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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57화 (157/300)

157화 기화 자동차 인수를 도와주겠다고?

나는 고민하다가 노태호 대표의 눈빛을 봤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어서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예 지원을 안 해줄 수는 없겠지?’

노태호 대표가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아주 컸다.

나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노태호 대표를 지원하고 싶지 않았지만, 혜성 그룹을 생각하면 약간의 지원 정도는 해줘야 했다.

대략 30억에서 50억 정도를 지원한다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입니다. 여당에서 저희를 위해 힘 써주는데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여력이 되는 대로 지원을 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바라는 금액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주면 주는 대로 받을 것이지, 저런 말을 하니 짜증이 났다.

‘그니까 그 금액이 얼만데?’

속으로 화가 났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생각하신 대선 자금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혜성 그룹을 굉장히 좋게 보고 있어요. 이 회장의 덕을 보기도 했고 말이죠.”

왜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액수만 말하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혜성 그룹에서는 이 정도만 주시면 될 거 같아요.”

노태호 대표가 손가락으로 3을 가리켰다.

“30억,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하의 혜성 그룹이 30억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러면 설마?”

“예. 3백억을 주세요.”

나는 눈을 부릅떴다.

3백억이라니?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미쳤군!’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만큼 노태호 대표의 요구는 터무니없었다.

“대표님. 아무리 혜성 그룹의 규모가 커졌다고 해도 3백억을 마련하는 것은…….”

“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말은 안 하셨으면 좋겠군요.”

“…….”

“저도 소문을 들었어요. 플라자 합의가 이뤄지기 전부터 일본 부동산에 투자하셨다면서요?”

“개인적으로 모은 금액이라 그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제가 조사했을 때는, 아무리 못해도 수십억은 될 거 같던데, 아닌가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노태호 대표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노태호 대표가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고 있는지 모르니, 거짓말해 봤자 득 될 것이 없을 거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말에 수긍하고 3백억을 지원해 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 그룹의 양 회장님 자금도 포함되어 있어서, 함부로 돈을 빼기가 쉽지 않습니다.”

괜히 양희수 회장님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어차피 노태호 대표도 알고 있을 정보였다.

차라리 양희수 회장님을 거론하여 위기에서 모면하는 게 현명한 판단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노태호 대표는 3백억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회장, 계속 변명하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아요. 일본 말고도 국내 자산도 만만치 않을 텐데, 현금 3백억 만들기가 그리 어려워요?”

“어떤 재벌 그룹도 대선 자금으로 3백억을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쎄요.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은 아닌 거 같던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노태호 대표의 입에서 하필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의 이름이 나오다니.

‘설마 그 두 사람이 노태호 대표에게 내 자산 규모를 언급한 건가?’

왠지 그런 거 같았다.

두 사람이라면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서든 나를 방해하려 들었을 테니 말이다.

“이 회장. 내가 그냥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당이 기업가의 이익을 얼마나 잘 대변해 주는지 알면서 그렇게 빼는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단기간에 3백억의 비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저로서도 힘든 일입니다.”

모으자면 못 모을 것도 없었다.

일본의 자금만 가져와도 3백억이야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지금 가져올 3백억이 몇 년 뒤에는 천억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무지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친하기는커녕 오히려 노태호 대표 쪽에서 나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3백억을 뜯으려고 압박하니 나로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수 있다면요?”

“……예?”

“요즘 미래 자동차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던데,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흠칫하였다.

내가 기화 자동차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노사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노사조차도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노태호 대표가 기화 자동차를 언급하니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노태호 대표가 내 생각을 눈치채고 기화 자동차를 언급한 것은 아닐 거다.

내 머릿속에 계획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그가 알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매력적인 제안이긴 해. 차기 대통령이 나서서 기화 자동차 인수를 도와준다면, 실패할 일은 없을 테지.’

대통령의 권력은 실로 엄청났다.

기화 자동차 급의 회사 하나를 공중분해 시키는 거야 일도 아닐 정도였다.

심지어 그 회사를 인수하는 회사에 파격적인 혜택을 주는 것도 가능하였다.

이를테면, 원리금 상환을 최대 30년까지 유예한다던가, 부채상환 밑천의 명목으로 이른바 종잣돈을 지급해준다든가 하는 그런 혜택 말이다.

실제로 5공 정권 때도 거의 인수 금액만큼의 은행 돈을 지원받고 사실상 공짜로 회사를 인수한 적도 적지 않았다.

노태호 대표의 정권 초기에도 당연히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 테니, 지금 노태호 대표가 하는 말도 결코 허언으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5년짜리 시한부 권력이잖아.’

5년 동안 특혜를 누리면 뭐 하나.

그 뒤로 10년 동안 온갖 핍박을 받을 텐데.

덤으로 청문회에 끌려가는 것도 일상이 될 테고 말이다.

