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나는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
대통령이 직접 부르는 데 참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흔쾌히 참석 의사를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요.”
-그럼 5월 28일에 뵙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영태 비서실장과의 대화가 끝나자 나는 침음을 흘렸다.
‘과연 무엇을 요구할까?’
김영산 대통령과 관계가 좋긴 해도, 청와대라는 곳은 절대 친숙해질 수가 없는 장소였다.
워낙 5공에 당한 것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기도 했다.
‘올림픽이 다가온다고 너무 무리한 요구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괜스레 불안하였다.
김영산 대통령은 천생 정치인이다 보니, 88 올림픽 같은 대형 스포츠 행사에서 오히려 5공보다 과도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양희수 회장이 잠실의 사옥으로 찾아왔다.
“이 회장! 이 회장에게도 청와대의 전화가 왔나?”
“청와대 초청 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5월 말에 다 같이 부르는 그 건 말일세.”
이번 정권 들어서 처음으로 개최된 재벌 총수 만찬회였다.
5공에게 유독 당한 것이 많은 양희수 회장으로선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긴장하실 게 있겠습니까? 긴장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쌍호 그룹의 김종우 회장이나 샤롯 그룹의 신진호 회장 같은 사람입니다.”
나는 양희수 회장에게 별일 아니라는 양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청와대에서 정확히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불렀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대통령과 친하다고 알려졌는데, 이런 사소한 정보조차 모른다고 하면 괜히 뒷말이 오고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네만, 정치인이 괜히 정치인이겠나? 자네도 정치인들이 우리 재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잖아.”
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빅 4의 재벌 총수들이야 그나마 덜하기는 해도 사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이 재벌을 무시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은 시장의 권력이 국가의 권력에 미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물론 올림픽 같은 중대한 국가사업에는 우리 재벌들의 희생이 일부 따르기는 할 겁니다.”
“역시 이 회장도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5공처럼 과도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5공의 경우, 86 아시안 게임 때, 각 재벌 그룹마다 수십억씩 비자금을 뜯어갔었다.
김종우 회장의 경우는 자발적으로 50억을 바치기도 했었고.
하지만 6공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5공보다 국민의 눈치를 보는 정부였으니, 그렇게 대놓고 거액의 뇌물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뜯어도 5공의 총애를 받던 3김의 비자금을 뜯어가겠지.’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희수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조금 안심이 되는군.”
“정권이 바뀌었으니, 정부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재벌 총수인 양희수 회장이, 겨우 만찬회에 참석하는 것에 겁을 먹는 모습이 뭔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재벌들한테 있어서 청와대는 아직,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거 같았다.
“그런데 기현이는 후계자 수업을 착실하게 받고 있습니까?”
나는 화제를 전환할 겸, 내 친한 동생인 양기현을 언급하였다.
그러자 양희수 회장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아직은 후계자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네. 그래도 능력이 제법 좋은 것인지, 임원들 사이에서 호평이 자자하긴 해.”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기현이 정도 되는 인재라면 공성은 몰라도 수성은 확실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내 말에 양희수 회장이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양기현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양희수 회장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달라 보였다.
한눈에 봐도 양기현을 후계자처럼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예상했던 대로, 세계 그룹의 차기 회장은 양기현이 될 거 같군.’
양기현이 차기 회장이 된다면, 재계 9위의 세계 그룹이 더욱더 든든한 동맹이 되는 셈이니 나로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 * *
5월 28일.
나는 늦지 않게 청와대로 출발하였다.
‘역시 정권 초기라서 그런가? 누구보다 엉덩이가 무거웠던 재벌 총수들도 빠짐없이 자리에 참석해 있군.’
조금만 늦었으면 가장 늦게 도착할 뻔했다.
그만큼 재벌 총수들은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만찬회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이한성 회장님, 여기 앉아주십시오.”
“여기요?”
“연령을 고려하여 자리를 배치하였으니, 자리 배치에 너무 연연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의전을 담당하는 비서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자리 배치만 봐도 5공과는 달라 보였다.
뇌물을 얼마나 많이 바쳤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연령 순서대로 자리가 배치되었던 것이다.
‘나는 거의 끝자락이군.’
빅 4의 재벌 총수답지 않게 푸대접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자리가 멀수록 내가 주목받을 일도 줄어들 테니 말이다.
“이한성 회장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바로 옆자리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개를 돌리니, 도레미 그룹 정성원 회장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군.’
그는 늘 그랬듯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다고 무시할 법도 한데,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나를 철저하게 예우해 주었다.
단순히 재계 순위가 높아서 그렇다기보다는, 내 능력을 그만큼 높이 평가하는 거 같았다.
“예, 정성원 회장님. 반갑습니다.”
“이렇게 청와대에 오게 되니, 다시금 이한성 회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감사 인사라니요?”
“회장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대선 때 엄한 선택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를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말한 엄한 선택이란, 김영산 대통령이 아닌,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선택을 말한다.
