 1년을 넘어 2년이 소요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 휴대폰 개발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휴대폰을 개발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임원 회의에서 휴대폰 개발은 시기상조라고 결론이 나왔지 않습니까?”
“혜성이 하는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은성의 회장으로서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혜성은 한참 앞서 있을 때도 경각심을 늦출 수 없는 기업이다. 그런데 휴대폰 사업에서 혜성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어. 이대로 시간이 지체된다면 휴대폰 사업은 반도체 사업처럼 시작도 못 하고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구혁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확실히 구자성 회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직 휴대폰 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하긴 해도, 혜성이 먼저 시작해버린 이상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혜성 그룹의 발끝이라도 쫓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은성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재계 순위도 거의 다 따라잡혔으니, 이제는 정말 은성 그룹이 도전자 입장에 서야 할 때가 아닐까 싶었다.
* * *
“은성 전자에서 휴대폰 사업부를 발족했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편의점 사업도 따라 하더니, 많이도 따라 하는군요.”
내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어차피 우리가 휴대폰 개발에 성공했으니 다른 기업에서도 우후죽순 휴대폰 개발을 시도할 거라고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물론 재계 2위의 은성 그룹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것은 예상 못 하긴 했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우리의 상대는 휴대폰 세계 1위인 모토로라이지, 아직 출발도 안 한 국내 기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