나는 결코 그런 미래를 원하지 않았기에, 노태호 대표의 말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노태호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회장. 한번 생각해 보시고 천천히 결정을 내려주세요. 부디, 양김을 지지하는 그런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양김 운운하는 것을 보면 그도 김태중, 김영산 두 사람을 가장 위협적인 상대로 보고 있는 거 같았다.

하기야, 두 사람의 국민적 인기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마음에 안 드는군.’

나는 혀를 찼다.

재계 4위가 되었는데도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대선에 관여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어.’

노태호 대표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혜성 그룹이 재계 1위가 된다 해도 별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할 거 같았다.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노태호 대표도 지금 대통령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니, 일찍이 줄을 선 신진호 회장이나 김종우 회장만 재미를 볼 가능성이 컸고 말이다.

‘다만 문제는 나 때문에 노태호 대표의 국민적 인기가 더 커졌다는 건데.’

작년에 있었던 김포 공항 테러 기도 사건으로 노태호 대표의 지지율은 꽤 높아졌다.

만약 대선 중에 또다시 북풍 변수가 발생한다면 노태호 대표가 높은 확률로 당선이 될 것이다.

뭐 양김이 단일화만 성공한다면 아무리 북풍 변수가 거세도 노태호 대표가 당선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 * *

“노사께서는 노태호 대표가 한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 너의 존재감이 워낙 커져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네가 야당 편을 드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야.)

“두려우면 조금 더 온건한 방법으로 저를 회유해야 하는데, 노태호 대표는 마치 협박하듯 저를 대하지 않았습니까?”

(군부 출신이 원래 다 그렇잖아. 일개 기업인에게 저자세를 취하기도 자존심 상할 테고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3백억을 달라고 하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요구였습니다.”

(투정 부리는 건 나중에 하고, 그래서 어쩔 거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노사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내 생각은 이전에 말한 거랑 똑같아. 노태호와는 최대한 불가근불가원 하는 게 좋다.)

“그게 힘들 거 같아서 문제입니다.”

나라고 노태호 대표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5년짜리 시한부 권력이라 하나 어쨌든 대통령이 될 사람이니,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나에게 접근하여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노태호, 그놈을 다시 만나서 대선 지원 자금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선까지 줄여봐. 백억 미만이라면 어느 정도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다. 혜성 그룹 정도의 규모라면 대선 후보에게 그 정도 지원하는 거야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야당 후보들도 저를 안 좋게 보지는 않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대신 양김에게도 대선 자금을 지원해 줘야겠지.)

“뭐 그거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설령 노태호 대표의 편을 들어 이번 대선에서 그를 지원해준다 해도 나는 뒤에서 양김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이다.

김태중 선생이나 김영산 총재나 어쨌든 대통령이 될 양반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끝까지 3백억을 고집하면 어찌합니까?”

(그때는 뭐 다른 수가 있겠어? 양김 중의 한 명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지.)

역시 노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이것만큼 좋은 수가 없기는 했다.

김태중 선생이든, 김영산 총재든 나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민주화 정권이 들어선다면 운신의 폭도 넓어질 것이기도 했고.

‘근데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하지?’

이건 좀 고민이 되었다.

개인적인 친분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눴던 김태중 선생 쪽이지만, 혜성 그룹에 이익이 가는 쪽을 선택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고민을 하는데, 노사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면 검은 월요일을 노리던가. 10월쯤부터 미국에서 공매도한다면 300억쯤이야 손쉽게 벌 수 있지 않겠어?)

“검은 월요일 말씀입니까?”

검은 월요일이라.

그러고 보니 전에 노사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1987년 10월의 어느 월요일에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폭락이 발생했다나?

이 검은 월요일 사태로 서킷 브레이커란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농담으로 한 소리니, 그냥 흘려들어.)

“예?”

(그냥 해본 소리였다고. 3백억만 투자하면 기화 자동차를 공짜로 가질 수 있으니 말이야.)

“노사께서는 검은 월요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뭐 그렇지. 지금까지야 운 좋게 나비효과로 피해를 본 적이 크게 없었지만, 검은 월요일처럼 우연으로 발생하는 일에 투자했다간 그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야.)

노사의 그 같은 말에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모처럼 공돈을 버나 싶었더니…….

하지만 나는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하였다.

노사의 말처럼 언제 어떤 식으로 나비효과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일본에 있는 자산만으로도 엄청난 규모를 이루고 있으니, 구태여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노태호 대표가 끝까지 억지를 부릴 때, 양김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인데.’

검은 월요일이야 신경 쓸 거 없었다.

만약에 나비효과가 벌어지지 않아서 검은 월요일이 실제로 발생한다 해도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때를 노려 주식에 투자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불확실한 검은 월요일을 생각하기보단 한국 정치 쪽에 관심을 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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