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오히려 좋아
“회장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예상했던 일이기에 놀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어떤 부탁을 하시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퀄컴에서 휴대폰을 생산하려 합니다.”
“휴대폰이라. 의외의 말이군요.”
정말 의외였다.
‘그냥 돈을 빌려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휴대폰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내가 그렇게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혜성 그룹에서 CDMA 기반의 휴대폰을 자체 생산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이한성 회장님께 너무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기에, 위탁 생산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CDMA 기반의 휴대폰?
안 그래도 차기 제품은 CDMA 기반의 휴대폰으로 생산할 계획이었다.
물론 지금의 한국은 1세대 이동 통신을 사용하고 있어서,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위탁 생산을 맡긴다면 부탁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냥 제안을 해줘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고려할 사안인 거 같은데.”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위탁 생산이 아니라, 위탁 생산에 필요한 자금입니다.”
“설마 저희에게 위탁 생산을 맡기면서 돈까지 빌려달라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내가 퀄컴을 좋게 보고 있다지만, 이런 요구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나를 호구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제이콥스가 이어서 하는 말을 듣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물론 그냥 빌려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저희가 가진 지분을 이한성 회장님께 매각하려고 합니다.”
지분을 매각한다니.
이러면 오히려 좋았다.
‘나중에 퀄컴의 시가총액이 얼마까지 오른다고 했더라?’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100조까지 오른다고 했던 거 같았다.
물론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 있으나, 그래도 이 정도의 수익률이라면 투자를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퀄컴의 시가총액이 100조가 넘는 때가 되도 나는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지분을 얼마나 매각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지으며 그 같이 물었다.
지분을 인수하는 입장에서, 구태여 퀄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5%를 500만 달러에 매각하고 싶습니다.”
“흠.”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매각하는 지분이 5%밖에 안 되는 것은 아쉬웠지만, 500만 달러라면 내가 생각했던 퀄컴의 가치보다 한참 낮은 가격이었다.
현재 퀄컴의 가치가 1억 달러밖에 안 된다는 의미였으니.
“비싸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CDMA의 기술 시연을 지켜보시면 회장님도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제이콥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반대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본인도 CDMA의 기술을 높게 평가하면서 정작 퀄컴의 가치는 1억 달러로 평가하다니. 교수 출신인데도 어딘가 어리숙한 구석이 있군.’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500만 달러가 50억 달러로 바뀔 텐데, 다른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뭐 나비효과로 퀄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가치가 뛴다는 것이 의문이긴 해도, 이왕 CDMA에 손을 덴 김에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감격한 표정을 짓는 제이콥스를 향해 나는 역제안을 걸었다.
“혹시 CDMA 기술을 한국에서 상용화해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노사가 퀄컴을 인수하라 할 때도 CDMA 기술을 많이 언급하였었다.
CDMA를 최초로 상용화한 것이 한국이라나?
‘어차피 상용화할 거라면 조금 더 일찍 상용화하는 것이 나로선 이득이지.’
경제가 발전하고 있으니, 이동 통신 가입자가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이동 통신 가입자가 늘어난다면, 아날로그 라디오 방식의 통신으로는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터.
더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려면 아날로그 라디오 방식에서 오는 불편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불필요한 지출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한국에서 상용화를 한다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한국에서도 2세대 이동 통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정부가 들어서면서 연구가 본격화하고 있는데, CDMA라면 정부에서도 긍정적으로 고려할 겁니다. 물론 퀄컴 경영진의 생각이 더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저희야 한국에서 CDMA 상용화를 고려해준다면 얼마든지 협력해줄 의사가 있습니다.”
제이콥스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로선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TDMA와의 전쟁은 미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벌어질 예정이었다.
한국이 비록 동양의 작은 나라라지만, 나라 전체를 CDMA 진영으로 끌어들인다면 그 파급 효과는 절대 작지만은 않을 것이다.
* * *
제이콥스와 CDMA 상용화 이야기만 나눈 것이 아니었다.
휴대폰과 관련해서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앞으로 퀄컴에서 만들 모든 반도체를 동현 반도체에서 생산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제이콥스는 긍정적으로 고민하겠다며 답변을 미루었는데, 내 생각이지만, 반도체는 동현 반도체에 맡길 거 같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미국의 생산 단가와 비교하면 동현 반도체에 맡기는 것이 압도적인 이익이었다.
그렇다고 동현 반도체의 기술력이 딸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TMSC가 아니라면 다른 대안은 동현 반도체밖에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업계의 다른 기업들도 끌어들여 줬으면 좋겠군.’
퀄컴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미국의 다른 반도체 기업들도 생산 단가를 줄이기 위해서라면 동현 반도체를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을 터.
인텔 같은 거대 반도체 기업의 위탁 생산을 받아내기만 한다면 TSMC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제인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퀄컴에 대한 소식도 전할 겸, 오랜만에 한제인 회장을 사옥으로 불렀다.
