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역사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역사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걱정입니다.”
단순히 노사가 거론했던 사태들만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설령 암살, 테러 등이 발생하지 않고 평화롭게 정권이 넘어간다 해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대통령이 바뀐 상황이었다.
노사가 알고 있던 역사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었으니,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네가 바뀐 역사가 한두 개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걱정을 해?)
“김영산 대통령이 무려 5년이나 일찍 당선되는 셈이 아닙니까. 이제까지 바꿨던 역사와는 차원이 다른 변화인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다. 네가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한 것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야. 재계에서는 오히려 이쪽이 더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봐도 무방해.)
“그렇습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검은 월요일도 날짜가 며칠 틀어져서 검은 수요일이 되지 않았느냐? 괜히 어설프게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아예 모르는 상태가 나을 수도 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란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노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미래 정보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충분하게 얻었으니, 미래가 달라지는 것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뭐 좋게 생각해야겠지. 어쨌든 미래가 더 긍정적으로 바뀐 셈이니까.’
단순히 혜성 그룹에만 이롭게 바뀐 것이 아니었다.
민주화를 무려 5년이나 앞당겼으니, 나라 전체를 이롭게 바꾼 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단일화 실패로 인해 겪게 될 정치 혐오나 지역 갈등도 겪지 않게 될 테니, 좋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김영산에게 얼마를 지원해줄 생각이냐?)
“100억. 딱 100억을 지원해줄 생각입니다.”
남들보다 늦었으니 통 크게 지원을 해줘야 했다.
물론 그래봤자, 쌍호 그룹이나 샤롯 그룹이 노태호 대표에게 지원해준 금액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도 지금쯤 패닉에 빠졌겠군. 3백억이나 투자했는데, 완전히 다 날아가게 생겼으니 말이야.’
나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안 그래도 우호적인 재벌들과 힘을 합쳐서 반 혜성 동맹을 고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종우 회장과 신진호 회장이 알아서 자충수를 두니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을 생각하면 김영산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 다행이군. 아무래도 김영산 후보가 김태중 후보보다는 단호한 면이 있으니 말이야.’
뭐, 양김 모두 결코 만만한 성격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종우 회장이나 신진호 회장을 응징할 때만큼은 김영산 후보가 더 적합할 거 같았다.
성격 자체가 화끈한 면이 있었으니 말이다.
* * *
“김 회장!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신진호 회장이 노기를 띤 얼굴로 김종우 회장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김종우 회장은 되레 역정을 냈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됩니까! 우리 다 같이 나가리 된 거, 딱 보면 몰라요?”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당신 믿고 노태호 후보에게 올인했건만!”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신진호 회장님도 두 사람이 단일화를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셨지 않습니까!”
김종우 회장의 뻔뻔한 모습에 신진호 회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놈만 아니었으면 노태호 후보에게 3백억을 투자할 일도 없었을 텐데!’
혜성 그룹에서 양김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태호 후보를 향한 지원을 철회할 생각까지 했었던 신진호 회장이었다.
하지만 김종우 회장은 그런 신진호 회장을 뜯어말리고는 노태호 후보에게 올인하게 만들었다.
마치 엄청난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듯, 호언장담하는 태도로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정보는 써보지도 못한 채 파국을 맞이하였다.
양김이 단일화를 선언했으니, 노태호 후보의 승리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제기랄!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당신 같은 무능하고 뻔뻔한 자와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결국, 신진호 회장은 콧김을 뿜어내며 그 같이 외쳤다.
김종우 회장과 완전히 결별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흥! 무능하기는 당신이 더 무능해! 맨날 똑똑한 척만 하지, 반 혜성 동맹을 만들고서 도대체 한 게 뭐야?”
“이자가 정말!”
끝까지 심기를 건드리는 김종우 회장의 모습에 신진호 회장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그와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쾅!
“빌어먹을! 이한성 회장이 양김을 지지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택으로 돌아온 신진호 회장은 서재의 책상을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쌍호 그룹과 결별한 것은 별로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3백억.
노태호 후보에게 투자한 3백억이 아까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 3백억의 투자로 계열사를 최소 5개 이상 늘릴 것을 기대하고 있었건만!
‘문제는 3백억보다 더 많은 돈을 잃게 생겼다는 거다.’
대선이 양김의 승리로, 정확히는 김영산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이 사실상 확정 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대로 김영산 후보에게 어떤 성의도 표하지 않은 채 대선이 끝나게 된다면 샤롯 그룹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될 거다.
지금까지 정부의 특혜를 받으며 성장해오던 샤롯 그룹이, 오히려 정부의 핍박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김영산 후보에게 충분한 성의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쌍호 그룹보다는 먼저 성의를 보여야 살생부에서 제외될 수 있다!’
사실 김종우 회장과 결별을 선언한 것도 바로 이러한 계산이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쌍호 그룹이 계속 노태호 후보를 지지해야 그의 가치가 더욱 빛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송호영 의원님. 저 신진호 회장입니다.”
샤롯 그룹의 폭넓은 인맥 중에는 당연히 야당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송호영 의원은 김영산 총재의 측근이자 당의 중진 의원이었다.
