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한걸음 남았군
쌍호 그룹 본사.
양준현은 적지나 다를 게 없는 이곳에 당당하게 활보하였다.
‘과거에는 대단하게만 느껴졌던 이곳인데, 지금 보니 우리 그룹의 사옥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네.’
쌍호 그룹 본사는 예전부터 대기업의 상징과도 같은 빌딩이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데다 크기도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준현이 보기에 낡고 촌스럽게만 보였다.
외국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잘 지어진 혜성 그룹의 본사에 비하면 보잘것없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어디서 오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는 혜성 그룹 회장님을 모시는 양준현 비서라고 합니다. 쌍호 그룹 회장님께, 혜성 그룹의 회장님 말씀을 전해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혜성 그룹이란 말에 안내 직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약속은 하고 오셨는지요?”
“따로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쌍호 그룹 회장님을 꼭 만나 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약속을 하지 않으셨으면 회장님을 찾아뵐 수 없습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실 텐데, 이렇게 나오시면 쌍호 그룹에 좋을 게 없을 겁니다.”
지금 양준현의 행동은 스스로 생각해도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다짜고짜 쳐들어와서는 회장을 만나달라고 떼쓰는 상황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쌍호 그룹이라면 이렇게 해도 됐다.
지금까지 많이 참아줬었으니 말이다.
“이, 일단 비서실에 양준현 비서님에 대해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둘러 답변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양준현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김종우 회장이라면, 절대 그를 그냥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한성이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는지 궁금해서라도 그를 올려보낼 수밖에 없을 터.
아니나 다를까.
“지금 엘리베이터에 타셔서 20층으로 올라가시면 될 거 같습니다.”
양준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고는 20층으로 올라갔다.
‘회장의 집무실이라. 김종우 회장이 직접 나를 부른 모양이군.’
자존심 때문에라도 비서실장이나 다른 누구를 보낼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하긴, 한성과 관련된 일이라면 유난스럽게 반응하는 김종우 회장이었으니,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님을 모시는 양준현 비서라고 합니다.”
“양준현이라.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세계 그룹 양 회장님의 차남이라고?”
김종우 회장도 양준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지 세계 그룹을 언급하였다.
“예. 하지만 지금은 이한성 회장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으니, 세계 그룹이 아닌 혜성 그룹의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계 그룹의 사람으로 보나, 혜성 그룹의 사람으로 보나 큰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군. 어차피 세계 그룹은 이한성 회장의 2중대나 마찬가지 아닌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준현은 김종우 회장의 어설픈 도발을 가볍게 무시해주고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혜성 그룹 회장님께서 쌍호 정유를 인수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말인데, 프리미엄을 보장해 줄 테니, 혜성 그룹에 쌍호 정유를 넘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같은 양준현의 말에 김종우 회장은 입을 떡 벌렸다.
가볍게 잽을 날렸는데, 핵폭탄급의 카운터 펀치가 날라왔다.
김종우 회장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혜성에서 쌍호 정유를 인수하겠다고?”
“예. 쌍호 정유 같은 알짜 회사가 주인을 잘못 만나 어려움에 처했지 않습니까? 혜성 그룹에서 대신 경영을 한다면, 금세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유 업계 1위의 기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너무 황당한 일을 겪으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었다.
김종우 회장이 바로 그러했다.
양준현이 도발을 넘어 조롱에 가까운 말을 하자, 김종우 회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탁자를 내리쳤다.
쾅!
“너 미쳤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김종우 회장의 비서들도 사나운 눈을 한 채 양준현을 노려봤다.
분위기만 봤을 때, 당장이라도 양준현을 때려죽일 기세였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제로 인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혜성이 조금 잘나간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군! 쌍호 정유를 가지고 싶다 해서 가질 수 있을 거 같아?”
“물론입니다.”
“이놈이 그래도?”
“지분이라고는 겨우 22%밖에 없으시면서 뭘 믿고 그리 당당하십니까? 설마, 김 회장님의 우호 지분이 영원토록 우호 지분으로 남을 거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죠?”
“……뭔 소리를 하는 거냐.”
“간단한 이치입니다. 쌍호 정유의 주주들이 회장님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재계 10위에서 재계 4위까지 그룹을 발전시킨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님을 원하겠습니까?”
물론 세상의 이치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주주들이라고 다 돈만 보고서 갈대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사전작업을 다 끝내놓은 상태였다.
이사회가 열린다면 김종우 회장을 지지할 주주는 거의 없을 터.
사실상 김종우 회장의 반발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기는 힘드실 테니,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충고를 드리자면, 하루빨리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냐하면 곧 공개 매수가 시작될 것이니 말입니다.”
양준현의 협박성 발언에 김종우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준현과 신경전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정말 양준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언제 쌍호 정유를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 * *
“지분이 벌써 25% 넘게 이한성 그놈에게 넘어갔단 말이냐?”
“밝혀진 지분만 25%고, 어쩌면 30% 이상의 지분이 이한성 회장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김종우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혜성 그룹에서 샤롯 호텔을 인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만 해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설마 혜성 그룹에서 자신의 계열사도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이건 마치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이놈은 도대체 언제 쌍호 정유의 지분을 인수하고 있었던 거야?’
