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
“그런데 형님, 엠파이어 소유주의 자금력이 만만치 않은 듯한데, 그들이 의외로 거물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국인이라고 했지?”
“직원들이 한국인 비중이 높아서 소유주도 한국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럼 거물이든 무슨 상관이야?”
“예?”
“한국에 우리 도요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하는 것이냐? 우리가 단교를 선언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한국이?”
도요타는 본래 한국의 기업과 합작 사업을 하기로 계획했었다가, 거의 계약이 마무리되었을 때 일방적으로 철수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저우언라이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중공과 교역을 하고자 대한민국의 어떤 회사, 어떤 기업과도 단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일개 회사가 국가를 상대로 단교를 선언한 셈이었다.
이러한 과거가 있으니, 도요타 데쓰로로서는 한국을 우습게 볼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설령 대통령의 비자금이라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으니, 자세히 조사한 뒤에 나에게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도요타 슈헤이는 마치 상관을 대하듯,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혈족 경영을 하는 도요타다 보니, 형제들 간의 위계질서도 철저하였던 것이다.
“한국 하니까 혜성 자동차가 생각나는군.”
“앱설루트 말씀입니까?”
“그래. 그자들 덕분에 렉서스를 내가 담당하게 됐어.”
“축하드립니다. 형님.”
도요타는 혜성 자동차의 성공을 지켜보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안 그래도 도요타의 경영진은 도요타 자동차의 싸구려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혜성 자동차에서 먼저 유럽의 자동차가 아님에도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마침내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준비한 게 바로 렉서스였다.
“앱설루트가 운이 좋아서 조금 잘되고 있다지만, 내가 준비하고 있는 렉서스 브랜드가 출격한다면 바로 상황이 바뀔 거야.”
도요타 데쓰로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이시라면 한국의 기업 따위는 금세 추월할 겁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하하!”
그의 자신감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도요타 자동차는 흔히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정도로 신중하다는 것인데, 새로운 브랜드를 출격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렉서스 브랜드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선두주자인 앱설루트까지 철저하게 연구한 끝에 시작한 브랜드였다.
더군다나 도요타의 넘쳐나는 자본까지 더해졌으니 렉서스와 도요타 데쓰로의 성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여기 앉아.”
내가 소파를 가리키니 김동윤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예, 회장님.”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형님이라 불러도 돼.”
“회사니까, 회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수행 비서인, 양준현이었으면 이때다 싶어서 말을 놓았을 텐데, 정작 매제인 김동현이 더 예의를 갖추었다.
나는 그게 왠지 우습게 느껴져서 피식 웃었다.
“신혼여행은 잘 갔다 왔어?”
“예. 처음 나가본 해외라서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호텔에만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 아닙니다.”
“앞으로도 지현이랑 자주 여행 가고 그래. 지현이가 어렸을 때부터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었으니까.”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경비가 부족하면 언제든 말하고.”
“아, 감사합니다.”
“신혼여행 다녀와서 다시 회사 생활에 적응하려니까, 쉽지 않지?”
안 그래도 혜성 반도체로 이직한 지 얼마 안 됐던 김동윤이었다.
더군다나 작년 말에 또다시 혜성 반도체에서 혜성 전자로 전임하였기에 더더욱 적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동윤은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다들 워낙 잘해줘서 적응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
김동윤의 말을 듣자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회장의 매제인데 함부로 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김동현의 상사들까지 아첨을 떨어 사내의 위계질서가 무너지지 않을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나마 혜성 전자의 이재현 대표가 중심을 잘 잡고 있으니 그런 우려는 덜어도 되겠지.’
본래 컴퓨터를 만들던 중소기업 사장 출신인 이재현 대표였지만, 능력만큼은 다른 대기업에서 영입한 인재들에 못지않았다.
내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었으니 상대가 김동윤이라고 허술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일성에서 따라온 직원들이 너의 말을 잘 따른다고 했지?”
본래 혜성 반도체로 이직했던 김동윤이지만 현재는 혜성 전자 소속이었다.
일성에서야 정치적인 이유로 반도체를 담당하였었지만, 그가 더 잘하는 쪽은 반도체보다는 가전과 컴퓨터 쪽이었다.
하여 본인이 더 잘하는 혜성 전자 쪽으로 전임하였는데, 여기서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혜성 반도체의 직원 몇몇이 김동윤을 따라 혜성 전자로 전임한 것이다.
작년 말부터 혜성 반도체가 한창 잘나가기 시작했으니, 김동윤을 따라 전임한 것은 실로 어려운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김동윤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예? 아, 꼭 그런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동료로서 저와 말이 잘 통하는 거뿐입니다.”
“탓하려고 하는 말이니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책망하는 줄 알고 질겁하는 김동윤에게 그리 안심시키고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혜성 전자와 혜성 반도체에서 사람을 뽑아 네 팀을 만들어봐.”
“팀이라면?”
“모토로라 알지?”
“최초의 휴대전화를 만들었던 모토로라 말씀입니까? 그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혜성에서도 휴대전화를 만들까 해. 그래서 말인데 네가 팀을 만들어서 한번 휴대전화 만들 준비를 해봐.”
