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이 정도면 바꿔볼 만할 거 같은데?
“정치도 정치지만, 노조 문제도 심각해 보이더구나.”
이한철 명예 회장이 화제를 전환하며 노조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그로서는 정치보다 이쪽이 더 걱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정치야 5공과도 사이가 안 좋았으니, 더 나빠질 것도 없을 테지만, 노조는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미래 자동차만 해도 연신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위와 파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공장 가동에도 차질이 벌어질 정도였다.
“노조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이냐?”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줄 생각입니다.”
내 말에 이한철 명예 회장이 미간을 좁혔다.
“너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이야기겠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하나를 들어주면 끝도 없이 들어줘야 해. 노동자들이 처음에는 노동 시간이나 임금에 관한 요구를 하겠지만, 그 뒤에는 경영까지 간섭하려 들 거다.”
그의 우려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노사가 이야기해 준 대로 미래가 흘러간다면 미래 자동차는 공장을 어디에 유치할지조차 노조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야말로 갑과 을이 완전히 역전된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물론 저도 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여, 회사에 충성심이 강하고 경영진과 상생할 수 있는 사람들 위주로 노조를 구성할 생각입니다.”
“아예 네가 주도해서 노조를 만들 거란 말이냐?”
“겉으로야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 저에게 허락을 구하는 식으로 가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제가 노조를 통제할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본식 노조였다.
회사가 어려우면 자진해서 월급을 삭감하는 게 바로 일본식 노조였는데, 나는 우리 그룹에 만들어질 노조도 회사와 상생할 수 있는 노조가 되게끔 유도할 생각이었다.
물론 월급을 삭감하는 일 따위야 우리 그룹에서는 결코 없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흠, 의외구나. 재벌 총수인 네가 노조에 그렇게 긍정적이라니.”
“노조에 긍정적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긴, 다른 그룹의 상황들을 보면 심각해 보이긴 하더구나. 미래 그룹에서는 거의 모든 계열사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있다지?”
“예. 미래 그룹에서도 곧 노조가 만들어질 겁니다. 물론 왕 회장은 노조를 용납하지 않을 테니, 경영진과 노조 간의 기나긴 싸움이 이어지겠지만 말입니다.”
지금도 사실상 전쟁 상태나 다를 게 없었다.
아마 이런 상태가 몇 달은 지속되다가 결국 왕 회장이 항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너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구나. 민주주의 시대가 된다면 노조를 만드는 것도 시대의 흐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이한철 명예 회장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나에게 물었다.
“노조를 구성할 명단은 다 뽑았느냐?”
“아직 다 뽑지는 않았고, 최대한 온건하면서 회사에 충성하는 인물들 위주로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명단 하나를 줄 테니, 그 명단에 적혀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노조를 구성해도 좋을 거 같구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 경영이나 사람 쓰는 일에 간섭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이한철 명예 회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명단을 준다고 하니,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회사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정확히는 내 비자금을 만들어줬던 사람들이지.”
“……!”
“솔직히 충성심 같은 걸 어떻게 증명하겠냐? 내가 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약점이 있다면 다르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말은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만큼 확실한 약점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자들은 아버지의 약점도 손에 쥐고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은퇴한 내가 그런 약점 따위야 두려울 게 뭐 있겠어. 걱정할 거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그 사람들도 어쨌든 나를 따라줬던 사람들이니, 노조의 간부로 만들면 나야 고마울 뿐이다. 돈밖에 챙겨준 게 없어서 미안하던 참인데 말이야. 아, 물론 그들이 너의 뜻에 거스른다면 얼마든지 보복을 해도 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더는 걱정할 필요 없는 걸 알게 됐으니, 나는 이만 가보마.”
“들어가십시오.”
이한철 명예 회장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 * *
혜성 그룹이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10대 기업 대부분에서 결사적으로 막고 있는 노조 설립을 혜성 그룹에서는 용인해 주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안 그래도 혜성 자동차와 비교 대상이던 미래 자동차는 거의 폭발할 거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허허, 이한성 회장이 놀라운 결단을 내렸군.”
김태중은 신문을 보며 한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게 느껴지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더욱더 향상되고 있었다.
‘이한성 회장이 처음 노동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만 해도 신문에서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찬사뿐이군.’
한성에 대한 평가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었다.
김태중이 생각하기에도 한성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은 실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번 노동자 대투쟁만 해도 그랬다.
다른 재벌과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동자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과적으로 가장 온건하게 사태를 해결하고 있었다.
