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이딴 호의는 필요 없다
노태호 대표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하는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무조건 3백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어.’
만약 승리가 불확실할 때는 이렇게까지 강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여당 대표라고 해도 나는 재계 4위의 대기업 회장이었다.
함부로 대할 상대는 아니라는 뜻.
그런데도 3백억을 강요하는 모습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북풍 변수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가 이번 대선에서 북풍을 이용할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근데 승리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면 왜 내 돈을 탐내는 거야?’
나는 잠시 그런 의문을 품었는데 의외로 정답은 간단했다.
노태호 대표가 나를 좋게 보고 있었기에 오히려 3백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야지만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에게 무언가를 베풀 수 있는 명분이 될 테니 말이다.
“쯧. 그딴 도움 필요 없는데.”
기화 자동차?
누군가 도와주지 않아도 나 혼자서 인수할 수 있었다.
내 자금력은 내후년만 되어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그러니 노태호 대표의 선의가 나로서는 거슬리게만 느껴졌다.
애초에 그걸 선의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일단 박성호 사장과 만나봐야겠어. 김태중 선생의 생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할 거 같으니 말이야.’
양김 중 누구를 선택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로 정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단일화였다.
솔직히 둘 중 누가 되건, 노태호 대표가 낙선되는 게 나에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미 나는 노태호 대표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기로 하였으니 말이다.
* * *
6월 29일, 노태호 대표가 직선제 수용 선언을 함으로써 6.10 민주 항쟁도 마침내 끝이 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회장님,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박 사장님을 다시 뵙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내 말에 박성호 사장은 흐뭇하게 앉은 뒤 앞쪽 방석을 가리켰다.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국에 저를 찾아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업가끼리 만나는 것인데,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하하, 회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문제 될 게 없겠군요.”
“뭐 그렇다고 시국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당연히 나는 사업 이야기나 하려고 그를 찾은 게 아니었다.
내가 그를 찾은 목적은 어디까지나 김태중 선생의 생각을 알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단일화를 하게 만들어야 할 텐데, 내가 과연 두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속으로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혜성 그룹 회장으로서의 내 존재감은 재계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 대선 후보도 아닌 상태이니, 내가 작정하고 설득한다면 단일화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박 사장님도 당연히 그렇겠지만, 김태중 고문님이 무척이나 기뻐하실 거 같습니다.”
“하하,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국민의 승리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우리나라에 민주화가 꽃 피게 되었으니 기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더욱더 발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다른 재벌 총수들이라면 이런 말을 하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5공이 언제 어디서 도청하고 있을지 몰라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서 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더는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노태호 대표가 무리하게 3백억을 요구한 시점에서 나는 이미 그들과 극단적인 관계가 되는 것도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역시 회장님은 다른 재벌들과 달리 시민의식이 깨어있으신 거 같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사고관입니다.”
“혜성 그룹에서 노동자들을 많이 배려해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다른 그룹도 혜성 그룹을 본받아야 할 텐데, 참 아쉽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자연히 그렇게 바뀌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박성호 사장은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치 정권이 바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노태호 대표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란 사실을.’
노태호 대표, 본인 말고는 누구도 예상 못 했을 거다.
6월 민주 항쟁에서 거리로 나온 인파의 수만 생각해도 그랬다.
전국 각지의 시위 참가자의 숫자만 150만 명이 넘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걱정이라니,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혜성 그룹에서 걱정하는 것도 있습니까?”
“얼마 전, 노태호 대표가 저를 불렀습니다.”
나는 박성호 사장을 통해 김태중 선생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노태호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노태호 대표가 저에게 대선 준비 자금으로 3백억을 요구하더군요.”
“허어, 3백억을 말입니까?”
박성호 사장이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놀랄 정도로 300억이란 돈은 터무니없는 돈이었다.
‘반도체 공장도 세울 수 있는 돈인데 더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완곡하게 거절을 표하니,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태도로 후회할 거라고 하더군요.”
“여당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있단 말입니까?”
“적어도 노태호 대표의 분위기는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그에게 필승의 대선 전략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필승의 전략이란 북풍일 거다.
덤으로 양김을 분열하는 전략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필승 전략이라. 하하, 선거 조작이라도 생각하는 게 아니고서야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주의를 줬건만, 박성호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야당이 선거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티끌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거 같았다.
