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내 자산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야
“대양 상선이 혜성 그룹의 계열사가 되었으니, 사실상 국내 최대 해운 선사를 표방해도 무리가 아니겠습니다.”
양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양 상선의 적재 톤 수만 364만 톤이었다.
그야말로 국적선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해운 선사였으니, 혜성 그룹이 해운 선사 쪽으로는 국내 1위라고 불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정말 해운업의 불황이 끝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
사실 노사의 강요가 아니었어도 대양 상선은 인수할 가치가 충분한 기업이었다.
중고선 가격이 작년과 비교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만 봐도 해운 시장이 요동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년만 되도 300억이 싸게 느껴질 거야.”
“오, 그 정도입니까?”
“심지어 정부에서 부채까지 탕감해 줬잖아? 어쩌면 올해부터 흑자가 날 수도 있어. 그것도 수백억 수준의 흑자 말이지.”
작년 대양 상선의 운임 수익은 모두 합해서 4억 2천만 달러.
원리금 상환 등의 금융비용이 천억이나 되어서 적자가 났지만, 순수한 영업이익은 3백억이었다.
정부의 지원으로 부채가 크게 줄어들었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내버려만 둬도 흑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세계 그룹의 입장에서는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겠습니다.”
“왜?”
“회장님께 세계 상선을 매각하였지 않습니까? 흐흐. 해운 시장에 호황기가 찾아온다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 같습니다.”
“아쉬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어차피 불황을 감당하지 못해서 매각한 거뿐이니 말이야.”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 회장님이 세계 상선을 값싸게 매각해 주긴 했었지.’
뭐 대양 상선을 3백억에 인수한 시점에서 그리 싸다고만 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경영권 프리미엄을 생각하면 값싸게 인수한 건 사실이다.
세계 상선도 규모로 치면 국내에서 손꼽히는데 겨우 2백억에 인수했었으니 말이다.
‘요즘 자주 뵙질 않았는데 근시일 내에 직접 찾아봬서 인사를 드려야겠어.’
전화로 은근하게 서운함을 표시하는 양 회장이었다.
JS 그룹에 사업적인 조언을 해줬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를 사위로 두지 못한 것을 거의 한탄하듯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양 회장에게 받은 도움이 많으니, 세계 그룹에도 한 번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그나저나 재계의 반응이 꽤 떠들썩합니다.”
“재계의 반응?”
“예. 요즘 재벌들이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우리 혜성 그룹 이야기뿐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왜, 미래 그룹에서 먼저 대양 상선을 인수하겠다고 점찍었지 않았습니까?”
“글쎄. 우리도 같은 시기에 대양 상선을 인수하기로 했었으니 시기 자체는 거의 동일하지.”
“어쨌든, 재벌들은 미래 그룹이 먼저 점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대양 상선을 가져간 것은 혜성 그룹이니 말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그래?”
하긴, 이번 일은 재계에서야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을 거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미래 그룹의 왕 회장이 직접 대양 상선을 인수하겠다고 선포했던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일성이나, 다른 대기업에서도 대양 상선을 일찌감치 포기했을 정도였는데, 뜬금없이 미래 그룹이 대양 상선을 포기하고 혜성 그룹에서 인수한다고 하니 뒷말이 없을 수가 없었다.
“혜성 그룹이 5공의 총애를 받던 3김처럼 6공의 총애를 받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총애라.”
피식.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항상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으면 핍박을 받았지, 특혜 하나 받은 적이 없었던 혜성 그룹인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뭐 그렇다고 특혜를 받을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대양 상선 건도 사실 특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미래 그룹을 물리쳐준 것은 특혜가 맞았지만, 부채 탕감이나 그 외에 이런저런 금융 지원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지원이었다.
적자만 수백억짜리의 법정 관리 회사였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딱 이 정도의 관계만 유지되었으면 좋겠는데.’
정부와의 관계는 딱 지금과 같은 관계가 좋았다.
서로 우호적이면서 어느 쪽에서도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는 그런 관계.
“다른 건 몰라도 대통령님이 나를 좋게 보시는 건 확실하지.”
“대통령님의 환심을 얻었다면, 미래 그룹의 후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몇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몇 년 뒤에는 혜성 그룹의 체급이 미래 그룹을 능가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미래 그룹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똑똑!
“회장님, 도요타 자동직기의 도요타 데쓰로 전무이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양준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다름이 아니라, 대통령 취임식 때 봤던 도요타 데쓰로였다.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네요. 도요타의 전무이사 정도 되는 사람이 우리 그룹의 사옥을 다 찾아오다니.”
“그만큼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는 거겠지.”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물건이란 엠파이어 빌딩을 말했다.
‘과연 얼마를 부르려나.’
내가 원하는 가격은 6천억 엔이었다.
도요타 데쓰로가 6천억 엔을 부른다면 아무리 도요타가 싫어도 거래 자체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과연 도요타에서 그렇게 통 크게 쓸지 의문이었다.
‘일단 만나봐야 알겠지.’
나는 고민을 멈추고 이소희에게 말했다.
“올라오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예,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면서 봤는데, 사옥이 참 멋있습니다. 크기도 큰 것이, 한국을 대표하는 빌딩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도요타 데쓰로의 말에 나는 속으로 자부심을 느꼈다.
