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160화 (160/300)

160화 정치는 무슨

미소를 짓던 나는 이내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민주화 열사도 아닌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네.’

몇 년 전의 나였으면 모른다.

그땐 김태중 후보와 김영산 후보를 마음속 스승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나 기업가였다.

당연하겠지만, 대선에 관여해서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만들 생각 따윈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야당의 열렬한 지지자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

이런 내 상황이 뭔가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 그리고 저 시스템 반도체를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이호승 회장이 화제를 전환하듯, 그 같이 말하였다.

“현명하신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회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성 그룹이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라.

나쁘게 볼 일은 아닌 거 같았다.

뭐, 애초에 내가 추천해준 일이기도 했지만.

“사업 방향도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개발과 연구만 저희 쪽이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럼 생산은 어느 업체가 합니까?”

“이전에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동현 반도체에 맡길까 생각 중입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일성에서 얼마만큼 투자할지는 모르겠지만, 혜성에 이어 일성까지 고객으로 얻었으니 동현 반도체가 커지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현 반도체가 부디 대만의 TMSC 자리를 대신했으면 좋겠군.’

내 지분이 무려 30%나 들어가 있었다.

한제인 사장이 나중에 혜성 반도체의 자본을 추가로 받는다고 했으니 내 지분은 더 늘어날 터.

동현 반도체가 잘 되면 결국 나에게도 이익이기 때문에 나는 동현 반도체의 성공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 * *

쌍호 그룹, 김종우 회장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노태호 대표님께서 혜성 그룹에 앙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이한성 회장과의 대화가 잘 안 풀렸나 봅니다.”

“당연히 안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수전노가 3백억이나 되는 돈을 지원할 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신진호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도 3백억이나 되는 돈을 지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었다.

김종우 회장과 동석한 자리에서 얼떨결에 3백억을 약속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이자는, 3백억을 뜯기게 되었으면서 아주 좋아 죽는군. 만에 하나 노태호 대표가 낙선하면 어쩌려고, 쯧.’

노태호 대표가 당선된다면야 3백억 정도는 아까울 게 없었다.

3백억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혜성 그룹의 계열사 한두 개 정도는 받아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노태호 대표의 당선 가능성이었다.

“저는 솔직히 걱정됩니다. 과연 노태호 대표가 양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그런 걱정을 하고 계십니까?”

신진호 회장의 우려에 김종우 회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의 적이긴 해도 이한성 회장의 식견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한성 회장이 야당을 선택했으니, 솔직히 우려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한성의 선택이었다.

반 혜성 동맹을 결성한 사람답게 한성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그였으니,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대선은 반드시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날 겁니다.”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람이 호언장담을 해봤자,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신진호 회장은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은 채 물었다.

“뭘 믿고 그렇게 장담하십니까? 어떤 언론에서도 양김 중 누가 이길지를 주목하고 있지, 노태호 대표의 승리를 예측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언론뿐인가?

여론은 이미 야당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6.10 민주 항쟁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7월 9일, 한 청년의 장례식에는 무려 160만 명의 시민이 모였었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여당과 정부를 증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신진호 회장으로선 패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양김은 절대 단일화를 하지 못할 거라고.”

“뭐 그거야 저도 듣고 이해했습니다. 권력욕도 권력욕이지만, 그들의 지지자나 지역감정 문제를 생각하면 단일화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신진호 회장도 단일화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야당에서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일화를 하면 둘 중 한 명은 대선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승리를 확신하는 상황에서 대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기부와 보안사가 여당의 편에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미 두 정보기관에서는 양김을 분열하기 위한 여러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역감정만 잘 선동해도 단일화는 절대로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양김이 단일화를 하지 않아도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거 아닙니까?”

“안보를 먼저 생각하는 애국자들과 변화를 원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을 생각한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습니다.”

“기득권이라고 해봐야 표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지금 상태로는 표가 얼마 안 나올 수도 있겠지만, 북풍이 일어나면 그때는 30% 이상 나오지 않겠습니까?”

김종우 회장의 그 같은 말에 신진호 회장은 눈을 빛냈다.

북풍!

확실히 북풍이 일어난다면 승산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없었다.

군인 출신이라는 것이 유일하게 이점으로 작용하는 게 바로 북풍이 일어났을 때이니 말이다.

“따로 들으신 이야기가 있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짐작입니다만, 선거 중에 테러라던가, 뭐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짐작이라고 말했지만, 신진호 회장은 속으로 확신했다.

김종우 회장이 자신은 알지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김종우 회장은 오래전부터 5공의 총애를 받았던 자이니, 자신보다 훨씬 더 내밀한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북풍이라. 이거면 걸어볼 만하다.’

3백억을 준다고 약속하기는 했지만, 확신이 생기지 않는 한, 이 핑계 대고 저 핑계 대며 미룰 생각이었다.