“샤롯 그룹과 쌍호 그룹에서는 노태호 대표의 승리를 예상하는 거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노태호 대표가 직접 본인의 입으로 그들이 3백억 정도를 지원해 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정확한 사실은 저도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허어. 두 기업이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5공의 총애를 받았던 기업들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거 같습니다.”
내 말에 박성호 사장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빅 4의 기업들은 이미 저희 고문님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는데, 참으로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빅 4의 기업들이라면?”
“흠흠, 대외비이긴 한데 회장님이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정우 그룹과 은성 그룹과 좋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은성 그룹은 그렇다 치고 정우 그룹은 의외였다.
‘뭐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지. 원래 재벌들이야 한 다리씩 걸치기 마련이니.’
박성호 사장이야 정우 그룹과 은성 그룹이 김태중 선생을 지지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하였다.
아마 뒤에서는 노태호 대표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후환이 없을 테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노태호 대표가 이상하게 나한테만 집착하니 그게 안 된단 말이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박성호 사장에게 말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노태호 대표를 조금은 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테러를 막은 일도 있고 해서, 노태호 대표의 국민적 반감이 생각보다 크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확실히, 작년에 그런 일이 있긴 했었군요.”
“예. 그리고 쌍호와 샤롯에서 3백억씩 지원하여 자금력 싸움을 한다면 야당에서 불리할 수도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조금 경각심이 생겼는지 박성호 사장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3백억씩, 총합 6백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선거에 변수를 주기에 충분한 자금이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조언은 제가 김태중 고문님께 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부디 내 이야기를 잘 전달해서 김태중 선생이 단일화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고려하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이한성 회장이 야당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예, 그렇습니다.”
보안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구창희의 보고에 노태호는 혀를 찼다.
“이 사람 이거 안 되겠군.”
3백억이 큰돈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대통령만 된다면 그 3백억이 얼마가 될지 모른다.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3백억도 그리 큰돈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기화 자동차건, 아니면 다른 어떤 기업이든 인수를 도와주려고 했건만.’
그는 어디까지나 혜성 그룹에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대선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회를 줬는데도 거절하다니.’
아직 확답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는 것만 봐도 혜성 그룹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불 보듯 뻔하였다.
“혜성 그룹도 적이라고 생각해야겠어.”
“원래도 불순한 자들이었습니다. 각하께 하는 행동만 봐도 애국심이 없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한테는 제법 예의를 갖추기에 한번 기회를 줬었더니, 그게 내 실수인 거 같군.”
노태호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혜성 그룹은 적이라고 말이다.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이 반 혜성 동맹이란 것을 만들었다지?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그 동맹을 지원해줘야겠어.’
자신의 호의를 거절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대통령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혜성 그룹을 응징할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대선이 더 중요하니 나중을 기약해야겠지만 말이다.
* * *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오시고 싶을 때 편하게 오셔도 저는 좋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이한철 명예 회장이 오랜만에 사옥을 방문하였다.
잠실 사옥이 만들어지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요즘 시국이 심상치가 않은 거 같던데. 회사는 잘 돌아가고 있느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나 싶더니,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내가 걱정되어서 찾아온 듯싶었다.
“예. 다행히 사업은 순항 중입니다.”
“다행이구나.”
“혹시 정부나 여당 측의 압박을 받고 계십니까?”
뭔가 이한철 명예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물어보니, 이한철 명예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당에서는 이미 네가 야당 측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구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긴, 내가 너무 눈에 띄게 움직였으니 여당에서도 나를 안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야당을 지지하고 있느냐?”
“노태호 대표가 3백억을 요구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양김 중의 한 명을 지지해야 할 듯싶습니다.”
“3백억을 요구했다고? 허어.”
놀라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정부에 시달리셔서.”
“나야 이렇게밖에 그룹을 도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그보다 걱정이구나. 만에 하나 노태호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쩔지.”
“…….”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사실 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김영산 총재건, 김태중 선생이건 둘 다 본인이 선거에 나갈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지.’
두 사람의 측근들을 만나 위기감도 심어주고 은근하게 단일화를 거론해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다시피 했다.
이대로라면 본래 역사대로 노태호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것만 같았다.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네가 괜히 야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이한철 명예 회장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라면 나를 믿어준다는 말에 기쁨을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왠지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