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하겠다고?
혜성 그룹이 쌍호 정유를 인수한 일은 재계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쌍호 중공업에 이어 쌍호 정유까지 혜성 그룹에 내주는군. 김종우 회장은 사실, 이한성 회장의 사람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야.”
“그 말을 김종우 회장 앞에서 하면 반응이 재미있겠는데?”
“하하, 면전에서만 주의하지 뭐. 어차피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게 김종우 회장의 귀에 들어가도 쌍호 그룹은 이제 무섭지 않다고.”
“재계 순위가 13위까지 떨어졌던가?”
“갈 데까지 갔지. 청문회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저 상태면, 청문회 끝날 때쯤이면 20위까지 떨어질 가능성도 있어.”
한때는 재계 6위까지 올랐던 쌍호 그룹이 겨우 몇 년 사이에 13위까지 떨어진 일은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10위권과 거리가 먼 재벌들은 이런 쌍호 그룹의 추락을 통쾌하게 여기며 김종우 회장을 비웃었다.
“그런데 김종우 회장은 왜 이한성 회장에게 쌍호 정유를 넘긴 거야?”
“혜성 그룹에서 이미 지분을 다 먹었다잖아. 반항해봤자 소용이 없으니 프리미엄 명목으로 웃돈이라도 받으려 그랬겠지.”
“한심하네. 그럴 거면 반 혜성 동맹은 뭣 하러 결성한 거야?”
“그러니 말이야. 고림 그룹을 보고도 혜성 그룹에 덤비다니, 이보다 한심할 수가 없어.”
“고림의 민건우 부회장도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재계 순위가 그렇게 낮아졌는데 당연한 결과지. 김종우 회장도 성격이 조금은 달라질걸?”
“하하하! 오만하기 그지없던 김종우 회장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는데?”
“나는 샤롯 그룹의 신진호 회장도 기대가 돼. 아직도 혜성 그룹과 적대 관계잖아?”
“판단이 느린가 봐. 나였으면 지금이라도 잠실에 가서 무릎을 꿇었을 텐데.”
“샤롯 그룹의 총수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그런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지. 물론 나였어도 혜성 그룹이 상대라면, 일단 고개를 숙였을 테지만 말이야.”
고림 그룹에 이어 쌍호 그룹까지 재계 순위가 확 내려가자, 혜성 그룹의 위상은 더욱더 높아졌다.
재계에서는 한성과 적대하면 회사 전체가 풍비박산이 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나저나 혜성 그룹은 어디까지 올라갈까?”
“일단 재계 3위는 확정이라며?”
“그렇겠지. 어차피 은성이고 정우고 혜성이고 큰 차이는 없으니까. 아마 2위까지는 쉽게 올라갈 거 같은데?”
“올해 매출이 엄청날 거라던데, 이러다 재계 1위까지 올라가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러려고? 미래 그룹도 매출 상승세가 엄청나잖아. 작년에도 12조 넘게 벌었다는데, 올해는 그보다 더 벌걸?”
“혜성도 매출로는 그리 밀리지 않을 거 같은데. 반도체에서만 조 단위를 벌고 있고, 혜성 자동차나 혜성 전자의 매출도 엄청나잖아?”
“그런가?”
“뭐가 됐건, 이한성 회장이 있는 한, 혜성 그룹이 재계 1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야.”
“부럽군. 재계 1위라니.”
재계 인사들은 어느덧 혜성 그룹이 재계 1위가 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였다.
그만큼 혜성 그룹의 기세는 매서웠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시군.’
세계 그룹, 양희수 회장의 장남인 양기현은 혀를 내둘렀다.
한성의 수행비서로 일했을 때부터 그는 한성을 범상치 않게 여겼었다.
그런데 혜성 그룹을 떠나 세계 그룹으로 오게 되니, 한성의 모습이 더더욱 비범하게만 느껴졌다.
‘사람들 말대로, 정말 미래 그룹을 제치고 재계 1위에 오르려나?’
재계 10위에서 재계 3위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었다.
매출로만 봤을 때, 거의 열 배에 가까운 성장이었으니까.
그런데 혜성 그룹의 주력 계열사는 전부가 미래에도 유망한 사업들이었다.
앞으로의 성장세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한성이 형님의 따까리란 소리를 들으면 듣기 거북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기분 좋게 들리네.’
한때 재계 7위였던 세계 그룹이었다.
혜성 그룹보다도 재계 순위가 높았었기에 사실 혜성 그룹과 비교를 당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이 저렇게 치고 나가니, 이제는 어떤 소리를 들어도 별로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기업에서 혜성 그룹과의 관계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앞으로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해야겠어. 설령 내가 회장이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 * *
재계 3위가 되었다지만, 내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언론에서 언급되는 숫자도 늘고, 재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 위상이 달라지기는 한 거 같지만, 현실적으로 체감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인터뷰 요청이나 강의 요청이 늘었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체감되었다.
‘대학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내가 강의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일은 아닌 거 같았다.
애초에 노사의 덕으로 회장이 되었던 내가 경영이나 투자에 대해 잘난 척하듯 남을 가르쳐주는 것도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회장님, 정우 그룹 회장이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혼자 상념에 빠져있을 때, 이소희가 권오중 회장의 방문 소식을 전하였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신 거 보니 오늘은 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모양이군요. 일단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권오중 회장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아무래도 한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더군. 이왕이면 혜성도 강북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부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요.”