-신진호 회장님이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한창 여당의 선거를 돕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하, 하, 하.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신진호 회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첫인사부터 이렇게 적대심이 느껴지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전에는 몇 번 성의를 보이고 그래서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였는데 말이다.
-혜성 그룹 회장님께서 샤롯 그룹이 노태호 후보에게 3백억이나 되는 대선 자금을 지원했다고 하셨는데, 아닙니까?
‘또 혜성 그룹이야? 이런 개 같은!’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역시 혜성 그룹과는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모양이었다.
“3백억이라니. 저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하의 샤롯 그룹인데요. 모든 사업이 뒷돈 만들기 좋은 사업체들 아닙니까.
“오해입니다. 오해! 저는 어디까지나 노태호 후보의 협박을 받아서 얼마 지원해 준 거지, 3백억까지 지원해준 적은 없습니다!”
-그래요? 뭐 그건 그렇다 치겠습니다. 근데 전화 주신 이유가 혹시 우리 후보님으로 갈아타려고 전화 주신 겁니까?
송호영 의원은 대단히 노골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그 같이 물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그가 중진 의원이어도 신진호 회장에게 이렇게까지 무례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을 거다.
샤롯 그룹이 그래도 재계 10위의 재벌 그룹이었으니까.
하지만 김영산 후보가 당선될 게 확실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예외였다.
더군다나 신진호 회장은 이미 김영산 후보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
이때만큼은 신진호 회장이 절대적인 을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김종우 그놈 때문에 이런 수치를 당해야 한다니!’
돈을 주고도 욕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니 신진호 회장으로서는 분을 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 나라 대통령의 권력은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빅4의 기업들이라면 모를까, 재계 10위에 불과한 샤롯 그룹 정도는 닭 모가지 비틀 듯, 공중분해 시키는 것도 가능하였다.
“갈아타는 게 아니라, 저의 본심은 오래전부터 김영산 후보님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일단 알겠습니다.
“부디 후보님께 제 본심을 잘 전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해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예?”
-샤롯 그룹은 혜성 그룹과 적대 관계이지 않습니까? 또 5공과 너무 가깝기도 하고 말입니다.
“5공과 가까운 것은 그렇다 쳐도 혜성 그룹과 관계가 나쁜 것은 왜……?”
왜 또 혜성 그룹을 거론하는 걸까?
신진호 회장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후보님이 이한성 회장에게 빚을 진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샤롯 그룹도 별로 좋게 보시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
실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한성을 좋게 보면 혜성 그룹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유로 샤롯 그룹을 푸대접하는 것일까.
‘빌어먹을! 김영산이 권좌에 오르면 혜성 그룹의 기세가 더욱더 무서워지겠구나!’
정권과의 관계가 안 좋았을 때도 재계 10위에서 4위까지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장했던 혜성 그룹이었다.
그런데 대통령과 사이가 좋다?
당장 혜성 건설부터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컸다.
시공 능력만 따지면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혜성 건설이 지금까지 매출이 저조했던 것은 관급 수주를 적게 받아서였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혜성 그룹과 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겠어.’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송호영 의원의 반응만 봐도, 노태호 후보에서 김영산 후보로 갈아타려면 일단 혜성 그룹과의 관계 개선이 꼭 필요해 보였으니 말이다.
* * *
노태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됐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는 단일화가 될 가능성이 0%에 수렴했었는데!
‘이한성, 그자 때문인가?’
보안사에서 전하기를, 김영산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혜성 그룹이 자주 언급된다고 한다.
김태중 전 후보를 설득한 게 혜성 그룹 회장이라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나, 보안사가 거짓 정보를 전했을 리는 없었다.
결국에 이번 단일화에 한성이 크나큰 역할을 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든 그자를 여당의 편으로 삼았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미국에서 반도체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때부터, 한성의 가치가 상향 조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성을 영입했어야 했다.
하지만 자존심.
빌어먹을 자존심 하나 때문에 한성을 회유할 생각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 진 것은 아니다.”
노태호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이미 그의 지지 세력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하나둘 야당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핵심 지지자들조차도 승리를 포기한 상태.
그만큼 이번 대선은 여당에 절대적으로 불리하였다.
‘곧 북쪽에서 일을 터뜨려 줄 테지. 그때, 각하와 함께 계획했던 것을 진행한다면 선거 따위야 내 뜻대로 될 수 있다.’
대선 자금만큼은 어떤 후보보다 풍부하였던 노태호였다.
그리고 노태호는 이 대선 자금 일부를 북쪽에다 보냈다.
한화로 대략 150억 정도 되는 자금을 말이다.
자본주의 권력자들보다 더 탐욕이 강한 북쪽의 돼지들이라면 이 돈을 받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88 올림픽을 저지해야 한다는 그들만의 명분도 있었으니까.
“후, 후보님!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우리 항공기를 테러하려던 북괴의 테러범들이 붙잡혔다고 합니다!”
노태호는 눈을 부릅떴다.
북쪽과 관련된 소식을 기대했었지만, 이건 결코 그가 기대했던 소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