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프리미엄 시장이 만만해 보여?
“빌어먹을!”
쾅!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도요타 데쓰로는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혜성 자동차의 광고도 그렇고, 그 광고가 저렇게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렉서스였다.
앱설루트의 신차 모델이 저리 성공했으니, 컨셉이 같은 렉서스의 성공은 더욱 요원해졌다고 봐야 했다.
‘광고까지 새로 준비해야 하잖아!’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렉서스의 성공을 확신했는데 지금은 그저 막막한 심정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출시를 미룰 수도 없었다.
이미 생산 준비도 끝내 놨고, 미국 딜러사들과 계약까지 끝낸 상태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출시는 미룰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 회장, 이놈은 도대체 뭔데 나의 앞길을 이렇게도 방해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엠파이어 빌딩 건으로 탐탁지 않게 느껴지는 상대였다.
그런데 앱설루트의 신차 모델이 저리 성공하기까지 하니, 더욱더 거슬리게 느껴졌다.
‘어찌해야 할까?’
당장에라도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은 그리 만만한 기업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한국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깎아내릴 수 있는 기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단 렉서스 출시부터 성공시키고 그 이후에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어.”
아직 렉서스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우선 렉서스를 성공적으로 출시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샤롯 그룹 같은, 한국에서 협력해줄 기업을 찾아 혜성 그룹을 견제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 * *
앱설루트의 성과는 국내 1위 자동차 업체인 미래 자동차를 격동케 하였다.
“작년에,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앱설루트 성과를 칭찬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비웃음이 나왔거든? 매출도 고만고만한데 무슨 엄청난 일을 했다는 식으로 극찬을 해댔으니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극찬을 들을 수밖에 없겠더라.”
“광고부터가 일단 감탄밖에 안 나오더군!”
“그니까. 그 광고 보고 미국인들도 열광했다잖아. 이한성 회장은 도대체 그 광고를 어떻게 기획했을까.”
“혜성 자동차가 경쟁 업체긴 해도 진짜 대단하지 않냐? 일본에서도 미국의 고급차 시장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데, 혜성 자동차는 단번에 성공한 거나 다름없잖아?”
“맞아. 나도 사실 혜성 자동차의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긴 해. 적어도 미국인에게만큼은 볼보, 벤츠와 같은 급으로 인정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뭐, 근데 지금까지야 일본에서 성과가 없었다지만, 이번에 렉서스 출시했으니 어떻게 될지 몰라. 렉서스를 준비한 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도요타잖아?”
“도요타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어? 광고 보니까 허접하기 그지없더라. 앱설루트와 상대도 안 될걸?”
“근데 성능이나 디자인 그리고 가격을 보면 나라도 안 살 수가 없을 거 같더라. 어떤 차와 비교해도 앱설루트가 더 낫잖아?”
미래 자동차는 언제나 세계를 바라본다.
그들이 경쟁의식을 느끼는 기업들도 한국의 기화 자동차나, 정우 자동차가 아닌, 일본이나 독일 등의 자동차 메이커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의 기업, 그것도 거의 신진 기업에 가까운 혜성 자동차에 경쟁의식을 느꼈다.
그만큼 앱설루트 RA가 보여준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펙의 판매고가 크게 줄었군.”
왕주형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비록 미국에서야 저렴한 싸구려 자동차로 알려졌지만, 국내에서만큼은 고급차로 인정을 받는 게 이펙이었다.
그런데 앱설루트 RA의 출시 이후로 이펙의 판매량이 대폭 하락하였다.
국내 소비자들이 외국에서도 고급차로 인정받는 앱설루트 RA를 선택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아무래도 앱설루트가 미국에서 성공한 게 국내에도 영향을 크게 끼친 거 같습니다.”
“이러면 국내 럭셔리 시장도 혜성이 집어삼킨 것이나 다름없는 건가?”
혜성 자동차의 기세가 실로 무서웠다.
