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대통령 덕을 다 보네
“그나저나, 문민정부라고 말만 들었는데 확실히 세상이 달라질 거 같기는 해. 안기부장을 교수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만 봐도 말이지.”
권오중 회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산 정권은 5공 정권과는 차원이 다른 정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경찰과 군인이 죄 없는 시민들을 때려죽이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겠지.’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권오중 회장에게 말했다.
“당장은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민주주의 정권이 우리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겁니다.”
“흠, 그래?”
“5년마다 대통령을 뽑는다면, 우리 기업가들의 영향력이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선거에 필요한 자금이 한두 푼도 아니니 말입니다.”
내 말에 권오중 회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맞는 말이야. 우리 없으면 대선 자금도 구할 수 없는 게 현실이지.”
“무엇보다 1년에 상납하는 뇌물이 줄어든다는 게 매력적입니다.”
5공은 그야말로 틈만 나면 돈을 뜯어 갔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1년에 뜯어가는 돈을 다 합치면 백억이 넘었다.
비자금으로 백억이면 재계 10위권의 기업들조차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규모였다.
그러니 뇌물 상납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권이 바뀐 것을 기뻐해야 했다.
“아예 뇌물을 안 줄 수는 없겠지?”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어도 그게 가능할 리는 없었다.
한국 정치가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 말이다.
“뭐 그거야 권오중 회장님 마음대로 하셔도 될 일입니다.”
“이 회장은 어쩌려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줄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1년에 20억 정도면 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20억도 절대 작은 돈은 아니지만, 정권이 바뀌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조언 고맙네. 이 회장.”
“조언이랄 게 있겠습니까.”
“다음에도 정보 같은 게 있으면 좀 나눠주고 그랬으면 해. 나도 이 회장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최대한 도울 테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저 양반도 취임식에 참석했던 모양이군.”
권오중 회장이 한쪽을 가리키며 그리 말하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왕주형 회장이군.’
미래 그룹 회장 왕주형.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벌 그룹의 회장인 그도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대선 때 자금도 소박하게 지원했다는 소문이 있으니 더욱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다.
“잠시 왕 회장님과 대화를 하고 오겠습니다.”
“이 회장, 미래 그룹과도 친분이 있었나?”
“그런 게 있겠습니까. 그냥 한번 대화를 나눠보려는 겁니다.”
“뭐, 그러게.”
권오중 회장과 일별한 나는 왕주형 회장을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왕 회장님.”
재계의 큰 어른이기에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였다.
그러자 왕주형 회장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 회장이 여기는 어쩐 일인가?”
“회장님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인사는 받았으니 이만 돌아가게.”
나를 어지간히 싫어하는지, 대놓고 불청객 취급이었다.
“오랜만에 회장님을 뵙는데,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럼? 나와 무슨 대화라도 나누자는 건가?”
“왜 그렇게 적대적으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혜성 그룹에서 사사건건 미래 그룹과 충돌하려 드는데,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어디까지나 사업은 사업일 뿐입니다.”
내 말에 왕주형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별거 아닌 일에 왜 과민반응하냐는 식으로 말하니 그로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먼저 혜성 그룹을 견제한 것은 미래 그룹이지 않습니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화내야 할 사람은 왕주형 회장이 아니라 나였다.
그동안 미래 자동차에서 얼마나 견제를 했었던가.
심지어 신광 산업이라는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하청 업체에 파업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생산에 차질이 생겼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뭐 나도 받은 만큼 충분히 갚아줬지만 말이야.’
내가 작게 곤욕을 치렀다면, 왕주형 회장은 아주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작년 7월, 8월에는 파업과 시위 등으로 자동차 한 대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했을 정도니, 말이다.
돈으로 따지면 아무리 못해도 천억 단위의 손해를 보지 않았을까?
“네놈이 노동자를 그렇게 챙겨주지만 않았으면 우리 그룹이 노조 설립을 허락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그걸 왜 제 탓으로 돌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미래 그룹에서 노동자 월급을 잘 챙겨줬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이놈이.”
“저도 대기업을 경영하는 재벌 회장인데, 욕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왕주형 회장은 내 눈을 강하게 노려보고는 거칠게 말했다.
“나랑 싸우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이만 꺼져줬으면 좋겠군. 이 회장의 얼굴을 보면 화를 주체할 수가 없거든.”
“그러면 한 가지만 여쭙고 가겠습니다.”
“뭘 묻겠다는 거야?”
“대양 상선을 인수하실 생각입니까?”
“그거는 왜 묻지?”
“제가 대양 상선을 인수하려고 계획 중이어서 묻는 겁니다.”
“지금 경고하는 건가? 대양 상선을 건드리지 말라고?”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뿐입니다. 괜한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그리 말했음에도 왕주형 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역으로 경고하지. 대양 상선은 미래 그룹에서 가져갈 테니, 이 회장은 손 떼게.”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역시 오만하기 짝이 없군. 미래 그룹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예전의 혜성 그룹이 아닙니다.”
“정부만 믿고 그러는 것이면서 예전의 혜성 그룹이 아니기는.”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대양 상선을 인수할 때 정부의 도움을 받을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의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부정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더 이야기해봤자 의미가 없을 테니, 이만 가 보게.”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찾아올 필요 없네.”
나는 피식 웃고는 다른 자리를 옮겼다.
‘미래 그룹이라. 대양 상선을 인수하기가 쉽지만은 않겠어.’
