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위상이 높아진 것은 좋은데
만약 지금 시점에 전경련의 회장이 된다면 김영산 대통령이 좋게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까지 다른 재벌들과 똑같은 존재로 보게 될 수도 있으리라.
‘뭐 사실 나라고 김영산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애국심이 투철하고 도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내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김영산 대통령과 관계가 나빠지면 좋을 게 없었다.
“일단 고민 좀 해 보겠습니다.”
“역시 정부와의 관계를 신경 쓰는 건가?”
“그것도 있고, 일단 명예회장님과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이 회장의 생각이 그렇다면, 알겠네. 어차피 내년까지 시간이 꽤 남았으니, 천천히 고민하도록 해 보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일어나 보겠네.”
“벌써 가십니까?”
“회사 일이 아직 덜 끝나서 말이야.”
“들어가십시오.”
권오중 회장이 자신의 회사로 돌아가자 나는 턱 끝을 쓰다듬으며 고민하였다.
‘확실히 내 입지가 달라지긴 한 거 같단 말이지.’
30대 초반에 불과한 나에게 전경련 회장직을 권유하다니.
이것만 봐도 재계에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거 같았다.
물론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결과겠지만 말이다.
따르릉!
그때였다.
갑자기 전화가 울리더니, 양준현이 수화기를 건네줬다.
“청와대의 전화입니다.”
나는 ‘청와대’란 말에 몸을 움찔하였다.
전경련의 회장직에 추대받은 일 때문에 괜히 찔린 거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이한성 회장님. 고영태 비서실장인데, 지금 통화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2세대 이동통신에 대해 여쭙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이한성 회장님만큼 첨단 산업에 이해도가 높으신 분이 없지 않습니까?
이동통신이란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경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2세대 이동통신이라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거 같았다.
“과찬입니다. 전문가도 아닌 제가 알아봐야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물론 전문가의 의견도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이공 계열의 전문가가 하는 말은 알아듣기가 영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이한성 회장님의 가르침은 실로 명쾌하고 알아듣기가 쉬워서, 이한성 회장님의 고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정말 첨단 산업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 또한 이한성 회장님이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신 결과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하, 앞서 이야기했던 주제로 돌아가 보자면, 이한성 회장님은 혹시 CDM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론적으로는 가장 완벽한 차세대 이동통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회장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이론적으로라고 굳이 덧붙인 것을 보면 상용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시는 거 같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 기술 시연이 성공했다고 하던데, 빌딩이 빼곡히 들어선 도시에서의 기술 시연도 성공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내 말에 고영태 비서실장은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부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하여 다른 선진국들은 전부 TDMA를 도입했는데, 아무도 도입하지 않았던 CDMA를 도입하는 것은 지나친 도박 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확실히, 최초라는 것은 이래서 힘들었다.
앞에 어떤 길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갈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감히 말씀드리는 건데, 이동통신 분야에서 일본을 넘어설 기회는 CDMA를 도입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본이요?
“일본에서도 TDMA를 국가 표준으로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야 일본을 쫓아가는 전략을 취해왔지만, 앞으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
나는 무수한 나라 중에 일부러 일본을 언급하였다.
김영산 대통령이 일본에 좋은 감정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뭐, 사실 김영산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일본에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한성 회장님께서는 CDMA를 도입하면 일본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CDMA가 더 좋은 기술이니, 이동통신에 있어서만큼은 일본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내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고영태 비서실장이 탄성을 질렀다.
-이한성 회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CDMA 도입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확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곧 정부에서 CDMA 도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을까 싶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CDMA의 기술이 훨씬 우수했으니, CDMA 도입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쌍호 정유를 인수하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혜성 그룹이 재계 3위가 되었다고 정계가 떠들썩합니다.
“그렇습니까?”
재계도 떠들썩한데, 정계도 그렇다 하니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뭐 나중을 생각하면 익숙해져야 할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멀지 않아 재계 1위에 오를 것이니까.
-다만 조금 우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우려스러우십니까?”
-쌍호 정유와 관련해서, 혜성 그룹에 정부의 특혜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소리가 야당 정치인들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입니다.
특혜는 무슨.
내가 내 돈으로 인수한 것뿐인데 괜한 소리를 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군요.”
-예. 하지만 혜성에서 샤롯 그룹의 계열사까지 인수하게 된다면 이 같은 소문은 더 널리 퍼지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쌍호 정유까지는 봐줬지만, 샤롯 그룹은 노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왕이면 샤롯 그룹까지 노리고 싶었는데, 조금은 미루어야 할 거 같았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똑같군.’
아직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재계 1위인 미래 그룹조차 정부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었으니.