작년에 처음으로 승용차 부문에 도전했던 혜성 자동차인데, 적어도 럭셔리 시장에서만큼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점유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2.28 조치가 없었으면 오히려 상당 부분을 혜성 그룹에 내줘야 했을지도 모르겠어.’
최악의 조치라고 알려진 2.28 조치.
이 조치로 미래 그룹은 무려 수백억 원의 손해를 봤다.
사실상 미래 자동차가 독점하게 된 승용차 부문을 제외하면 특장차 등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2.28 조치가 아니었으면 미래 자동차의 손해는 이보다 컸을 것이다.
승용차뿐만이 아니라 특장차 등 다른 부문에서도 혜성 자동차의 거센 추격을 받아야 했을 것이니 말이다.
‘4월에 있었던 총선도 혜성의 방해를 받아 제대로 성과를 낸 적이 없었지. 여러모로 혜성은 난적이야.’
혜성 그룹은 단순히 사업에서만 미래 그룹과 부딪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 여러 분야에서 충돌하고 있었는데, 왕주형 회장은 이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 재계 1위를 내주는 것을 넘어, 혜성 그룹의 기세에 완전히 짓눌려 살아야 할 거 같다는 위기감이었다.
어쩌면 일성 그룹처럼 그룹 전체가 여러 개로 쪼개질 수도 있었고 말이다.
“임자, 우리가 이대로 당하고 있어야 하나?”
“혜성의 기세가 무서운데, 방법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해야겠어.”
“음, 일본에서도 실패한 일인데…….”
미래 자동차 사장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왕주형 회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임자, 해봤어?”
“……아닙니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실패를 운운해?”
“죄송합니다!”
“혜성 그룹도 성공한 일이야. 우리 미래 자동차도 할 수 있으니, 한번 추진해 봐.”
“예, 알겠습니다.”
왕주형 회장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프리미엄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미국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어떤지 뻔히 아는데 무모한 도전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혜성 그룹에서 보여준 성과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가능성이란 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렉서스는 뭐 때문인지 형편없는 광고를 써먹어서 실패했지만, 우리 미래 자동차는 다를 거다.’
미래 그룹도 광고 기획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실제로 이펙 역시도 광고 하나로 미국에서의 인지도가 크게 올랐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도 연달아 실패하는 미국의 프리미엄 시장도 그리 두렵지 않았다.
* * *
<앱설루트, 혁신적인 광고로 주문량 폭주!>
<혜성 자동차, 미래 자동차의 아성에 도전하나?>
<61,544대의 생산 차질로 3,176억 원의 손실을 떠안은 미래 자동차와 미국에서 한 달 만에 3,2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혜성 자동차!>
앱설루트 신차 모델의 성공으로 언론이 떠들썩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만에 무려 3천억의 매출을 올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올해는 혜성 자동차에서만 3조 매출을 올리는 것도 가능하겠어.’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 같은 생각을 하였다.
3조.
재작년까지만 해도 그룹 전체의 매출을 다 합해도 3조가 안 됐었는데, 불과 2년 만에 계열사 한 곳에서 3조의 매출을 거두는 상황이 되었다.
‘혜성 반도체의 매출도 상당할 텐데, 올해 그룹 총 매출은 기대해봐도 좋겠어.’
5월인 지금까지 이미 1조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혜성 반도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도체의 가격도 오를 것이니, 어쩌면 혜성 자동차에 버금가는 매출을 기대해 봐도 좋을 거 같았다.
똑똑.
“회장님, 권오중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읽고 있던 신문을 덮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 회장, 정말 대단해! 앱설루트 RA가 성공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이야!”
권오중 회장은 대뜸 미국에서의 성과를 칭찬하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역시 미국 프리미엄 시장을 포기한 것은 최고의 판단이 아니었나 싶어. 아암! 이 회장이 있는데 어떻게 고급차 시장에 도전하나?”
