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164화 (164/300)

164화 반도체를 키워주겠다고?

“대선 자체는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테러를 막은 시점에 이미 대선은 승리한 거나 다름없었다.

뭐 노태호 후보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 같지만 말이다.

-투사나 선동가만으로 북괴의 위협을 대처할 수 없습니다!

-강력한 수권 능력을 갖춘 저만이 북괴의 위협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노태호 후보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듯, 그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자기를 어필하고 있었다.

이번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을 그도 아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노력은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북괴의 위협을 다시금 피부로 체감하니, 테러를 막았던 경험도 있는 노태호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30% 정도에 불과하겠지.’

30%

많다면 많은 지지율이었다.

그래도 두려울 게 없는 게, 김태중 선생의 지지율까지 흡수한 김영산 후보의 지지율은 아무리 못해도 50%가 넘었다.

그야말로 국민 절반 이상에게 강한 지지를 받고 있으니, 대선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노사의 우려처럼 선거를 조작한다던가, 대선 이후에 다른 수작질을 할 수 있다는 게 문제지.’

5공이 깨끗하게 정권을 넘기고 물러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았다.

1988 올림픽으로 인해 다른 국가들의 관심이 한국에 쏠리고 있으니, 과격한 수단은 사용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5공이라면 또 모른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노사는 요즘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노사와 상의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는데, 아쉽게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테러를 막은 것처럼 또 무언가를 하고 계시는 건가?’

* * *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열심히 기도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사내의 이름은 윤태성.

그는 세간에 큰 화제를 받고 있었는데, 북괴의 테러를 막은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KAL 858의 평범한 승객이었던 그가 테러범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지만, 어쨌든 그가 테러를 막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이야.)

“처, 천지신명을 뵙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윤태성은 경건하게 절을 하였다.

바로 이 목소리!

윤태성의 목숨을 구해주고 북괴의 테러를 막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목소리 덕분이었다.

(또 무엇을 빌고 있느냐?)

“천지신명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를 구해주시고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그리 감사 인사를 전하자, 천지신명이라 불린 사내가 말했다.

(너의 목숨을 구해준 이유가 있다.)

“이유라 하시면?”

(네가 나 대신, 이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힘을 써줬으면 좋겠구나.)

“제, 제가 말씀입니까?”

(그래.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윤태성은 눈을 부릅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힘을 써 달라니.

봉사 단체라도 설립하라는 뜻일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 천지신명께서 바라는 일이니까.’

다니고 있는 직장이야 퇴사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가족도 없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천지신명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천지신명, 아니, 노사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간접적인 도움뿐만이 아니라, 종교를 이용해 직접적으로 혜성 그룹을 도울 수도 있겠군.’

그는 귀신의 몸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덤으로 재계에서 제일간다는 혜성 그룹의 정보력도 이용할 수 있었고 말이다.

이 이점들을 잘만 활용한다면, 신을 흉내 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다.

자신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정보만 그때그때 넘기면 알아서 신의 계시로 생각해 줄 테니까.

윤태성 같은 경우는 이미 테러를 예견한 시점에서 광신도나 다를 게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꽤 재미있어지겠어.’

혜성 그룹이 한창 성장해나갈 때야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재계 4위가 되면서 자신의 역할이 줄어들자 흥미가 조금씩 식어가는 것을 느꼈는데, 단일화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 재미란 다름 아닌, 역사를 바꾸는 재미였다.

‘혜성 그룹이 국내 제일의 대기업이 되었을 때, 나는 내 종교를 국내 제일, 아니 세계 제일로 만드는 거다.’

사이비 종교로 역사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 기대되었다.

* * *

이변은 없었다.

12월 16일.

김영산 후보는 59%라는 엄청난 득표율을 등에 업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마침내 이 나라에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이한성 회장님. 저 김영산입니다.

김영산 후보, 아니, 김영산 당선인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감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당선되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는 사실도 감격스러웠지만, 차기 대통령이 나에게 존칭을 한다는 사실도 감격스러웠다.

‘대통령에게 존칭을 받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물론 노태호 후보도 겉으로야 나에게 존칭을 해주었다.

하지만 군인 출신인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나에게 존칭을 해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였다.

아마 당선인 신분만 되어도 나에게 하대를 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대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본인이 당선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를 막 대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반면 김태중 선생이나 김영산 후보는 그런 면에선 안심해도 될 거 같았다.

대통령이 된다면 권위주의적으로 바뀔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군인 출신의 두 사람처럼 나를 막 대할 일은 없을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김영산 대통령 당선인님!”

-대통령 당선인이라. 하하, 아직은 어색할 따름입니다.

“준비된 대통령이시지 않습니까.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한창 바쁘실 텐데, 저와 전화를 나누셔도 괜찮겠습니까?”