혜성 건설에서 사운을 걸고 만든 혜성 그룹의 사옥은 실로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잠실에서는 비교할 만한 건물 자체가 없을 정도였다.
서울 전체를 보더라도 여의도 63빌딩 정도만이 비교 대상이었다.
그만큼 혜성 그룹 사옥은 현대적이면서 규모가 큰 건물로 주목받고 있었다.
‘노사는 무식하게 우람하기만 하다며 불평했지만, 이 정도면 전 세계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빌딩이지.’
내가 속으로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는데, 도요타 데쓰로가 초를 치는 말을 하였다.
“건물 디자인이 약간 도쿄 긴자의 빌딩들과 유사한데, 혹시 시공사가 일본 회사입니까?”
디자인이 일본의 것과 유사하다니.
마치 디자인을 표절했다는 식으로 말하니 좋았던 기분도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전에도 느꼈지만,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죄송하지만, 우리 계열사에서 시공한 건물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시공 능력도 그리 좋다니, 혜성 그룹은 여러 분야에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역시 엠파이어 빌딩을 인수하고 싶어서입니까?”
“혜성 그룹에 대해 몇 마디 더 나눠보고 싶었는데, 본론을 물으시니 어쩔 수 없군요. 예, 맞습니다. 엠파이어 빌딩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저는 당분간 엠파이어 빌딩을 매각할 생각이 없습니다.”
“음, 한국에서 크게 사업하시는 회장님께서 구태여 다른 나라의 부동산을 오래 가지고 계실 필요가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사업하는 것보다 일본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게 수익률은 더 낫습니다. 도쿄의 땅값이 워낙에 가파르게 올라서 말입니다.”
내 말에 도요타 데쓰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또한, 지금의 일본 부동산이 얼마나 미쳐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 내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을 거다.
“물론 도요타에서 제가 원하는 금액을 불러주신다면, 구태여 엠파이어 빌딩에 집착할 생각은 없습니다.”
도요타야 엠파이어 빌딩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고자 나에게 인수를 제안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달랐다.
원하는 돈만 벌 수 있다면 엠파이어 빌딩을 계속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6천억 엔을 원합니다.”
“……!”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원하는 금액을 불렀다.
솔직히 이보다 가격이 낮아도 팔 의향은 있었지만, 일단 세게 불러서 합의점을 맞출 생각이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무슨 문제 있습니까?”
“6천억 엔이라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전에 회장님도 현재 시세가 3천억 엔이라고 하셨는데, 어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요타 데쓰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리 말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현재 시세는 3천억 엔이어도 내년의 시세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참고로 제가 2년 전에 엠파이어 빌딩을 인수할 때 엠파이어 빌딩의 시세는 1천억 엔에 불과했습니다.”
2년 만에 3배가 올랐는데, 1년 뒤에는 가격이 얼마나 뛸지 누가 알겠는가?
물론 버블이 끝나면 오히려 시세가 확 내려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버블 붕괴가 올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한도는 3천5백억 엔입니다.”
“3천5백억 엔이 한도라면 더 나눌 이야기가 없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다니요. 합의점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서 거래를 안 하겠다는데, 제가 잘못이라도 했다는 듯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도쿄에 있는 부하 직원이 도요타의 경고를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요타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추가 대출을 막겠다는 그 경고 말입니까?”
“예. 들으셨는데 왜 이렇게 나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듣긴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지금 하시는 걸 보니 저를 협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현실을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일본에서 돈을 벌고 싶다면, 일본의 룰을 따라야 할 거 아닙니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일본의 룰이라니.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룰이었다.
“더 하실 이야기 없으면 이만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눈치가 없으십니다. 혹시 부동산에 투자한 자금은 합법적입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자금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는 깨끗한 돈이니 걱정하지 마시길. 제가 한국에서 주식으로 번 돈을 미국에다 투자하였고, 미국에서 벌어들인 자금을 일본에 투자한 거뿐입니다.”
“……그러면 혜성 그룹 회장님께서 그만한 자금을 일본에 투자했다는 사실을 한국 지도자들은 알고 계십니까?”
그가 말하는 의미는 간단했다.
내가 운용하는 비자금의 규모를 한국 권력자들에게 폭로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런 도요타 데쓰로의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찼다.
돈이 부족하면 돈을 더 모아오면 될 것이지, 이런 식으로 추잡하게 나오는 게 과연 도요타 같은 대기업의 할 짓인가 싶었다.
“도요타답지 않게 구질구질하십니다.”
“구질구질? 말씀이 좀 심하신 거 같은데, 회장님께서 3천억 엔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 지도자들에게 알려지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걱정되지도 않습니까?”
유치하기 그지없는 협박에 나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시나 본데, 김영산 대통령께서는 저와 대단히 관계가 좋으십니다.”
군부 시절이었으면 꽤 위협적인 협박이었을 거다.
하지만 5공의 시대는 끝이 났고, 김영산 대통령은 사실상 나의 편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일본에 얼마나 많은 자산을 두고 있든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내 자산은 3천억 엔 정도가 아닌데 말이지.’
엠파이어 빌딩은 내 자산 중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부채가 대부분이긴 해도 자산 규모만 따지면 나는 수조 엔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도요타 데쓰로의 협박이 같잖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익!”
“준현아. 손님 좀 배웅해 줘라.”
“제가 알아서 갈 테니, 제 몸에 손도 대지 마십시오!”
도요타 데쓰로는 분개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