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우리가 그래도 국민기업이야
“양 회장님께서 마침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안 그래도 이한성 회장님의 고견을 듣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대로 부담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대통령에게 조언 같은 것을 해봐야 좋을 게 없는데.’
대선 때 조금 나선 것만으로도, 재계고 정계고 가릴 것 없이 뒷말이 무성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그때는 김영산 대통령이 일개 대선 후보였던 시절이니 참작의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도 여당의 중진 의원들이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지?’
김영산 대통령은 그 혼자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인데, 특히 여당에는 킹 메이커라 불리는, 이종석 의원이 존재하였다.
재계 인사인 내가 정도 이상으로 김영산 대통령과 가까워지고 있으니, 아마 그 킹 메이커라 불리는 이종석 의원도 나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석자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제가 고견이랄 게 있겠습니까? 양 회장이 저를 좋게 봐서 지나치게 과장된 평가를 한 겁니다.”
“이한성 회장님께서는 역시 겸손하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들은 게 있는데, 어찌 양 회장의 평가를 과장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잘하는 것은 사업이지, 정치 쪽은 아는 바가 크게 없습니다.”
“저는 그저 앞날을 내다보는 이 회장의 식견을 알고 싶은 것이지, 정치적인 조언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야말로 철벽 방어였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나의 조언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김영산 대통령의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큰 도움은 되지 않을 테지만, 대통령께서 원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이 회장과도 관련이 있는 통화 정책에 관해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은근한 압력이 들어오고 있는데, 혹시 원화가 절상되면 타격이 어느 정도일 거로 생각합니까?”
“미국에서 원화 절상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까?”
“예. 무역수지 적자 폭이 확대되고 있다는 명분으로 은근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제가 정권 초기라서 은근하게 압박을 하고 있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압박은 거세질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사의 말처럼, 이 시기 미국은,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군.’
미국의 언론에서는 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미국이란 나라가 몇 년째 거듭되고 있는 경상수지의 적자로 곧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보도하였다.
미국 정부에서 일본을 저리도 압박하는 것도 바로 이 적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시기의 적자는 미래의 적자와는 비교도 안 된단다.
애초에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흑자를 난 시기가 겨우 몇 년뿐이라나?
나머지는 다 적자가 났다는 것인데, 나중에는 한해 적자가 우리 돈으로 거의 천조에 가까워진다.
지금의 적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대통령님께서도 당연히 아실 테지만, 만약 환율이 7백 원대 중반까지만 떨어져도 우리나라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입니다.”
“흠, 혜성 그룹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무래도 저희 혜성 그룹 역시 수출주도형 기업이기 때문에 환율이 떨어진다면 크게 타격을 입기는 할 겁니다. 저희가 하루에 만 달러씩 수출하고 있는데, 환율이 1원만 떨어져도 앉아서 하루에 1억 이상의 피해를 보는 셈입니다.”
“1원이 떨어져도 하루에 1억이라니. 기업들을 위해서라도 결국, 미국의 압력은 최대한 무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기대 어린 그의 눈빛을 보니,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미국 정부를 상대로 내가 무슨 조언을 해주길 바라는 거야?’
나를 도대체 얼마나 높게 평가하기에 이 정도의 기대를 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도 나비효과로 미래가 얼마나 달라질지 몰라서, 내 사업 꾸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 말이다.
“이한성 회장님께서도, 제가 얼마 전에 550억 불의 수출 계획을 발표한 것을 아실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민주화가 된다면 자유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배는 곪게 될 것이라고.”
“군부 지지자들의 헛된 생각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원화가 절상한다면 그들의 생각을 동의하는 국민이 급속도로 늘어날 겁니다. 임금도 많이 오르는 중이라서, 기업들이 힘들어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예, 미래 그룹도 그렇고, 제조업에 강했던 기업들이 특히 힘들어하는 상황입니다.”
뭐, 이번 원화 절상 문제가 민주화 정권의 시험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5공 때 워낙에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에, 경제가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5공을 그리워하는 국민이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리라.
물론 5공 때 경제가 성장했던 것은 5공의 공이라기보다는 3저 호황이라는 시기를 잘 맞은 덕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나와 연관이 아예 없는 문제가 아니었군.’
정치 문제야 정치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하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일단 원화가 절상하면 수출기업이 타격을 받는 것도 타격을 받는 거지만, 김영산 대통령의 말처럼 자칫 정권이 바뀔 수도 있었다.
5년 뒤에 정권이 바뀌어봐야 얼마나 위협이 되겠나 싶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김태중 선생이 차기 대통령이 되는 게 혜성 그룹에 이로웠다.
“그러니, 부디 이한성 회장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이한성 회장님께서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은 원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김영산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나도 뭔가 조언이란 것을 해줘야 할 거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원화 절상과 임금 인상 문제로 비롯된 경제 위기를 해소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우리나라 산업 구조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개편하는 겁니다.”
“고부가가치 산업이라.”
나는 김영산 대통령도 뻔히 알만한 원론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자 김영산 대통령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경제학자들이 숱하게 했던 주장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이게 정답이다.’