하청 업체에서만 몇 번 일이 생겼을 뿐, 혜성 그룹 안에서는 단 한 번의 시위나 파업이 발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미래 그룹의 왕 회장도 이한성 회장을 본받았으면 좋았으련만.’
미래 그룹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격 시위는 그도 별로 반기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노동자의 권익을 중요시한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지금처럼 피를 흘리면서까지 사측과 싸우는 것은 김태중도 절대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한성 회장이 노태호 대표의 당선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는 거 같아서 그게 조금 의문이군.”
이번 노동자 대투쟁뿐만이 아니라, 혜성 그룹을 재계 4위로 일으키기까지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었던 한성이었다.
반도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 놀라운 수준을 넘어 경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반도체조차 최근 들어 재평가가 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점점 일본 반도체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김태중으로선 한성의 우려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야당이 필패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당원들이야 그럴 리가 있겠냐며 황당해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군.’
노태호 대표가 보내는 러브콜도 무시하고 야당 쪽으로 붙은 한성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우려를 표하는 것이 아닐 터.
분명 무언가의 조짐을 보고서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일 거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국민들이 군인 출신인 노태호를 뽑을 리가 없을 텐데.’
지금의 그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노태호 대표가 ‘보통 사람’을 표방하며 선거에 나설 것이란 사실을.
물론 선거 막판에 테러가 발생하여 안보 우선을 원하는 사람들이 노태호 대표에게 표를 던질 것이란 사실도 말이다.
‘우선 김영산 총재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아직 두 사람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 다 본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노태호 대표가 한성의 우려처럼 막강한 후보가 될 수도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군인 출신이 국민의 손에 의해 당선되는 사태만큼은 피해야 했으니까.
* * *
나도 그렇지만, 요즘 재벌들의 최대 관심사는 대선과 노조였다.
그래서일까?
나를 찾는 재벌들이 늘어났다.
“이 회장, 어떻게 될 거 같은가?”
“뭐가 말입니까?”
“양김 중에 누가 될 거 같냐고.”
정우 그룹의 권오중 회장이 직접 나를 찾아와서는 그 같이 물었다.
“글쎄요.”
“글쎄라니. 우리 사이에 그러긴가?”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나는 그의 말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저도 정말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모른다고? 자네가?”
“저는 일개 기업가입니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흠, 자네라면 알 줄 알았는데.”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겁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저리 시끄럽게 굴 것도 자네는 다 예상하였잖아?”
노동자 대투쟁이야 예측할 근거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반면 대통령 선거의 경우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미래를 바꾸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입니다. 우연.”
“그럼 이것만 알려주게. 양김 중의 한 명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야당 편에 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야당의 승리를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많은 아군을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일부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자 권오중 회장이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5공 정부와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으니, 야당 편에 서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을 거다.
아마 내가 아니었으면 한 다리씩 걸치며 간을 봤을 테지.
‘야당이 이겨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권오중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은성 그룹과 세계 그룹, 도레미 그룹 그리고 JS 그룹까지 끌어들인 상태였다.
나 하나의 운명이 걸린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니지. 일성 그룹도 포함이구나.’
물론 일성 그룹의 이호승 회장은 대선과 관련해서 나에게 어떤 조언도 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내가 예언했던 노동자 대투쟁이 정확히 7월에 일어났는데, 이호승 회장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마침 다음 날이 되자, 이호승 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정말로 존경스럽습니다. 이한성 회장님.”
이호승 회장은 나를 보자마자 감탄한 얼굴로 그 같이 말했다.
“존경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모든 게 회장님의 예측대로 되었지 않습니까! 반도체부터 시작해서, 미래 그룹이 노동자들 때문에 골치 썩이게 되는 것까지 모든 게 말입니다!”
흥분한 그의 모습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에게 미래 자동차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길 잘한 거 같았다.
나비효과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예측이 적중했을 때의 효과는 실로 엄청났으니 말이다.
‘앞으로 나에게 반기를 들 생각은 절대 못 하겠지?’
내가 회장직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상, 절대 나에게 반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내가 인수했던 반도체 사업부에 대해서도 욕심을 부리는 일이 없을 것이고.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하하. 회장님의 운을 저도 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저와 친해진다면 그거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혜성 그룹과 끈끈한 동맹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일성 그룹에서 먼저 동맹을 제안하다니.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물론 나는 새삼스럽게 그런 일에 기뻐하지 않았다.
그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일성에 은성, 정우 그룹까지. 이 정도면 역사를 바꿔볼 만할 거 같은데?’
빅 4 중 세 곳이 모였으니 대통령을 바꾸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