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청문회라고?
당연히 좋은 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대기업 입장에서는 오히려 독재 정권이 더 나은 면도 있었다.
5공 같은 경우도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서 문제지, 대기업의 이권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정권이었다.
대출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이 훨씬 더 유리했고,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받기도 수월하였다.
더군다나 노동자 문제를 해결할 때, 독재 정권만큼 좋은 정권이 없었다.
신고했다 하면 경찰들이 나타나 알아서 노동자를 때려눕혔으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게 도가 지나칠 경우 미래 자동차 꼴이 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는 솔직히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지. 어용 노조를 만들었으니 노조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대출이야 혜성 그룹의 신용도가 워낙 높아서 어떤 정부든 대출받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혜성 그룹도 문제 되는 게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김영산 당선인이 공약으로 내세운 부정부패 척결이었다.
여당에서는 부정부패 척결이란 개혁목표를 두고서 벌써 서슬 퍼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부정부패 척결에서 혜성 그룹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혜성 그룹뿐만이 아니라 어떤 그룹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5공에 뇌물을 바치지 않은 재벌 그룹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5공의 핍박을 받았던 세계 그룹조차 어음 형태로나마 5공에 뇌물을 바쳤으니 더 말할 것도 없을 거다.
마침 김영산 당선인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이 회장님, 회장님께 한 가지 양해의 말씀을 드릴 게 있습니다. 5월쯤, 여당에서 5공 비리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할 겁니다.
“5공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말씀입니까?”
-예. 제 공약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존재하는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를 모두 청산할 계획입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존재하는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저 역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면 당연히 어두운 과거는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혜성 그룹도 완전히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쩌면 이한철 명예 회장께서 청문회에 출석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한철 명예회장이 5공 청문회에 출석한다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어차피 5공 청문회는 노태호 후보가 당선되었어도 예정된 일이었다.
여소야대의 상황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노태호 후보 때 5공 청문회가 열렸으면 이한철 명예회장이 더 곤욕을 겪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너무 충격을 받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괜찮습니다. 이 나라의 정화를 위해서라면 감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회장님은 이 나라의 진정한 애국자십니다.
“일개 기업가일 뿐입니다.”
내가 겸손하게 대꾸하니 김영산 당선인이 허허롭게 웃었다.
-다행히 혜성 그룹은 다른 재벌들에 비교하면 죄가 거의 없다시피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마 샤롯 그룹이나 쌍호 그룹 등이 큰 피해를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영산 당선인의 말처럼 우리 그룹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혜성 그룹은 5공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국민들도 우리 혜성 그룹만큼은 나쁘게 보지 않고 있었다.
노조와 관련된 일도 그렇고, 미국에서 선전하고 있는 일도 그렇고, 혜성 장학회도 그렇고, 다른 재벌들처럼 국민들이 싫어할 짓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툭 하면 사고 치는 재벌 2세가 혜성 그룹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반면 나를 적대했던 샤롯 그룹이나 쌍호 그룹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둘 다 5공의 총애를 받아 온갖 혜택을 받았고 이미지도 부정적이었으니 5공 청문회에서 크게 시달릴 게 분명했다.
‘김영산 당선인과도 사이가 안 좋으니 세무조사도 강하게 때려 맞겠지? 5공 때 받았던 금융 지원이야 턱도 없을 거고.’
그걸 생각하니 5공 청문회가 오히려 기대되는 거 같았다.
물론 이한철 명예회장이 고초를 겪게 될 것을 생각하면 다시 씁쓸한 기분을 느꼈지만 말이다.
-다음에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예.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김영산 당선인과의 통화가 끝나자 나는 곧바로 이한철 명예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방금 차기 대통령과 전화했는데, 차기 대통령이 5공 청문회를 예고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네가 예상하던 대로 5공 청문회가 열리게 되는구나.
내 말에 이한철 명예회장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이전부터 내가 말했던 것이 있었기에 충격이 그리 크지 않은 거 같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부정을 저지르거나 그러지는 않았지?
“예. 5공과의 관계는 완전히 깨끗합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청문회에 자주 참석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네가 청문회에 가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어차피 일도 없는데 청문회로 시간 뺏긴다고 문제 될 게 있겠냐?
단순히 시간 뺏기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서 문제였다.
“나이 어린 의원들이 반말 찍찍하며 아버지를 함부로 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거다.
5공 청문회는 전국적으로 생중계될 테니, 의원들도 최대한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전에 겪지 못했던 수치스러운 일들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하였다.
-걱정하지 마라. 5공의 권력자들이라고 다 나이가 많았던 것은 아니지 않았느냐. 나는 그자들 앞에서도 숙일 때는 잘 숙였으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나는 초연하게 말하는 이한철 명예회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혜성 가의 사람이 고개 숙일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겁니다.’