내 말에 김동윤은 눈을 부릅떴다.
휴대폰을 만드는 것.
일개 상무인 김동윤이 맡기에는 실로 막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동윤이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제가 과연 그런 중대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된다.”
“예?”
“하지만 너를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라. 지금처럼 어정쩡한 지위로 만족하고 산다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냐?”
“…….”
“무엇보다 나는 네가 지현의 남편이란 이유로 이런 중차대한 일을 맡기는 게 아니다. 너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에 맡기려는 거야.”
“그렇습니까?”
내 말에 그가 크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별거 아닌 말이어도 역시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거 같았다.
“나는 네가 한 번 이 일에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가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동윤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잘 선택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김동윤이 지현의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제 30살이 된 그에게 휴대폰 사업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더 연륜 있는 사람을 책임자로 앉혔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김동윤에게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이란 뜻은 아니었다.
연륜이야 미숙할 수 있어도, 일성 전자에서의 김동윤이 세운 실적은 절대 작지 않았다.
노사도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김동윤을 한 번 믿고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뭐 그렇다고 손 놓고 지켜만 볼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휴대폰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를 알고 있는데 나라고 마냥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4M D램의 양산 방식을 두고 갈림길에 섰던 혜성 반도체에 스택 방식으로 명확하게 결단을 내려준 것처럼 휴대폰에서도 명확하게 길을 제시해 줄 생각이었다.
* * *
“15년 이내에 반드시 한 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올 겁니다. 그러니 우리 혜성 전자는 당장 전화기 사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김동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혜성 전자에서 휴대폰 사업을 시작할 거라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한성이 직접 전화기 사업을 중시하겠다고 선언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일이 되어가고 있네.’
휴대폰 사업을 담당하면 부담스러운 상황을 많이 겪게 될 거라는 사실은 진즉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사업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다.
당장 휴게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직원들부터가 휴대폰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휴대폰이라.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왜 그렇게 생각해?”
“모토로라의 기세가 철옹성과 다를 게 없잖아. 지금 휴대폰 사업을 시작해 봐야 별로 재미 볼 게 없을걸? 수출도 할 수 없을 거고.”
“그것도 그건데, 애초에 우리나라는 북한 때문에 통신 쪽 개발에 제약이 있지 않나?”
“뭐 법적인 문제는 괜찮을 거야. 우리 회장님이 차기 대통령님과 친하시잖아.”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겠는데? 회장님이 언제 실패하는 사업을 한 적이 있어? 모토로라든 뭐든 회장님이 사업을 시작한 이상, 금방 따라잡을 거야.”
“하하하! 맞는 말이네. 회장님이 나서는데 모토로라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어.”
“근데 휴대폰 사업부는 누가 맡게 될까? 내가 얼핏 들어보니까 사업 규모가 천억 단위는 족히 된다던데, 당연히 전무 이상이 맡겠지?”
“전무가 뭐야. 부대표님이 맡으시지 않겠어?”
혜성 전자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더욱 부담스러워졌다.
‘휴대폰 사업부를 담당할 사람이 일개 상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볼 거 같지는 않아 보였다.
상무가 되었을 때도 눈치가 보였던 그다.
여자친구를 잘 사귀어서 상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뒤에서 오고 간다는 사실을 그라고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휴대폰 사업이라는 중대한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임원들까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할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사실 그들이 질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다른 누군가의 기회를 뺏은 것은 사실이니.’
한성이야 그의 능력을 믿고 맡긴다고 했었지만, 그가 지현의 남편이 아니었으면 이런 기회가 주어졌을까?
혜성 그룹에는 인재가 구름처럼 많았다.
김동윤도 한때는 일성에서 잘나가던 사람이라지만, 그 일성조차도 혜성 그룹보다 인재가 많다고 볼 수 없었다.
장학회까지 만들어서 인재를 수급하는 혜성 그룹이었으니 당연히 인재의 질이 다른 그룹보다 월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혜성 그룹 안에서 김동윤이 휴대폰 사업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은 결국, 그의 아내 덕이었다.
그러니 김동윤으로선 죄책감과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성공해야 해. 회장님의 기대가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김동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담스러웠으나, 이건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낙하산이란 인식을 단숨에 씻겨낼 기회 말이다.
하여 그는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 * *
-우리 정부가 들어서면 무선 통신에 대한 규제와 제약은 완화할 것이니, 이 회장님이 추진하고 있는 휴대전화 사업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김영산 당선인의 말에 나는 화색을 띠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확답을 들었으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통령 당선인님!”
-감사하다니요. 이 회장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새 정부의 목표는 각종 규제를 완화해 국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민 시대를 맞이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일에 감사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매번 하는 생각이지만, 역시 김영산 당선인을 지지하길 잘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의 핍박을 받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지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정부가 아군처럼 느껴진다는 뜻이었다.
원래는 돈만 뜯어가는 미운 존재였는데 말이다.
‘뭐 그렇다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