“잠실의 황제를 종로까지 오게 할 수는 없지.”
“황제라니, 그 정도는 아닙니다.”
내 말에 권오중 회장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김 회장도 꼴좋더군. 주제도 모르고 이 회장에게 덤벼서 말이야.”
예상했던 대로 권오중 회장은 김종우 회장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하긴, 요즘 재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이야기였으니, 권오중 회장의 성격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거다.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호오, 정말로 김 회장을 용서해주기로 한 건가?”
“쌍호 정유를 가져간 것으로 충분하게 응징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권오중 회장이 기꺼운 반응을 보였다.
“잘 생각했네. 사실 혜성 그룹이 쌍호 정유를 가져간 일로 전경련에서 말들이 많았거든.”
“그렇습니까?”
권오중 회장의 말에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뒤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쌍호 정유를 먹은 것은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정우 그룹보다 재계 순위가 높은 건가?”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하지. 자존심 싸움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어차피 재계 4위나 3위나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재계 3위가 되니 그런 말도 하는군. 나는 이 회장이 정말 부럽네. 그렇게 빠른 속도로 그룹을 발전시키다니 말이야.”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는 당연히 권오중 회장이 승부욕을 불태우며 다시 재계 3위 자리를 탈환시키겠다고 선포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과찬입니다.”
“재계 3위가 되었으니, 재계 2위도 금방 될 거 같고, 이제 미래 그룹을 추월하는 일만 남았겠어.”
“글쎄요. 권오중 회장님께서 정우 그룹의 규모를 키우셔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회장이 있는데 어떻게 다시 3위로 돌아가? 나는 그냥 빅 4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네.”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높게 평가하기는. 오히려 지금까지 이 회장을 과소평가했었어.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 회장을 제대로 평가하는 거지.”
권오중 회장의 말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나를 띄워주니 어색한 기분이었다.
‘쌍호 그룹의 최후를 보고서 나에 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군.’
아마 나를 ‘절대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존재’로 구분 지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승부욕이 강한 권오중 회장이 이런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것도 나쁘지 않기는 한데, 뭔가 아쉽네. 요즘 들어 나도 권오중 회장이 친구처럼 느껴졌는데 말이야.’
나는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권오중 회장을 향해 겸손하게 말했다.
“과찬입니다. 저는 아직 권오중 회장님께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하하,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군.”
“그런데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주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권오중 회장이 그저 나를 칭찬하기 위해 먼 길을 온 거 같지는 않았다.
물론 평소의 권오중 회장도 용건 없이도 가끔 찾아오기는 했지만, 오늘은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진지하였다.
이럴 때는 분명 무언가 용건이 있었으니, 나로서는 의아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오중 회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 회장에게 전경련 회원들의 뜻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네.”
“전경련 회원들의 뜻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름이 아니라, 전경련 회원들은 이 회장, 자네를 차기 전경련의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합의를 봤네. 물론 지금 회장을 맡고 계신 구자성 회장님도 찬성하셨고 말일세.”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난데없이 전경련 회장이라니?
나에게 말도 없이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하겠다고 하니, 그저 황당하기만 하였다.
“30대 초반에 불과한 제가 전경련 회장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나이가 중요하겠나? 영향력이 중요하지.”
“하지만 차기 회장은 권오중 회장님이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일성이야 초대 회장이라는 명예를 가졌고 미래 그룹의 왕주형 회장은 작년까지, 은성 그룹의 구자성 회장은 올해부터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었다.
관례대로라면 정우 그룹의 회장인 권오중 회장이 차기 전경련 회장을 맡는 게 정상이었다.
영향력을 생각해도 내가 권오중 회장보다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말이다.
“나는 그런 자리 질색이야. 혜성 그룹보다 재계 순위가 낮아서 체면도 안 서고 말이지.”
“저 역시, 재계의 다른 어른들이 계시는데 전경련의 회장이 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춘부장께 권하는 것이 어떤가?”
“이한철 명예회장님 말씀입니까?”
“춘부장도 재계의 어른이시고, 자네의 부친이기도 하니, 전경련의 회장에 취임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야.”
그건 그랬다.
이한철 명예회장은 재계 3위인 혜성 그룹의 창업주였다.
지금이야 은퇴해서 언론이나 다른 어디에서도 따로 언급되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혜성 그룹의 창업주인 이상,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전경련 회원들 역시, 이한철 명예회장이라면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모르겠군. 이 시기에 혜성 그룹이 전경련의 회장직을 맡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인지.’
명성이야 크게 오를 것이다.
아직도 혜성 그룹을 빅 4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혜성 그룹에서 전경련의 회장이 나온다면 그들도 혜성 그룹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재계 전체를 나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전경련 회장이라는 것이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재계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 자리를 잘만 활용한다면, 재계에서 과거의 일성보다 더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도 가능할 거 같았다.
‘문제는 전경련이 김영산 대통령과 점점 관계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점이야.’
전경련은 전통적으로 정부와 밀월 관계를 맺었었다.
5공 때는 전경련이 앞장서서 5공 주요 인사들의 비자금을 모금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영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김영산 정권에서 재벌 개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자, 전경련은 처음으로 정권과 갈등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