그 은밀함과 자금력이 그저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경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장제훈 사장이 약속을 취소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장제훈 사장도 이한성 회장에게 넘어간 거 같습니다.”
양준현의 경고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미 김종우 회장의 우호 지분의 상당수가 한성의 편을 들기로 작심하였던 것이다.
“빌어먹을!”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쌍호 중공업에 이어 쌍호 정유까지 뺏기게 생겼는데 진정하게 생겼어?”
김종우 회장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또다시 한성에게 패배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개 같은 자식 같으니!’
한성이 눈앞에 있다면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는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하지만 김종우 회장은 이내 차분함을 되찾은 채,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어?”
“쌍호 정유는 사실상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말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방법이 없다는 뜻이잖아!”
“죄송합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유야 뻔했다.
한성을 적대한 것.
애초에 한성을 적대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길, 이한성 그놈에게 다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건가.’
무릎을 꿇는다고 과연 용서해줄지 의문이었다.
고림 그룹만 해도 재계 11위였던 대기업이 20위까지 추락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20위권에서 전전하고 있으니, 한성의 뒤끝은 실로 무섭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5공 때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김종우 회장은 5공의 충실한 개였으니, 그가 추락하는 것을 정권 차원에서 막아줄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정권까지 바뀌어서 그가 기댈 곳이 하나도 없어졌다.
아니, 정부에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정부가 그를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한한 자금력을 뽐내는 혜성 그룹을 적대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혜성 그룹에 연락해.”
“뭐라고 연락하면 되겠습니까?”
“쌍호 정유를 매각해야겠어. 이한성 회장과의 자리를 만들어 봐.”
“현명한 결정입니다.”
비서실장의 대답에 김종우 회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항복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게 맞는 말이어서 더욱더 분하였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반 혜성 동맹 같은 건 만들지도 않는 것이었는데!’
* * *
언론이 소란스러웠다.
혜성 그룹에서 갑자기 쌍호 정유를 인수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김종우 회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결정을 내렸군.’
나는 피식 웃었다.
끈질기게 버틸 거로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포기가 빨랐다.
지금의 쌍호 그룹이 사면초가의 상황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대양 상선에 이어, 쌍호 정유까지 인수했으니, 이제 재계 3위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안 그래도 올해 재계 3위로 오르는 것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었다.
그런데 쌍호 정유까지 혜성 그룹으로 편입되었으니, 지금 당장 재계 3위라고 불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재계 2위도 시간문제라고 한다면, 이제 한걸음 남았군.’
미래 그룹을 추월하고 재계 1위가 되는 것도 멀지 않은 거 같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결국, 정유 사업까지 손을 뻗었구나.)
“예. 기회가 생겨서 냉큼 가져왔습니다.”
(잘했다. H 오일이라면, 수십 년 동안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줄 거다.)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때, 노사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김종우 그놈은 이대로 용서해 줄 것이냐?)
노사로서는 두 번이나 내 심기를 건드린 김종우 회장을 용서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적에게 절대 자비를 보이지 않는 노사였으니 말이다.
“지금 당장은 용서해 줄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왜지? 지금이라면 오히려 쌍호 그룹을 치기에 적기 아닌가?)
“쌍호 그룹을 더 괴롭혔다간 괜히 제가 악역을 맡게 될 거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 국민들이야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재벌들은 어떨까?
안 그래도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들로 재계에서 말들이 많은 상황이다.
이럴 때, 재벌들 사이에서 동정 여론이 확산하고 있는 쌍호 그룹을 괴롭혀 봐야 좋은 꼴을 보기 어려웠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어차피 제가 더 괴롭히지 않아도 쌍호 그룹은 알아서 무너질 겁니다.”
김종우 회장만 해도 최소 5년 이상의 징역 선고를 받을 것으로 반쯤 확정이 났다.
벌금이나 추징금도 어마어마할 것이니, 쌍호 정유까지 뺏긴 쌍호 그룹의 규모는 팍 쪼그라들 게 분명하였다.
(상대할 가치가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겠어.)
“예, 다만 김종우 회장의 동생과는 만남을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쌍호 정유 인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김종우 회장의 친인척들과도 한 번씩 만났다.
고작해야 1, 2%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들 역시 쌍호 정유의 주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때 김종우 회장의 친동생과도 인연을 맺었는데, 그는 상당히 야망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내가 쌍호 그룹의 회장이 되라고 권유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이었다.
(김종우 그놈을 권좌에서 강제로 끌어내리면 볼만하긴 하겠구나.)
“저야 이왕이면 그런 상황이 오질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적이 많은데 재계에 적을 더 두고 싶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노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걸 물었다.
(쌍호 그룹은 그렇다 치고, 샤롯 그룹은 어떻게 할 거냐?)
그거야 물어보나 마나였다.
“계속해서 괴롭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샤롯 호텔이야 더 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샤롯 그룹의 사업은 계속해서 견제해 줄 생각이었다.
호텔부터 시작하여 백화점과 편의점 사업까지.
혜성 그룹과 겹쳐있는 사업을 모조리 견제해 준다면 샤롯 그룹의 성장세도 크게 둔화할 수밖에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