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휴대폰이라
“이 회장, 정말 대단합니다. 사업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오늘따라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많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 결혼식인 줄 알 거 같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이 회장이 큰 역할을 했다면서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역시 겸손하기 그지없군요.”
연신 칭찬을 거듭하던 유정석 부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한데, 이 회장. 내일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언가 용건이 있어 보이더니,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가 있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장인어른,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하하, 감사합니다.”
유정석 부회장은 환히 웃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다른 재벌 총수들이 다가왔다.
‘정말 내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거 같군.’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써 만든 인맥을 귀찮다는 이유로 없앨 수는 없으니까.
“이 회장, 김영산 당선인께 나에 대해서도 잘 말해줬나?”
“권오중 회장님,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데 이 회장께 예의를 갖추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흠흠, 제가 워낙 이 회장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서 실수를 했습니다. 주의하도록 하지요.”
권오중 회장의 뻔뻔함은 정말 도가 튼 거 같았다.
한때는 나와 적대하던 사이였으면서 마치 엄청난 친분이라도 있는 듯 대하는 모습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정우 그룹 회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손해를 볼 것은 없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김태중 총리님과도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다음에 소개 좀 해주세요.”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 회장,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번 대선은 이변이 참 많았는데, 결국 이 회장의 말대로 되는 걸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 회장의 혜안이야 예전부터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반도체도 그렇고 솔직히 저로서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뭐, 자동차야 정우 자동차를 따라오려면 멀었지만, 반도체는 확실히 부럽긴 합니다. 내년에 조 단위 매출을 올릴 거라던데.”
나는 혀를 내둘렀다.
김태중 총리나 유정석 부회장만 나에게 칭찬할 줄 알았는데, 설마 다른 재벌 총수들까지 나에게 아첨하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확실히 이번 대선으로 내 영향력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한 모양이네.’
그럴 만도 했다.
재벌 중에 나처럼 양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재벌은 없었다.
심지어 노태호 후보가 이변을 일으킬 거라는 정확한 예측까지 했으니 나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반도체까지 때마침 빵 터져줬고, 말이다.
“그런데 이 회장. 샤롯 그룹은 어떻게 할 겁니까?”
권오중 회장이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기라도 하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같이 물었다.
호전적인 성격이다 보니,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거 같았다.
“제가 뭘 할 게 있겠습니까?”
“호오? 샤롯 그룹을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샤롯 그룹 같은 작은 기업을 건들기에는 혜성 그룹이 지나치게 커진 거 같습니다.”
물론 이는 내 속내와 달랐다.
속으로는 샤롯 그룹이 망하기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단지 이런 장소에서 이런 속내를 공개할 이유가 없어서 속내를 감췄을 뿐이었다.
“하하하, 역시 이 회장은 남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어, 저기 신진호 회장이 보이는군. 신 회장도 결혼식에 참석하기는 했나 봅니다.”
나는 권오중 회장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진호 회장이 이한철 명예 회장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안 되니, 아버지에게 접근하려는 건가?’
나를 적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는 하나 보다.
그러니 저렇게 구차하게 사려고 하는 거겠지.
‘백날 노력해 봐라. 내가 당신을 봐줄 일은 없을 테니.’
이미 기회는 충분히 줬다.
* * *
(중년 아저씨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더구나.)
노사가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그 같이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기분이 썩 좋지가 않습니다.”
(재벌 총수들한테 인기가 많다고 한 건데, 그게 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화제를 전환하였다.
“요즘 왜 그렇게 바쁘셨습니까?”
예전에는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봤었다.
노사가 누군가를 감시하느라 바빴을 때도 사흘에 한 번은 봤던 거 같은데, 최근에는 일주일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이유도 몰랐으니, 나로선 무척이나 답답하였는데 정작 오랜만에 나타나서 하는 이야기가 저런 이야기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종교를 만드느라 바빴다.)
“예? 뭐를 만드신다고요?”
(종교 말이다. 나를 믿는 종교.)
“사이비 종교를 만드셨단 말입니까?”
저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중요한 정보라도 찾아내고 있을 줄 알았건만, 뜬금없이 종교를 만들었다니?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도저히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 능력을 써먹기에 종교보다 적합한 게 없지 않으냐.)
그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게 느껴지기는 했다.
예전에도 농담 삼아 혜성 그룹 말고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 게 더 성장이 빨랐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종교를 갑자기 왜 만듭니까?”
(너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종교의 힘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기독교나 불교 뭐 그런 대중적인 종교만 말하는 게 아니야. 기업들이 세계로 뻗어나가듯, 사이비 종교들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영향력이 강해질 날이 올 거다.)
“그렇습니까?”
내가 시큰둥하게 대꾸하니 노사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내 도움받고서도 그런 표정을 짓나 보자.)
사이비 종교의 도움을 받는다니.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었다.
“지현이 결혼식은 보셨습니까?”
(봤지. 하나뿐인 여동생의 결혼식인데 안 볼 수는 없지 않으냐. 물론 이번이 처음 보는 결혼식은 아니지만 말이다.)
“노사께서 과거에 보셨던 결혼보다는 이번에 하는 결혼이 지현에겐 더 행복할 겁니다.”