실제로 노사가 이야기해준 미래의 대한민국은 산업 구조를 성공적으로 개편하여 경제 대국이 된다.
지금 시점에 고부가가치 산업의 투자를 늘린다면 미래의 대한민국은 더더욱 경제 강국이 될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를 더더욱 늘려야겠습니다.”
“예. 반도체 산업뿐만이 아니라, 자동차와 컴퓨터, 가전 그리고 휴대폰 등, 여러 분야를 육성하면 좋을 듯합니다.”
“어째, 혜성 그룹에서 하고 있는 사업만 추천하시는 거 같습니다.”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그저, 유망한 사업이라 생각하는 것을 말씀드린 거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혜성 그룹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정부의 지원 없이 첨단 산업을 키워 오신 거 아닙니까?”
“저만 그렇겠습니까. 그리고 반도체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일본의 상황을 잘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할 수 있을 겁니다.”
“일본의 상황이라면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미국 지도층은 몇 년 전부터 일본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도체 분야에서 특히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를 잘 활용해서 미국의 반도체를 한국에서 생산하게 유도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10배가 넘는 생산 단가를 생각하면 미국 기업들도 우리를 긍정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나먼 미래에, TMSC가 일성 전자보다 시가총액이 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 반도체를 견제하려는 미국 정부의 움직임이 TMSC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실제로 퀄컴처럼 정부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기업은 미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TMSC에 위탁 생산을 맡겼다.
‘근데 지금의 퀄컴은 정부 입김보다 내 입김이 더 통하는 기업이 됐지.’
정부에서 도와주고, 내가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동현 반도체가 대만의 TMSC를 대체하는 게 정말 가능할 거 같았다.
물론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얼마나 내 의도대로 움직여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훌륭한 조언 감사합니다. 확실히, 이한성 회장님 말씀처럼 지금은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할 때인 거 같습니다.”
“별로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언제든 조언을 해주십시오. 이한성 회장의 조언은 늘 경청하겠습니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내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짓던 김영산 대통령이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한성 회장님.”
“예, 말씀하십시오.”
“양희수 회장님도 마침 계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5공 청문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곧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있을 겁니다.”
“세, 세무조사 말씀입니까?”
우리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엿듣던 양희수 회장은 김영산 대통령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크게 소리 내시면 다른 분들이 들으실 수도 있으니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죄송합니다.”
김영산 대통령은 침착하게 양희수 회장을 타이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대대적인 세무조사라고 말했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히 비위가 확실한 재벌 위주로 세무조사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까.”
양희수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세계 그룹도 따지고 보면 비리를 안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5공에 뇌물을 건네준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대선 때 여당에 상당한 금액의 선거 자금을 지원해준 적도 있었고.
하지만 다른 재벌에 비해 죄가 약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안심해도 좋았다.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 같은 자들이 마침내 법의 심판을 받겠구나.’
나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어쩌면 미래 그룹도 이번에 큰 피해를 볼 수도 있겠어.’
김영산 대통령의 미움을 샀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볼 것이다.
또 미래 그룹은 재계 1위였었던 탓에 뇌물을 많이 바쳤기도 했고 말이다.
“다만 두 분께, 한 가지 경고할 게 있습니다.”
방심하던 나는 김영산 대통령의 입에서 경고라는 말이 나오자 다시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두 분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정계에서는 이미 두 분을 저의 사람으로 구분을 지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두 분께 당부드리겠습니다. 5공 때 그러했듯, 깨끗하게 회사를 경영해 주십시오. 만약 티끌만큼이라도 오점이 생긴다면 제 정적들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이건 경고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를 위한 조언이기도 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일을 사전에 경고해준 셈이니 말이다.
‘나에겐 크게 의미가 없는 경고로군.’
혜성 그룹이라고 아예 오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재계 10위권 기업들 사이에서는 가장 깨끗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정치에 관여하는 것도 오점으로 본다면 경고를 귀담아듣기는 해야겠어.’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김영산 대통령이 왕주형 회장에게 호통을 쳤던 아까의 일을 생각해보면 나도 방심해서만은 안 될 거 같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 역시 혜성 그룹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총선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었으니 말이다.
* * *
“결국, 정부의 보복이 시작되었군요.”
신문을 덮으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진봉현 비서실장이 우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그룹에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재벌을 향한 여론이 심상치가 않은데 괜찮겠습니까?”
5월에 있었던 만찬회 때 김영산 대통령이 직접 예고했던 대로, 미래 그룹과 5공의 총애를 받았던 기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조치가 시작되었다.
국민들은 이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지지율로 보답하고 있었다.
아마 당분간은 정부에서 재벌들을 상대로 열심히 칼춤을 출 거 같았다.
“국민 기업으로 평가받는 혜성 그룹을 공격하기보다는, 국민들의 미움을 사는 기업들부터 먼저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차례가 계속 진행된다면 우리에게까지 순서가 올 수도 있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가만히 있어도 언론에서 ‘경제 위기!’를 들먹이며 정부를 대신 압박해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