‘하긴, 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당당한 태도로 여기에 앉아있지도 못했겠지.’
실제로 옆옆 자리에 앉아있는 김종우 회장의 얼굴만 봐도 긴장감이 극에 달해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근처에 내가 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니면 일부로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지.’
내가 속으로 피식 웃는데 양희수 회장과 권오중 회장, 구자성 회장 등, 나와 친분이 있는 재벌 총수 몇몇이 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표정 역시도 김종우 회장과 대조되어 있었다.
대선 때 나를 따라 김영산 대통령을 지원하였으니, 그들의 표정이 밝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 회장의 표정도 볼만하군.’
미래 그룹의 왕주형 회장은 무엇이 그리 불편한지 인상을 와락 찌푸리고 있었다.
재계 1위의 미래 그룹 회장인 그도 대통령과의 만남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대통령님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대통령이 입장한다는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왕주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박수를 쳤다.
짝짝짝!
재벌 총수들이 왕주형 회장을 따라서 손뼉 치니 마침내 김영산 대통령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하하, 박수로 저를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산 대통령은 흐뭇하게 웃더니, 상석에 앉았다.
“모두 앉아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다들, 귀찮을 텐데도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가 그리 말하자, 여기저기서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대통령님!’, ‘만찬회에 참석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같은 호응이 뒤따랐다.
‘본인들의 회사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앞에서는 아첨꾼처럼 구는군.’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국익에 막대한 기여를 한다 해도 재벌 총수의 현주소가 겨우 이 정도라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88 올림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벌 총수들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정부에서 어떤 요구를 할지 모르는 상태였으니, 그들이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저희 문민정부는 이전의 군사 정부였던 5공과는 전혀 다릅니다. 올림픽과 관련해서 성금을 요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나는 속으로 감탄하였다.
성금을 요구하지 않겠다니.
이건 또 의외의 발언이었다.
‘규모를 줄이긴 해도 뇌물을 받기는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됐건, 재벌 총수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불필요한, 그것도 힘들게 모은 비자금 지출을 줄이는 일이니 말이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스포츠 단체를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스포츠에 대한 지원을 늘릴 생각이었습니다.”
“저희 미래 그룹도 인기 종목, 비인기 종목을 가리지 않고 지원을 늘리겠습니다.”
뇌물을 바치지 않는 것으로도 감지덕지라고 느껴서일까?
재벌 총수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올림픽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을 때, 김영산 대통령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한 가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김영산 대통령은 왕주형 회장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경제계는 경제계만의 영역이 있고, 정치계는 정치계만의 영역이 있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총선 과정을 지켜보니 몇몇 분들이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
왕주형 회장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통령이 총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일을 두고 경고하고 있으니,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다.
‘역시 김영산 대통령이군. 나도 앞으로는 주의해야겠어.’
재벌 총수를 모아놓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경고를 하다니.
민주화 운동가라고 무시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군부 출신이었던 전 대통령보다 무섭게 여겨지는 김영산 대통령이었으니 말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부디 여러분께서는 각자의 위치를 잘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통령님.”
우리가 명심하겠노라 대답하니, 왕주형 회장도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제아무리 미래 그룹의 기세가 대단해도, 감히 대통령의 말을 정면에서 거역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근시일 내에 미래 그룹에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실시 될 거 같군.’
김영산 대통령의 성격상 단순히 경고로 끝내지는 않을 거 같았다.
아마 쌍호 그룹, 샤롯 그룹과 함께 본보기를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5공 청문회가 열릴 시기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 * *
대통령과의 대화가 끝이 나고, 테이블을 잡아서 식사하는데 김영산 대통령이 내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보다 먼저 김영산 대통령을 발견한 양희수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통령님.”
“아, 편하게 앉아 계세요. 같이 식사하려는 거뿐입니다.”
“대통령님과 함께 식사하다니,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한국 재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두 분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하하.”
사람 좋게 웃는 김영산 대통령의 모습에 양희수 회장은 안심한 얼굴로 다시 식사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영산 대통령이 그저 식사만 하려고 내 옆자리에 앉은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분위기가 너무 무겁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모처럼 재벌 총수들과 모인 자리에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아닙니다. 저야 이렇게 대통령님과 식사도 할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정말 친한 사이처럼 보입니다.”
“제가 이 회장을 사위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위요? 하하. 그 이야기를 JS 그룹 앞에서 한다면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거 같습니다.”
“재계에서는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라, 민망할 것도 없을 겁니다. 사실 저는 사위처럼 생각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회장을 스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계 그룹 회장이신 양희수 회장님께서 이한성 회장을 스승처럼 생각하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이 친구가 워낙에 감각이 좋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은 거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업적으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내가 언제 양희수 회장에게 가르침을 내려줬단 말인가.
‘김영산 대통령이 괜한 오해를 할까 걱정이 되는군.’
이전부터 나를 높게 평가하던 김영산 대통령인데 양희수 회장의 말을 듣고 과대평가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