-이한성 회장님인데 당연히 괜찮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통화로 끝날 게 아니라 술자리를 함께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내가 혜성 그룹의 회장이라서 저런 발언을 하는 것은 아닐 거다.

그보다는 이번 선거에서 나의 공이 어느 정도 있음을 인정하기에 저런 식의 말을 하는 것일 터.

“제가 뭐라고 그러십니까. 하하.”

-이한성 회장님은 저에게 은인이십니다. 아니, 저뿐만이 아니라 야당과 국민 전체의 은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도 내 공을 인정했지만, 김영산 당선인에게 직접 아첨 같은 말을 들으니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과찬이십니다.”

-노태호 후보의 득표율이 34%였습니다. 만약 제가 단일화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저는 역사의 죄인이 되었을 겁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게 이한성 회장님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단일화를 하지 못했고, 운이 좋아 테러도 막지 못했다면, 그때는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실제로 내가 역사를 바꾸지 않았다면, 김영산 후보가 말하는 그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을 거다.

두 사람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호 후보는 역사상 최저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겸손해질 필요가 없는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속으로 하는 생각일 뿐이었다.

아직은 30대에 불과한 나였으니, 적당히 겸손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재계 1위가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저의 조언이 아니었어도 두 분은 결국 단일화를 선택하셨을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이한성 회장님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 물질적인 걸로 보답을 해주던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침 김영산 당선인이 말했다.

-제 선거 캠프의 참모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정권에서 앞으로 키워가야 할 핵심 산업은 반도체라고.

“반도체 말씀입니까?”

-예. 전화로 깊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정부에서 혜성 반도체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김영산 당선인의 말에 나는 화색을 띠었다.

비록 수출이 잘 되고 있기는 해도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었다.

지금도 혜성 반도체는 일본 반도체의 발끝도 못 따라가고 있는 실정.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대대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였다.

‘어떤 식으로 지원을 해줄지는 몰라도 개발비만 지원해줘도 남는 장사다.’

개발비를 지원해주고 세제 혜택에 인재 육성까지 도와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감사합니다! 혜성 그룹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하,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역시 야당을 돕길 잘한 거 같았다.

뭐 이런 도움을 원해서 야당을 지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차기 정권이 기대되는군.’

권위주의적이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는데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 주기까지 한다니.

이러면 더더욱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곧 동생분이 결혼을 하신다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제가 직접 가지 못해서 안타깝군요.

대통령 당선인이 결혼식에 참석하면 지현에게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었다.

안 그래도 정재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많이 참석하는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동생에게 대통령 당선인님의 마음을 잘 전달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주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끊겠습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김영산 대통령 당선인과의 통화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 * *

반도체 호황이 찾아오자 혜성 반도체의 적자 폭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내년이면 적자를 없애는 수준을 넘어 흑자 전환까지 가능하다고 예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혜성 반도체 임직원들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혜성 자동차 매출 들었어? 1조 3천억이래!”

“1조를 넘길 거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렇게나 많이 나왔다고?”

“전자도 매출이 상당하다던데? 거의 1조에 근접하다나?”

“아니, 무슨 죄다 1조야. 재작년까지만 해도 그룹 총 매출이 1조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그만큼 우리 그룹이 빠르게 발전한다는 소리지.”

“젠장. 올해도 우리는 고개 숙이고 다녀야겠는걸?”

1987년 말이 되면서 혜성 반도체가 큰 매출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혜성 반도체 말고도 혜성 그룹의 계열사 전체가 크게 성장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전자, 자동차의 성장은 무시무시할 정도라서 자동차는 아예 1조를 넘긴 상태였다.

전자도 거의 1조에 가까워졌고 말이다.

이러니 혜성 반도체의 임직원들은 자화자찬할 새도 없이 본인들의 업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내년이면 우리도 당당하게 성과급을 받는 거야!”

“그래! 혜성 자동차가 올해 총 700%의 성과급을 받았다지? 우리는 1,000%를 받아 보자!”

한성은 1988년에도 반도체 호황이 이어갈 거라고 예상했다.

만약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혜성 반도체도 조 단위의 매출을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누군가의 바람처럼 월급의 1,000% 성과급 즉, 사실상 연봉을 한 번 더 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혜성 반도체 임직원들의 의욕이 넘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문제는 4M D램이야. 이거 양산을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직원들처럼 본인들의 업무에 집중하던 혜성 반도체 연구원들은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그 난관이란 다름 아닌, 4M D램의 양산 방식이었다.

회로를 위로 쌓아 올리는 스택이란 방식과 웨이퍼 표면을 아래로 파내서 지하층을 만들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고 작은 칩 제작이 가능한 트랜치라는 방식.

혜성 반도체는 이 두 가지 방식 중의 하나를 골라야만 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두 기술은 어떤 방식이 우세한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의 장점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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