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181화 (181/300)

181화 퀄컴의 회장이 왜 왔지?

쌍호 그룹이라고 당연히 상황이 좋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샤롯 그룹보다 사정이 안 좋았는데, 일본에 나누어서 비자금을 관리하는 샤롯 그룹과 달리 한국에서만 오롯이 비자금을 관리하는 쌍호 그룹이었기에 더욱더 추적이 쉬웠다.

벌써 밝혀진 비자금 규모만 2백억에 가까울 정도.

규모가 워낙에 크기 때문에 쌍호 그룹을 전담으로 하는 수사팀을 40명으로 늘릴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벌금이 아무리 못해도 100억은 나오겠지?’

아마 역대 가장 큰 규모의 벌금이 등장하지 않을까 싶었다.

뭐, 쌍호 그룹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5공의 총애를 받던 다른 김씨들도 비슷하게 내겠지만 말이다.

‘이럴 때 무조건 하나는 가져와야 할 텐데, 어떤 계열사를 인수하는 게 좋을까?’

지금처럼 쌍호 그룹 전체가 흔들리고 있을 때가 기회였다.

만약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나비효과로 언제 올지 모를 IMF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고민인 것은 어떤 계열사를 가져올 것인지였다.

쌍호 그룹의 주력 사업은 시멘트, 제지를 비롯한 건설 사업 그리고 무역 사업이었다.

‘건설이나 상사나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아.’

이왕이면 앞으로 유망할 사업을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정유 사업 같은.

‘역시 쌍호 그룹에서 가져올 만한 것은 쌍호 정유 하나뿐이군.’

쌍호 정유.

나중에 H 오일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될 정유 회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수십 년 뒤의 미래까지 한국 4대 정유사로 자리를 잡는 기업이었으니, 실로 유망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정유 사업이란 게 원래부터 유망하기도 했고 말이다.

‘어차피 주가는 계속 내려갈 테니, 천천히 준비하면 되겠어.’

샤롯 호텔의 지분을 매집할 때는 보란 듯이 움직였었지만, 그거야 다른 노림수가 있어서였다.

이번에는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닌, 진실로 기업을 인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은밀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룹이 고림 그룹만큼 쪼그라들고 나면 그때 알겠지. 나에게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를.”

꼭 샤롯 그룹이나 쌍호 그룹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앞으로 나와 적대 관계를 가질 모든 그룹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 * *

한성에게 6백만 달러를 투자받은 퀄컴은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퀄컴은 겨우 7인이 설립한 벤처 기업이었다.

6백만 달러는 당연히 엄청난 규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군용으로 제한적으로만 활용하던 CDMA 기술을 전국 단위의 통신망으로 사용이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까지 개발했을 정도였다.

“이제 시연 준비는 다 끝난 건가?”

“완벽해. 우리의 시연을 보기만 한다면 업계의 누구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친구이자, MIT 동창생인 비터비 CTO의 말에 퀄컴 회장인 제이콥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퀄컴은 1985년, ‘품질이 좋은 통신을 만들어보자.’라는 모토로 시작된 기업이었다.

그리고 퀄컴에서 개발한 CDMA는 바로 이런 모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기술이었다.

통신 가능한 회선도 많고 확장성도 큰 데다 보안성까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광역 통신에 적용하는 기술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통사들이 CDMA 기술을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로 고려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업계는 CDMA 기술을 그저 이론으로만 완벽한, 상용화 불가능한 기술로 여기고 있었다.

‘이제 그런 소리 듣는 것도 끝이다.’

기술 시연 준비도 끝냈다고 하니, 퀄컴의 기술력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입증할 때였다.

하지만 그때, 비터비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기술 시연에 성공한다 해도 TIA에서 과연 CDMA가 기술 표준으로 인정할지야.”

비터비의 말에 제이콥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TIA가 TDMA 진영에 장악되어서 그런 것이겠지?”

“그 이유도 있지.”

TDMA는 CDMA보다 먼저 상용화되었기에 입지가 더 탄탄하였다.

더군다나 퀄컴은 아직까진 일개 벤처 기업에 불과하였으니, 영향력 차이도 클 수밖에 없었다.

미국 통신 산업협회는 당연히 TDMA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이통사들이 이미 TDMA 망 인프라를 깔아놓았다는 거야.”

이미 기업들은 TDMA 기술을 활용하여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당한 비용을 써가며 망 인프라를 깔아놨는데, 그것을 없애고 새로 CDMA 망을 구축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더 힘들어지겠군.”

“그렇겠지. TDMA가 더 확산한다면 기술이 좋고 나쁨을 떠나 상품화조차 할 수 없게 될 테니 말이야.”

오랫동안 준비했던 CDMA가 상용화도 하지 못하고 실패한다니.

그것만큼 최악의 결과는 또 없었다.

“그래도 기술 시연만 성공한다면 방법은 생기지 않을까? 어차피 업계 사람 치고, TDMA를 만족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없잖아?”

제이콥스의 말에 비터비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하였다.

“뭐, 그건 그렇지. TDMA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깔아봐야 성능 자체가 월등히 좋아지지 않으니 말이야.”

“어떻게든 기술 시연만 성공시켜봐. 그 뒤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까.”

퀄컴에서 따로 테스트해본 결과, TDMA와 CDMA의 성능 차이는 거의 다섯 배 이상이었다.

