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렉서스에 질 생각은 없다
앞으로 나올 렉서스의 광고들이라.
확실히 광고는 중요하였다.
혜성 전자의 가전제품을 홍보할 때도 느꼈지만, 광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제품 판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렉서스가 광고 하나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고 하셨죠?”
(그래. 그 당시 워낙 센세이션을 일으킨 광고라서 아직도 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혜성 자동차의 광고들도 노사가 도와준 결과물이었지만, 렉서스의 광고까지 뺏는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의 효과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싶었다.
“정확히 어떤 광고였습니까?”
(차 위에 와인잔을 쌓은 채 드라이브하는 광고였다. 흔들림이 없는 것을 광고하는 것이었지. 말로 설명하면 한계가 있으니 이따 꿈에서 보여주도록 하마.)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사가 감탄할 정도면 범상치 않은 광고인 게 분명하였다.
‘기대되는군.’
광고 내용도 기대가 됐지만 그 광고로 미국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미래를 생각하면 더더욱 기대되었다.
물론 결과가 어떨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자동차도 자동차지만, 대양 상선은 언제쯤 인수할 생각이냐?)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찼다.
해운업으로 중견 재벌이 된 것은 알고 있지만, 노사의 해운업에 대한 집착은 너무 심한 거 같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자동차나 반도체, 전자 쪽과 비교하면 그리 중요한 사업도 아닌데 말이다.
‘뭐 나중에 해운업도 커진다고 하니 그걸 기대해봐야겠지.’
시장이 커진 만큼 위기도 많을 거 같았지만 어쨌든 사업성이 있다는 이야기니 나쁠 것은 없었다.
“안 그래도 정권이 바뀌면 인수 타진을 해 볼 생각입니다.”
(미리 김영산에게 이야기해. 다른 곳에서 찜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직 취임식도 안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노사께서, 어차피 올해까지 인수하는 회사가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어떤 변화가 생길지 누가 알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어설프게 미래를 예측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대양 상선만 인수하면 당장이라도 해운 업계의 일인자가 될 수 있으니,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인수 의사를 타진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김영산이라면 너에게 빚진 것이 많으니, 대양 상선 인수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다.)
내 생각에도 그랬다.
어디 멀쩡하게 운영되고 있는 기업이라면 모를까, 법정 관리를 받는 대양 상선이었다.
우리 혜성 그룹이 아니더라도 조건만 맞으면 어떤 기업이든 인수하길 바라고 있을 정부였으니, 내가 인수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 그룹에서도 대양 상선을 노리고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상관없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래 그룹이 대양 상선을 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나와는 다르게 차기 정부와 서먹서먹한 왕 회장인데 말이다.
* * *
2월 25일.
나는 취임식 연설을 하는 김영산 당선인의 모습을 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짝짝짝!
“대한민국 만세!”
“김영산 대통령 만세!”
열렬한 함성 속에, 마침내 김영산 당선인이 13대 대통령이 되었다.
실로 뜻깊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평화롭게 정권이 이양되었군.’
물론 전 대통령이 깨끗하게 정권을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하여 사면권을 남발하는 등, 추잡하게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라도 정권을 이양하고 물러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솔직히 5공에서 군 투입 같은, 극단적인 수를 쓸까도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아마 사법부와 이야기가 끝나서 안심하고 물러난 거겠지?’
권력이야 잃었어도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남아 있었다.
보유 현금만 따지면 어떤 재벌과 비교해도 압도적일 게 분명하였다.
못해도 조 단위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이 정도의 비자금이 있으니, 괜히 무리수를 두지 않고 조용히 물러난 거 같았다.
어쨌든 그 정도의 돈이라면 대통령 못지 않은 삶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법정으로 끌려갈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데, 노사가 이야기하기를, 이미 사법부와 거래를 끝냈다고 한다.
검찰에 기소되는 것은 피할 수는 없지만, 집행유예 정도로 끝날 것이라나?
‘과연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5공의 주요 인사들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손에 들고 떵떵거리며 사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국민들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사법부가 막아선다면 사법 개혁을 밀어붙여서라도 5공을 응징할 것이다.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님 맞으십니까?”
그때였다.
취임식이 끝나고 주요 귀빈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이동하는데, 40대로 보이는 일본인이 통역가를 대동한 채 나를 불러세웠다.
“예, 맞습니다만.”
“저는 도요타 자동직기의 전무이사, 도요타 데쓰로라고 합니다.”
도요타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눈을 빛냈다.
‘성이 도요타라면 도요타 가의 일원인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하기야 40대 초중반의 나이에 전무이사인데, 도요타 가의 혈연이 아니고서는 말이 되지 않았다.
“회장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제 이름이 일본에까지 알려졌습니까?”
“그럼요. 요즘엔 반도체 회사들 사이에서 혜성 그룹이 화제입니다. 그 유명한 일성을 집어삼킨 기업이니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일본에서 혜성 그룹의 이름이 얼마나 알려졌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어차피 일본에서는 사업을 크게 확장할 생각이 없다.’
가전이든, 반도체든 그도 아니면 자동차든.
일본인들이 한국의 제품을 사 줄 거 같지 않았다.