참고로 한제인 회장은 본래 사장이었다가, 올해 들어 회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재계에서도 이와 관련해서 말들이 많았다.
재벌 출신도 아니고, 그저 양희수 회장의 여섯 사위 중 한 명이었던 그가 순식간에 계열사 여럿을 둔 재벌이 되었으니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동현 그룹을, 아예 범 혜성 진영으로 분류하고 있다지?’
나는 속으로 픽 웃은 뒤, 한제인 회장에게 말했다.
“어떻게, 사업은 잘되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회장님 덕분에, 반도체도 그렇고 무역 쪽도 그렇고 사업이 잘 풀리고 있습니다.”
“일성에서 주문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일성에서만 벌써 백억에 가까운 양의 오더를 줬습니다.”
백억이라.
아직 시스템 반도체 쪽으로 자리를 접기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규모가 아닐 수 없었다.
‘이호승 회장이 확실하게 마음을 굳힌 거 같군.’
몇 달 동안 간을 보기만 했었는데, 반도체 시장이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바뀐 거 같았다.
“일본에서의 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다이소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직 두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한제인 회장이 살짝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다이소 사업을 포기하기 아까워서 동현 그룹에 추천해 주었는데, 아직은 제대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았다.
“내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니, 지금부터 투자를 늘리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활황일 때도 재미를 보는 사업이지만, 불황이 온다면 그 어떤 사업보다 빠르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위안이 됩니다.”
“그리고 곧 퀄컴이라는 미국의 기업에서 반도체 생산을 의뢰하기 위해 사람을 보낼 겁니다.”
한제인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퀄컴이라면 그, 미국의 통신 회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신다니, 이야기가 편해지겠군요. 곧 퀄컴에서 사업을 확장할 건데, 아마 동현 반도체에 파운드리를 의뢰할 가능성이 큽니다.”
“허어. 설마 이번에도 회장님께서?”
일성처럼 이번에도 내가 중계를 해줬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가 퀄컴의 대주주입니다.”
“저, 정말입니까?”
“예. 그러니 퀄컴의 손님이 올 것을 미리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당장이야 일성보다 오더량이 적을 수 있겠지만, 나중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공장 시설은 지금도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더더욱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퀄컴을 시작으로 다른 미국 반도체 회사들도 끌어들이십시오. 정부에 말해뒀으니, 정부의 보조를 받으면 될 겁니다.”
내 말에 한제인 회장이 크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일성과 퀄컴에 이어 다른 미국 기업들을 끌어들이는 일까지 도와준다고 하니 그로선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동현 그룹을 크게 키우기만 해도 은혜는 갚은 거나 다름없으니, 그저 경영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한제인 회장을 보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CDMA의 도입에 나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아무리 CDMA가 성공할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이건 나라의 일이었다.
일개 기업가가 나라의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남들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뒤에서 은밀하게 CDMA이 도입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원재 박사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내가 인정민 실장에게 물으니, 그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긍정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맨해튼에서 있을 거라는 필드 테스트가 성공한다면, 아마 이원재 박사가 먼저 CDMA의 도입을 주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무선통신 개발단을 이끄는 것이 인정민 실장이 언급한 이원재 박사란 사람이었다.
이원재 박사가 CDMA에 관심을 가졌으니, CDMA이 도입되는 것도 이제는 시간문제였다.
‘원 역사보다 몇 년은 일찍 도입되는 셈이니, 영향이 상당하겠어.’
아마 휴대폰 개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싶었다.
아주 긍정적인 영향 말이다.
덤으로 퀄컴의 주가도 더 많이 오를 것이고.
어쩌면, 내가 가진 35%의 지분이 35조를 넘어 50조가 될 수도 있었다.
“언론도 그렇고 이원재 박사의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CDMA의 장점을 어필해주십시오. 일본에서 TDMA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린다면, 더더욱 CDMA에 쏠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하, 회장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진호 회장은 잠실의 매물을 더 팔 생각이 없답니까?”
나는 신진호 회장의 소식에 관해 물으며 화제를 전환하였다.
“예. 지금도 경영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급매로 내놓았던 물건들도 다시 가져가고 있습니다.”
“아쉽군요. 이참에 잠실의 부동산을 더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 또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5공 비리 특별 위원회도 만들어진 상황인데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쌍호 그룹 회장이 검사와 말다툼을 벌였답니다.”
인정민 실장의 말에 나는 실소를 지었다.
“김종우 회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바뀐 것을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정권의 총애를 듬뿍 받았었는데, 불과 1년 사이에 정권의 철퇴를 맞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김종우 회장으로선 세상이 바뀐 것을 인정하기 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거다.’
쌍호 정유를 인수할 준비는 끝이 났다.
김종우 회장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 같으니, 쌍호 정유 인수는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이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