노태호 대표가 낙선이라도 한다면 3백억도 잃고, 야당의 적까지 되니 좋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김종우 회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확신이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가, 심지어 이한성 회장까지 양김의 승리를 점치고 있을 때, 여당이 변수를 일으킨다면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군요.”

“그냥 재미있기만 하고 말겠습니까? 이한성, 그놈이 아주 후회하게 될 겁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이한성 회장은 차기 대통령을 적으로 돌렸군요.”

“예,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 노태호 대표가 이한성 그놈에게 앙심을 품고 있으니, 내년이 되면 혜성 그룹도 지금처럼 잘 나가지는 못할 겁니다.”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하!”

두 사람은 여당이 벌써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축하며 기뻐했다.

* * *

사무실에 출근한 강현구는 피로감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강 대리님 오셨어요?”

“좋은 아침.”

“얼굴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신데요?”

“어제 좀 많이 마셨거든.”

“유니시스였죠? 어제 영업했던 곳이.”

“어.”

“어떻게 될 거 같나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처음엔 일본 회사인 줄 알고 기대하더니, 우리가 한국 회사인 걸 알고는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더라.”

강현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음 혜성 반도체의 영업사원으로 미국 지부에 왔을 때, 그는 자신감이 넘쳤었다.

성격도 영업에 잘 맞았고, 영어도 잘했기에 미국에서의 영업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인센티브를 두둑하게 받으며 고속 승진하는 미래를 꿈꿨었는데, 정작 인센티브는커녕 기본 급여도 눈치 보며 받고 있었다.

‘일성이 아니라 혜성이란 이유로 무시를 당하다니!’

IT 관계자들은 일단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봤다.

물론 일본인이라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봤겠지만, 그는 한국인이었고 혜성 그룹도 한국 기업이었다.

미국인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몰랐기에 혜성 반도체의 제품이 가격도 낮고 수율이 더 우수한데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나마 일성 전자라면 예외였겠지만, 혜성 반도체였으니 더더욱 영업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가 우리 그룹의 것이 되었는데도 왜 그걸 몰라주는 거야!’

그가 우수한 영어 실력으로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 줘도 상대 미국인은 혜성 반도체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반도체 회사의 제품들도 1달러면 살 수가 있었다.

구태여 인지도 없는 혜성 반도체의 제품을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아. 이래서야 언제쯤 한국으로 금의환향하냐.’

강현구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따르릉!

벨 소리가 울리자 강현구는 빛보다 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이 번호가 혜성 반도체의 번호 맞나요?

“예! 혜성 반도체 대리, 강현구입니다! 어디서 전화를 주셨나요?”

-여기는 아메리칸 메가트렌즈라는 회사인데, 혜성 반도체에서 64K D램을 생산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를 듣고 강현구는 눈을 부릅떴다.

아메리칸 메가트렌즈라면 그도 알고 있는 IT 회사였다.

언젠가 이곳에 영업하다가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아메리칸 메가트렌즈에서 먼저 연락을 주다니.

“예! 혜성 반도체에서는 64K D램뿐만이 아니라, 256K D램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충분합니까?

“물론입니다. 생산량 하나는 업계에서 제일간다고 자부합니다.”

이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세 개의 라인을 동시에 증설하던 혜성 반도체였는데,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까지 인수하였다.

지금 가동하고 있는 라인 수만 세 개이니, D램 하나만큼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혜성 반도체와 계약하고 싶습니다. 저희와 계약을 해주시겠습니까?

강현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스!

행운의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계약을 따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 계약 규모도 심상치 않았다.

1년 동안 무려 백억에 가까운 규모의 공급 계약을 따낸 것이다.

-여보세요? 혜성 반도체인가요?

하지만 행운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다른 IT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이 역시도 혜성 반도체의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걸려온 전화였다.

‘드디어! 드디어 내 꿈을 이룰 수 있겠구나!’

아메리칸 메가트렌즈와 따낸 계약만으로도 엄청난 인센티브를 받게 될 것인데, 추가로 계약을 따냈으니 당장 금의환향하는 것도 가능할 거 같았다.

* * *

11월이 되었지만, 양김의 갈등은 더 커지면 커졌지, 단일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유세 과정에서 상대 후보자에게 돌을 날리는 식으로 갈등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이미 양측의 지지층은 서로를 적대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아주 보안사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군.’

제삼자가 보기엔 그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누가 봐도 5공 정권의 수작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줄 수도 없었기에 답답한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하루 만에 3백억 원의 공급 계약을 따냈단 말입니까?”

-예. PC 붐에 힘입어 64K와 256K D램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반도체 가격이 올라가면서 매출도 많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됩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반도체 붐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3백억 정도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매출은 더욱 많이 증가할 것이다.

백억 단위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정치는 내 뜻대로 안 되는데, 사업은 계획대로 잘 돌아가는군. 역시 나는 천생 사업가로 살아야 할 운명인가.’

미래 그룹의 왕 회장처럼 정치에 뜻을 두거나 하는 일은 내 인생에 없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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