그나마 혜성 모직의 의류들이나 혜성 주류의 술들이 제법 팔린다지만, 그룹의 매출을 다 합해봐도 천억 정도에 불과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베스 호텔이나 소프트뱅크처럼 간접 투자하는 것이 제격이야.’
나중에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미국이나 유럽에 진출했으면 진출했지, 일본에 진출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무려 도요타 직계의 입에 발린 말에도 나는 그저 무덤덤하기만 하였다.
“사실 저희처럼 자동차 회사에서는 반도체나 컴퓨터보단 혜성 자동차가 더 유명합니다.”
“도요타에서 혜성 자동차를 알아봐 주신다니, 이거 참 영광입니다.”
“디자인 하나만으로 미국에서 그만한 인기를 얻었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하하.”
디자인 하나만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앱설루트의 성능이나 안전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거 같았다.
“설마 디자인 하나 가지고 통했겠습니까? 미국 ‘고급차’ 시장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내가 ‘고급차’ 시장을 강조하며 그리 말하자, 도요타 데쓰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하의 도요타 그룹이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도요타도 대중차에서나 잘나가지, 고급차 시장은 아직 진출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러게 왜 시비를 거나 싶다.
물론 본인은 시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 하. 제가 언제 만만한 시장이라고 했습니까? 저희도 미국 고급차 시장에 진출하려고 많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렉서스 브랜드 말씀입니까?”
“역시 아시고 계시는군요.”
“경쟁사가 될 수 있는 곳인데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경쟁사라. 혜성에서는 도요타를 경쟁사라 생각하나 봅니다.”
도요타 데쓰로는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거 같았다.
한국의 자동차 기업 따위가 도요타를 두고 경쟁의식을 가지니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군.’
첫인상부터 불쾌하기 그지없더니, 하는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도요타와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듯싶었다.
“사실 제가 회장님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도요타 데쓰로가 마침내 본론을 꺼내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도쿄 부동산에 많은 투자를 하셨던데…… 혹시 엠파이어 빌딩이라고 아십니까?”
“그건 왜 물으십니까?”
“엠파이어 빌딩의 소유주를 조사해보니, 혜성 그룹과 관련이 있어 보여서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예. 제가 일본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투자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엠파이어 빌딩을 언급하신 이유가 뭡니까?”
“도요타에 매각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글쎄요.”
내가 왜 지금 시점에 엠파이어 빌딩을 팔아?
시간이 지날수록 시세가 더 오를 텐데 말이다.
“일단 제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거로 합시다.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니.”
도요타 데쓰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일이었을 텐데, 정작 빌딩 소유주인 나는 별거 아닌 일로 취급하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의 기분을 생각해줄 필요는 없었기에 목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혜성 그룹의 사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예, 도요타의 손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예의상 그리 말해주고는 연회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아까, 도요타의 사람들이랑 대화하던데?”
“그걸 또 언제 보셨습니까.”
“이 회장이 워낙 인기가 많지 않은가? 사람들이 이 회장 이야기하는 걸, 옆에서 몰래 엿들었네.”
권오중 회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빅 4의 재벌 총수인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가벼운 모습만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나를 정말 친구처럼 생각하는 건가?’
친구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고서야 나를 이렇게 대할 이유가 없을 거 같았다.
“별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앱설루트가 미국 시장에서 잘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는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군요.”
“역시 도요타에서도 앱설루트를 인정하나 보군.”
권오중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앱설루트가 도요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뿌듯했던 모양이다.
“본인들도 고급차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으니, 그 때문에 앱설루트를 조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렉서스라고 했었지? 이 회장의 생각은 어떤가? 도요타의 고급차 브랜드가 미국 시장에서 통할 거 같아?”
“아직 디자인도 공개된 게 없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혼자만 알려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 빼지 말고 내게도 좀 알려주지? 우리 사이에 그러긴가?”
“…….”
그놈의 우리 사이.
도대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뭐 괜히 물어봤다가, ‘어떤 사이긴, 둘도 없는 친구 아닌가?’ 이런 대답을 들을까 봐 실제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 앱설루트를 누르지 않고선 렉서스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호오, 그 말은 렉서스가 반드시 실패할 거라는 뜻인가?”
“제 말이 어떻게 그렇게 해석되는 겁니까?”
“앱설루트가 렉서스에 패배할 리가 없잖아. 이 회장이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는 사업인데 말이야. 내 말이 틀려?”
“……아닙니다. 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역시 이 회장은 대단해. 도요타조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다니 말이야.”
나는 딱히 도요타를 무시한 적이 없는데,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뭐, 렉서스에 질 생각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이 회장의 자신감이 그리 대단하니, 팬더 웨스트윈드를 미국 시장에 진출해야겠다는 계획은 포기하는 게 좋겠어.”
“정우 자동차에서도 고급차 시장에 도전할 생각이었습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생각을 바꾸었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고급차 시장에 도전했다가 괜히 이 회장에게 패배하는 꼴은 겪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만큼은 이 회장에게 지고 싶지 않아.”
현명한 선택이었다.
한국에서도 실패했던 팬더 웨스트윈드로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를 게 없었다.
물론 나로서는 정우 그룹이 그렇게 자충수를 둔다면 나쁠 게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