이통사들이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결국엔 CDMA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TDMA 진영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니, CDMA의 기술력을 인증받기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번 시연이 중요하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능을 보여준다면, 이통사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CDMA가 기술 표준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제이콥스. 기술 표준이 된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

비터비의 말처럼, 기술 표준이 되는 것에 성공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모든 제조사가 TDMA 기반 장비와 단말기를 만드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CDMA는?

어떤 기업에서도 CDMA의 장비와 휴대폰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통사가 CDMA 서비스를 시작한다 해도 그것을 받아줄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나도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는데, 비터비. 혜성 그룹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우리 기업 대주주가 혜성 그룹 회장이잖아.”

지분을 무려 30%나 보유하고 있는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

대주주다 보니, 퀄컴 내부에서도 그에 관한 관심이 상당하였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퀄컴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미국으로 잘 오지도 않았는데, 퀄컴 내부에서는 혜성 그룹 회장이 퀄컴의 존재를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추정 자산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자동차 회사부터 요즘 엄청난 매출을 올린다는 반도체 회사까지.

혜성 그룹이 소유한 회사 중, 굵직굵직한 자회사들만 뽑아도 퀄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더군다나 혜성 그룹 회장은 스티브 잡스가 사장으로 있는, 넥스트사의 대주주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게 설령 소문이라 해도 그의 자산은 천문학적일 것이고, 당연히 6백만 달러의 가치밖에 안 하는 퀄컴의 지분 30%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것이다.

“혜성 그룹에서 이번에 휴대폰을 만들고 있어.”

“휴대폰을? 반도체에 자동차까지 만든다더니, 기술력이 정말 대단한 회사네. 그런데 혜성 그룹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면 혜성 그룹에 CDMA 기반의 휴대폰을 만들라고 제안하려는 건가 보지?”

“정확히는 우리 휴대폰의 위탁 생산을 의뢰하려고.”

“우리 휴대폰? 퀄컴에서 휴대폰을 제조하겠다는 거야?”

“70년대에 있었던 비디오테이프 규격 싸움을 생각해봐. 마쓰시타의 VHS가 이긴 이유가 뭐겠어? 빠른 속도로 특허를 내고 관련 제품의 숫자가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TDMA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제품의 숫자로 압도해야 해.”

“하지만 우리는 휴대폰을 제조한 경험이 없어.”

“그러니 혜성 그룹에 의뢰해야지. 우리는 기술 개발에만 주력하고.”

“돈은? 위탁 생산이라 해도, 적지 않은 투자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 돈은 어디서 마련하려고?”

“그 돈 또한 혜성 그룹에서 가져와야지. 지분을 팔아서 말이야.”

“……!”

비터비는 눈을 부릅떴다.

안 그래도 혜성 그룹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지분이 적지 않았다.

퀄컴의 지분을 무려 30%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분을 더 넘기겠다니?

“지분을 얼마나 넘기려고?”

“5%. 딱 5%만 넘길 생각이야.”

설령 5%여도 결코 적다고 볼 수 없었다.

35%면 퀄컴의 회장인 제이콥스가 보유한 지분보다 많았다.

우호 지분을 생각하면 아직 안정권이지만, 최대 주주 자리를 넘긴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괜찮겠어?”

“지금 중요한 것은 TDMA와의 전쟁이야. 그리고 혜성 그룹 회장도, 한국에 있는 본인의 사업을 꾸리기에 바쁘지, 매출도 얼마 안 되는 우리 회사를 집어삼키려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런가?”

“사실 그보다 걱정인 것은 혜성 그룹 회장이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줄지 확실치 않다는 점이야.”

“혜성 그룹 회장의 손에 퀄컴의 운명이 달려있는 셈이로군.”

“예전에도 그랬지.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회사를 진즉에 포기했을 지도 모르니 말이야.”

제이콥스는 쓰게 웃으며 그 같이 중얼거렸다.

* * *

쌍호 정유 인수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은밀하게 지분을 매입하고 있었는데, 여러 계좌로 벌써 10%가 넘는 지분을 매입하였다.

물론 검찰 조사로 정신이 없는 김종우 회장은 내가 지분을 매입하는 것을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쌍호 정유를 인수할 준비를 하는데, 미국에서 손님이 왔다.

내가 대주주로 있는 퀄컴의 손님이었다.

‘제이콥스가 직접 오다니. 무언가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군.’

여태까지 조용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회장이 직접 찾아온 것을 보면, 그렇게밖에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윈 제이콥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나는 유창한 영어를 뽐내며 제이콥스에게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내가 대주주로 있는 퀄컴의 회장이라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제이콥스는 퀄컴의 회장이기 이전에 미 서부 최상위권 명문 종합 대학인, UCSD의 명망 높은 교수였다.

퀄컴의 미래까지 고려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기에, 나는 그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한성 회장님!”

“여기 앉으십시오.”

예상치 못한 내 환대에 기분 좋게 웃는 제이콥스에게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의례적인 덕담을 주고받았는데, 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인지, 제이콥스가 혜성 그룹의 최근 성과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앱설루트 광고는 자신도 봤다느니, 혜성 반도체의 시장 점유율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느니, 휴대폰 개발도 성공할 거라느니.

뭐 그런 덕담들이었다.

“저 역시 퀄컴의 성과에 대해 여기저기서 듣는 게 많습니다.”

내 말에 제이콥스가 크게 반색하였다.

“오, 정말입니까?”

“TIA에서 기술 시연까지 한다 들었는데, 저는 퀄컴이 이번에 큰 성과를 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대 회장님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이콥스는 그리 대답하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니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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