시간이 지나 대기업들의 규모가 더욱더 커진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시장의 권력이 정치의 권력을 넘어서게 될 거다.
-그리고 이한성 회장님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면?”
-요즘 재계에서 우리 정부를 안 좋게 보는 인사들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권오중 회장의 권유가 생각났다.
고영태 비서실장이 말하는 재계 인사들이란 전경련 회원들을 말하는 것일 터.
만약 내가 권오중 회장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고영태 비서실장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정부를 안 좋게 보다니요. 설마 그런 이들이 있겠습니까?”
-독재 시절보다는 사이가 어긋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
-아무튼, 우리 정부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한성 회장님께서 재계의 인사들을 다독여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정부를 적대하지 않게끔 말입니다.
설마 청와대에서 이런 부탁을 할 줄이야.
‘내가 전경련의 회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청와대에서도 알고 있는 건가?’
왠지 그런 거 같았다.
아니면 나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뭐가 됐건, 나로선 난감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정부는 어디까지나 불의와 싸우려는 것이지, 모든 재벌과 싸우려는 것이 아님을 다른 총수들께 잘 전해 주길 바랍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영태 비서실장과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혜성 그룹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좋은데, 이런 식의 부담까지 늘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아버지와 대화를 해 봐야겠어.’
어차피 전경련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내가 전경련의 회장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한철 명예회장과 대화를 나눠 볼 필요가 있었다.
* * *
“요즘 어딜 가도 네 이야기밖에 없더구나.”
“그렇습니까?”
“혜성 그룹이 재계 3위까지 되다니. 나로서는 정말 여한이 없다.”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혜성 그룹을 재계 1위를 넘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으로 만들 겁니다.”
내 말에 이한철 명예회장이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재계 1위라. 하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구나.”
“정유사까지 손을 뻗었으니, 재계 1위가 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쌍호 그룹과의 일은 잘 해결된 것이냐?”
“후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보다는 김종우 회장 쪽에서 후환을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다만, 쌍호 정유와 관련해서 말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재계의 인사들이 너를 질투하는 모양이야.”
“예, 질투도 질투지만, 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더욱 저를 안 좋게 보는 거 같습니다.”
“하긴, 김영산 대통령과 가장 친한 기업이 우리 혜성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어.”
“그런데 전경련에서는 제가 김영산 대통령과 친하다는 사실을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이한철 명예회장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나는 권오중 회장이 내게 했던 제안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경련의 회장직이라. 허, 혜성에도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그는 꽤 감격스러운 듯하였다.
하기야, 전경련의 회장직이라면 사실상 재계를 대표하는 자리였다.
기껏해야 재계 10위에 불과했던 시절의 혜성 그룹 회장이었으니, 그로서는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다.
“너는 전경련의 회장직이 달갑지 않은 거 같은데, 내 생각이 맞느냐?”
“아무래도 정부에서 전경련을 좋게 보고 있지 않아서,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이한철 명예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지금 전경련에 들어간다면 정부와의 관계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겠구나.”
“예, 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 중입니다. 참고로, 몇 시간 전에는 청와대에서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재계와의 관계 개선에 도와달라는 부탁을 말입니다.”
“그래?”
이한철 명예회장은 내 말을 듣고 턱 끝을 쓰다듬더니, 이같이 말했다.
“정부가 그런 부탁을 했다면, 전경련의 회장직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결국, 정부도 우리 재벌들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냐. 만약 우리가 전경련의 회장이 되어 정부와 재계 사이를 잘 중재한다면, 우리 혜성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해지지 않을까 싶다.”
“정부에서 저렇게 나오고 있는데, 재계를 다독이는 게 과연 쉬울지 의문입니다.”
나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재계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일종에 전쟁 총사령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부와의 전쟁도 우리 혜성이 선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흠, 너의 생각이 그렇다면 다시 고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래도 재계 1위 자리를 노린다면 한 번쯤은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구나.”
이한철 명예회장의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전경련 회장직은 아버지께서 맡아 보시겠습니까?”
“나보고 전경련의 회장이 되라는 말이냐?”
“예, 아무래도 제 나이가 나이다 보니 회장직을 맡는 게 부담스러워서 말입니다.”
내 말에 이한철 명예회장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사양하지는 않겠다. 어차피 너는 혜성 그룹을 경영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테니 말이야.”
다행이었다.
이한철 명예회장이 전경련의 회장직을 반대하지 않아서.
‘아버지의 말대로, 전경련의 회장직을 받아들이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어. 어차피 구자성 회장의 임기가 내년까지니, 내년에 결정을 내리자.’
만약 내년 안에 재계 1위가 될 수 있다면, 전경련의 회장직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재계와 정부를 상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