“뭐, 그것은 확실히 판단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뭔가 얄밉기는 한데, 부정할 수가 없어서 아쉽군.”
“프리미엄 시장에 도전했으면 괜히 렉서스 꼴이 났을 겁니다.”
“렉서스라. 그러고 보니, 렉서스는 어떻게 될 거 같은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렉서스의 미래야 나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광고로 보나 실제 매출로 보나 아직은 그리 위협이 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였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우리 앱설루트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흐흐, 그 유명한 도요타도 결국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참패를 경험하는 셈이로군. 이런 거 보면 프리미엄 시장이 확실히 만만한 시장은 아닌 거 같아.”
“대중차라고 어디 쉽겠습니까? 이번에는 솔직히 광고가 잘 뽑힌 것이 성공의 요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 그 광고 나도 봤는데, 기가 막히더군. 그런데 내가 알아보니까, 그 광고를 기획한 사람이 이 회장, 자네라던데 그게 사실인가?”
“마케팅 부서에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던져줬을 뿐입니다.”
내 말에 권오중 회장이 크게 감탄하였다.
“이 회장의 한계는 정말이지 끝이 없는 거 같아. 아니, 어떻게 광고 기획까지 그렇게 기가 막히게 할 수 있나?”
“과찬이십니다.”
“혜성 전자의 광고들도 이 회장이 관여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 이 회장은 한국 최고의 경영인이 아닌지 모르겠어.”
“오늘따라 칭찬이 과하십니다.”
“그만큼 감탄했다는 거야. 내 칭찬이 듣기 좋았으면 나중에 우리 그룹의 광고도 좀 기획해 주게. 이 회장이 기획한 광고를 보면 우리 직원들이 그렇게 무능해 보일 수가 없어.”
괜히 나 때문에 엄한 직원들이 욕먹게 생겼다.
내가 속으로 피식 웃는데 권오중 회장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왕 회장, 그 양반도 프리미엄 시장에 도전할 거라는데, 이 회장이 있는 한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겠어.”
“미래 자동차에서도 미국 프리미엄 시장에 도전한답니까?”
“그렇다더군. 우리 임원들이 그래서 우리도 미국 프리미엄 시장에 도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들이 많아. 혜성 자동차가 이쪽 업계에 이런저런 영향을 끼친 셈이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렉서스도 원래 역사보다 일찍 출시된 거 같은데, 미래 자동차도 앱설루트의 성공을 보고서 프리미엄 시장에 조금 더 일찍 도전하려는 거 같았다.
‘여기저기서 나비효과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군.’
물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렉서스도 실패한 상황에서, 미래 자동차라고 큰 성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요타보다도 이미지가 안 좋았으니, 더더욱 실패할 가능성이 클 터.
아마 손해만 잔뜩 보고서 다시 대중차 사업에만 집중하지 않을까 싶었다.
“미래 자동차가 엄한 곳에 시선을 돌릴 때 정우 자동차가 치고 올라가면 대중차 시장은 정우 자동차가 꽉 쥐게 될 거 같습니다.”
“하하하, 역시 이 회장의 생각도 나와 같군! 비록 고급차 시장은 이 회장에게 내줘야겠지만, 대중차 시장만큼은 우리 정우가 가져갈 걸세!”
그래 주면 나야 고맙다.
물론 대중차 시장도 나중에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면 우리가 가져갈 테지만 말이다.
‘애초에 정우 그룹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군.’
팬더 사를 인수한 것만 보면 알 수 있듯, 권오중 회장은 무척이나 공격적인 사업을 펼치는 기업가였다.
그나마 미국의 프리미엄 시장에 도전하지 않았으니 손해는 줄어들 테지만, 그의 사업 방식을 생각하면 언젠가 큰 곤욕을 치를 게 분명해 보였다.
‘이왕이면 정우 그룹의 핵심 계열사들도 인수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