뭐 그래도 질 생각은 없었다.
예전이라면 감히 미래 그룹과 인수 경쟁을 할 생각을 못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체급만 놓고 봐도 이제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 * *
취임 첫날, 김태중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 동의 요청안에 서명해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첫 서명권을 행사한 김영산 대통령은 나흘 동안 쉴 틈 없이 업무에 매진하였다.
“겨우 나흘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말 하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대통령이라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아. 해야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도저히 쉴 틈이 없어.”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대통령 각하.”
“각하라고 하지 말게. 하하. 각하라는 단어도 결국 군부의 잔재이니 말이야.”
“예, 대통령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영태 비서실장의 대답에 김영산 대통령은 피식 웃고는 화제를 전환하였다.
“외빈들에게야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지만, 취임식에 참석한 내빈들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해준 게 아쉽네.”
“내빈들도 대통령님의 상황을 이해해 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이한성 회장과 대화를 나누지 못한 건 아쉬웠어.”
“혜성 그룹 회장 말씀입니까?”
“그래. 이한성 회장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거든.”
“대통령님,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지나치게 한 기업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랫동안 김영산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고영태 비서실장이기에 거침없이 직언하였다.
그러자 김영산 대통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자제하기는 해야겠지. 안 그래도 기업인들 사이에서 말들이 나오고 있다 하니 말이야.”
“예, 대선에서 혜성 그룹이 세운 공은 저도 인정하지만, 그렇다 해서 혜성 그룹만을 편애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맞는 말이었다.
김영산 대통령이 생각하기에 한성의 공로는 절대적이었지만, 다른 기업들도 충분한 성의를 보여줬었다.
대선 자금이 부족하지 않게끔 각 그룹에서 막대한 지원을 해줬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한성 회장만큼 고마운 감정을 느끼게 해준 재벌은 없네.”
혜성 그룹은 이번 대선만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5공의 서슬 퍼런 통치가 극에 달했던 1985년.
그때 혜성 그룹은 김영산 대통령에게 무려 50억을 지원해 주었다.
1985년 당시 혜성 그룹의 자산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사운을 걸었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이한성 회장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만약 12대 총선에서 한성에게 50억을 지원받지 못했다면?
여소야대의 상황을 만들어 내지도 못했을 거다.
당연히 직선제 개헌을 이끌기까지 더 많은 피가 흘렀을 가능성이 크다.
13대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한성이 김태중 국무총리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노태호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이 될 수도 있었을 터.
김영산 대통령으로선 한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언론들과 재벌들 앞에서만 조금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노력해 보지. 하하하.”
“대통령님. 혜성 그룹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크다면, 대양 상선 인수 건을 도와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양 상선? 혜성 그룹이 대양 상선을 노리고 있나?”
“예. 취임식 끝나고 재계 인사들끼리 연회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미래 그룹과 대양 상선을 두고 충돌했다 합니다.”
“내가 알기로 대양 상선은 한해 적자만 수백억이라던데, 그런 기업을 두 곳에서 노리다니. 신기한 일이로군.”
“둘 다 자금력이 넘치는 빅 4의 기업들이니 적자 수백억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재벌들이 오히려 더 돈을 아끼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린가? 하하. 아마 정부의 지원을 염두에 두고 대양 상선을 인수하려 하는 모양이야.”
“예, 원금 상황을 몇 년 연기하는 식의 지원을 바라고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로서도 나쁘지는 않겠어. 안 그래도 해운 업계의 불황이 심각한데, 두 기업이 대양 상선을 인수한다면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좋아. 혜성 그룹이 대양 상선을 인수하길 원한다면 혜성 그룹 쪽에 넘기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네.”
“그러면 미래 그룹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할 필요가 있나? 자네 선에서 몇 마디 해주면 왕 회장도 포기할 거 같은데.”
정권 초기인 지금만큼 대통령의 권력이 강할 때도 없었다.
그리고 김영산 대통령은 비록 문민정부의 수장으로서 권위주의 타파를 공약으로 선포하였으나, 누구보다도 권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다.
대선 때 성의 표시도 제대로 안 했던 미래 그룹을 상대하는 거라면, 권력을 사용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이 말씀하신 대로 대양 상선은 혜성 그룹에서 인수할 수 있게끔 상황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김영산 대통령은 고영태 비서실장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다시 화제를 전환하였다.
대양 상선의 일보다 훨씬 중요한 사항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 *
-원금 상환은 최대한 미루고 이자 부담도 줄여줄 테니, 대신 현금은 3백억 정도만 준비해 두세요.
고영태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화색을 띠었다.
자산 규모가 거의 1조에 근접한 회사를 겨우 3백억으로 인수할 수 있게 해준다니.
물론 대양 상선의 부채가 워낙 크니, 5공 때 쌍호 그룹 같은 재벌 기업이 받았던 특혜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비서실장님.”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애물단지와 다를 게 없는 대양 상선을, 혜성 그룹 같은 대기업에서 인수해 준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대통령님께서 워낙 혜성 그룹을 좋게 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러니 대통령님의 성심을 잘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도 미래 그룹이 끼어 있었는데도 대통령님께서 특별히 혜성 그룹에만 기회를 준 것이니 말입니다.
“대통령님께 감사하다고 꼭 좀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순간만큼은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안 그래도 노사의 잔소리가 지겨워지려는데, 대통령 덕에 대양 상선을 쉽게 인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