정부의 사람이든, 다른 재벌 사람이든 간에 혜성 그룹에서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 * *
1988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혜성 자동차는 매출이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앱설루트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혜성 자동차 임원들은 회의에서 기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였다.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이 예고되었던 것이다.
“켄터키주에 공장이 완공될 예정인데, 도요타가 발표하기를 이 공장에 10년간 6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합니다.”
“헉!”
“60억 달러라니.”
“한국 돈으로 이게 얼마입니까?”
“지금 환율이 1달러당 800원 정도 하니, 거의 5조에 가까운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5조라고요? 허어.”
아무리 10년 동안 투자되는 돈이라 해도 5조면 실로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었다.
시장 전체의 시가총액이 60조가 조금 안 된다고 하니, 단순하게 계산해 보자면 상장해 있는 기업의 10%를 인수할 수 있는 돈이었다.
‘뭐 10년 동안 5조면 나도 어렵지 않게 가능하지.’
임원들은 5조란 말을 듣고 크게 경악했지만 나는 태연함을 유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도 10년이란 시간이 주어진다면 5조를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출까지 낀다고 가정한다면 내년부터 5조를 동원할 수도 있으리라.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도요타의 렉서스가 우리 앱설루트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동요하는 임원들을 향해 그리 묻자, 하운철 대표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내 질문에 대답하였다.
“다른 일본 기업인 닛산, 미쓰비시, 마쓰다 등도 미국에서 그리 좋은 성과를 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저희 앱설루트가 진출한 프리미엄 브랜드에서는 어떤 일본 업체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요타도 비슷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제 생각에는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전에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번 잡힌 이미지는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에 미래를 알지 못했다면 나도 하운철 대표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미국에서 렉서스를 아예 다른 브랜드로 인식한다면 어떨 거 같습니까?”
“그럼 저희와 같은 고충을 겪지 않겠습니까? 인지도가 없으니 홍보부터 해야 할 텐데, 그게 난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임원 대부분은 하운철 대표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렉서스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발언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디서나 예외는 있었다.
일본 유학파 출신인 김태식 상무가 이견을 제시하였다.
“도요타는 다른 일본 기업들과 달리,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신중하게 사업하는 기업입니다. 렉서스도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태식 상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임원들은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닛산이라고 신중하지 않아서 실적 부진의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닛산에서 성급하게 북미에 진출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 도요타는 누미의 성공을 겪었음에도 지금까지 5년 가까이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렉서스는 범상치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김 상무는 도요타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거 같습니다.”
“도요타에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장인과 장인정신이 있습니다. 절대 우리가 무시할 수 있는 기업이 아닙니다.”
너무 도요타를 높게 평가하는 거 같았지만, 어쨌든 내 의견도 김태식 상무와 일치하였다.
애초에 나는 렉서스가 성공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김태식 상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도요타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미리 대비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우선 마케팅부터 늘릴 것이니, 마케팅 부서와 잘 협력하십시오.”
“예!”
사실 광고를 늘리는 것만으론 부족하였다.
광고도 광고지만, 성능 자체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볼보가 안전한 차라면, BMW는 운동 성능이 좋은 차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 우리 앱설루트는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디자인이면 디자인, 성능이면 성능, 안전성이면 안전성, 모든 것을 다 노리고 있어.’
디자인이 아름다우면서 성능도 뛰어나고 안전성까지 갖춘 자동차.
이게 바로 앱설루트였다.
이것만 봤을 때는 그야말로 장점밖에 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특색이 없다는 게 단점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렉서스가 미국에서 고급차에 도전한다면 우리 앱설루트의 자리를 노릴 게 분명하였다.
렉서스로서도 벤츠, 볼보, BMW, 아우디보다는 우리가 만만할 테니 말이다.
“대비책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보고를 들을 것이니 각자 준비해오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렇게 임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고는 회의를 끝냈다.
(렉서스가 원래 역사보다 조금 더 일찍 등장할 거 같구나.)
회의를 뒤에서 지켜봤는지, 노사가 불쑥 나타나서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앱설루트를 보고 서둘러 움직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겠지. 뭐, 원래 역사에서도 이 시기에 렉서스가 출시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야.)
늘 아쉬운 게 노사의 편향된 지식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큰 도움을 받았으니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노사가 자동차 지식도 해박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어떨 거 같습니까? 이번에도 렉서스가 성공할 거로 생각하십니까?”
(혜성 자동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겠지.)
“역시 그렇습니까?”
(렉서스와 앱설루트의 이미지는 여러 부분에서 겹치니, 결국 앱설루트의 최대 경쟁자는 렉서스가 될 거다.)
노사의 생각도 나와 같은 걸 보니 도요타를 경계하기는 해야 할 거 같았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요.”
(너에게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면, 내가 앞으로 나올 렉서스의 광고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