그때는 이한철 명예 회장의 강요로 하게 된 정략결혼이었다.
남편도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니, 지현의 결혼생활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애 결혼인 데다가 김동윤의 됨됨이도 훌륭했다.
김동윤의 집안에서 지현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니 지현의 결혼생활은 기대할 만하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김동윤 그놈을 얼마나 감시했었는데? 감시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지현이는 행복해야만 해.)
“하, 하, 하.”
확실히 노사가 고생하기는 했었지.
나보다 더 지현을 걱정했었으니까.
뭐 노사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할 걱정이었지만.
(그런데 지분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지현이에게 계열사 넘겨주기로 한 거야?)
“아니요. 동윤이가 있으니, 계열사 하나 맡기려고 했는데 지현과 동윤이 모두 거절했습니다.”
(왜?)
“그냥 지금처럼 동윤이가 혜성 그룹에 남아있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하더군요.”
혜성 그룹의 지분은 내가 거의 다 가지고 있었지만, 혜성 건설이나 혜성 개발 등 혜성 그룹의 모태 기업들 일부 주식은 지현도 가지고 있었다.
이한철 명예 회장이 나눠준 것인데, 나는 이것을 정리해서 계열사 하나를 뚝 떼어줄 생각을 했었다.
처남인 동윤이를 일개 임원으로 두느니, 계열사 대표로 두는 게 사람들의 눈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보기가 더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현이나 동윤이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현상 유지를 선택하였고 나 역시 지분을 조금 더 나누어주는 것으로 이한철 명예 회장과 이야기를 끝냈다.
(흠. 그래?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김동윤이 재주는 좋다지만, 그렇다고 사업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예. 전자 쪽에서 힘을 키워 나중에 전자 대표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면 휴대폰 개발을 전담하게 하면 어떻겠냐?)
“휴대폰을 벌써 말입니까?”
(벌써는 아니지. 지금이 1988년이야.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기업들을 생각하면 그리 빠른 편이라고 볼 수도 없어.)
휴대폰이라.
나도 당연히 차기 먹거리 사업으로 생각하던 사업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시작할 거라고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에 노사의 말이 조금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이른 거 같긴 해도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손해 볼 것은 없긴 해. 어차피 나비효과로 휴대폰의 역사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말이야.’
자본은 충분하였다.
혜성 반도체에서 적자가 나지 않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도 사내 유보금에 여유가 생겼다.
지금쯤이면 은행권에서도 혜성 그룹에 대한 신뢰도를 큰 폭으로 상향 조정했을 것이고 말이다.
‘더군다나 혜성 반도체의 개발 자금은 정부의 지원으로 해결하면 되니, 더 자금은 여유롭지.’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동윤이에게 언질은 주겠습니다.”
(그래. 휴대폰 사업만 성공시킨다면 혜성 전자 대표를 시킨다 해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거야.)
뭐 어중간한 성공만 아니라면 그럴 것이다.
모토로라조차 놀라게 할 정도의 성공을 거둔다면 혜성 전자 대표 정도가 아니라, 그룹 부회장도 가능할 테고 말이다.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는군.’
* * *
나는 TV 속 김영산 당선인 후보의 말을 들으며 감탄하였다.
-저, 김영산은 한일 관계를 진전시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먼저 종군위안부 등 과거 청산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 어떤 정부에서도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다.
그런데 차기 대통령인 김영산 대통령 당선인이 직접 이 문제를 언급하니 크게 화제가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로 했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돌연 일정을 취소하는 등, 다소 극단적인 반응을 표출하였다.
“걱정스럽군요. 정권 초기부터 저런 발언을 한다면, 앞으로의 대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텐데 말입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솔직히 김영산 당선인의 발언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인데, 왜 우리가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위안부 문제도 결국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5공이 워낙 약점이 많은 정권이라서 감히 언급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통령 당선인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셔서 저런 발언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강경 발언을 했으니, 일단 정권 초기의 지지율은 확실하게 잡고 들어갈 겁니다.”
뭐 그게 아니라도 지지율이 원체 높으니, 김영산 대통령으로선 하고 싶은 일들을 웬만해서는 거침없이 할 수 있을 거다.
이를테면 하나회 해산이라던가, 부패 척결이라던가, 지방자치제 실시라던가 말이다.
‘덤으로 5·17 쿠데타의 주역인 5공의 주요 인사들까지 전부 척결해줬으면 좋겠군.’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까 싶었다.
5공을 향한 분노는 김영산 당선인이 나보다 크면 컸지, 작지는 않을 테니까.
똑똑!
“회장님, JS 그룹의 유정석 부회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기다리던 손님이 오자 나는 TV를 끄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오셨습니까, 장인어른.”
“불청객을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회장님.”
“불청객이라니요. 귀한 손님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용건을 들으신다면, 이 회장님도 저를 불청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떤 용건이신데 그러십니까?”
“조언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JS 그룹의 차기 먹거리 사업에 대한 조언을 말입니다.”
무슨 엄청난 것을 부탁하려고 왔나 걱정했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별 게 아니었다.
물론 JS 그룹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