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그때는 나도 다른 수를 써야지
미국에 왔는데 이 사람을 안 볼 수가 없었다.
“스티브, 오랜만이군요.”
“하하, 미스터 리를 미국에서 볼 줄이야. 정말 반갑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예. 스티브가 소개해 준 곳에서 잘 먹고 왔습니다.”
“같이 먹고 싶은데 아쉽군요. 미스터 리가 채식주의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 하. 저도 아쉽습니다.”
“그나저나, 혜성에서 일성 반도체를 인수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티브 잡스가 알고 있었던 유일한 한국 기업이 일성 전자였는데, 그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가 혜성 그룹으로 흡수되었으니 말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만한 자금력을 모으는 게 운만으로 되겠습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미국 반도체 산업의 메카인 실리콘밸리의 샌호제이에 혜성의 깃발이 꽂히게 되었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스티브의 사업도 굉장히 잘 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부러울 게 있겠습니까?”
“하하하. 미스터 리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민망하군요. 미스터 리가 하는 사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스티브 잡스가 확실히 변하기는 한 거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칭찬을 들었을 때, 이렇게 겸손하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기 자랑을 하였을 터.
‘사실, 지금 같은 성과라면 자랑해도 이상할 게 없긴 한데 말이야.’
넥스트는 벌써 SW 시장의 이인자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이전부터 스티브 잡스의 이름값 덕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대항마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자산 규모로 보나 매출로 보나 명실상부 이인자였다.
인텔을 시작으로 수많은 기업에 네트웨어라는 OS를 납품하기 시작했고, 다른 소프트웨어 제품들도 속속 좋은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개인용 소프트웨어 시장은 넥스트가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네트웨어도 개인용 OS에서는 7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지?’
스티브 잡스가 본격적으로 소프트웨어 사업을 시작한 게 1년 정도밖에 안 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이적인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못하는 듯싶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애플이 혜성과의 계약을 파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미스터 리?”
역시나 스티브 잡스가 가장 궁금해할 내용은 이거였다.
애플과의 계약 관계.
“예. 사실입니다.”
“애플의 경영진이 최악의 실수를 하였군요.”
나는 속으로 감탄하였다.
스티브 잡스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애플이야 일본 회사들을 믿고 저러는 거겠지만, 과연 레이건 대통령이 일본 회사들을 가만히 지켜만 보겠습니까?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고했던 대로 강력한 제재를 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습니까?”
역시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였다.
아무리 IT 쪽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지만, 애플 사주도 아닌데 반도체 업계의 흐름을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니.
‘스티브의 말처럼 곧 일본에 강력한 보복 조치가 들어갈 예정이지.’
사람들은 작년에 있었던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미일 간의 갈등이 해소될 것을 예상하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곧 추가 보복 조치가 들어가며 미일은 전후 최대 긴장 관계를 형성할 예정이다.
미국 정부에서 일제 컴퓨터나 TV, 전동 공구에 대해 이례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100%의 보복 관세를 발표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있었으면 이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 텐데, 저로서는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하하, 제가 애플에 있었으면 이렇게 미스터 리와 동업할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글쎄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티브 잡스와 함께 일을 했을 겁니다. 설령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남아있었어도 말입니다.”
내 말에 스티브 잡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미스터 리에게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감사 인사를 들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미국행은 충분한 성과를 본 거나 다름이 없었다.
* * *
나는 혜성 자동차의 미국 지부 직원들과 일성 전자 출신의 혜성 반도체 직원들을 잘 다독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잠실의 혜성 아파트에서 유지은이 아들, 이태한을 품에 안은 채 나를 반겨주었다.
“무슨 일 없었죠?”
“예. 태한이 웃는 얼굴 보세요.”
“저를 반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잘 웃는군요.”
“아버지인 걸 알아보는 거 아니겠어요?”
유지은의 말에 나는 싱긋 웃고는 태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태한이 ‘꺄하하!’하고 웃었다.
내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걱정이에요.”
갑자기 걱정이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태한이가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태한이의 건강 상태가 아닌, 정치 쪽이었다.
“제 모교에서도 아홉 명이나 구속되었다는데, 날이 갈수록 사태가 심각해지는 거 같아요.”
“대학교 시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경찰들도 날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거 같고, 이제는 정말 바깥을 나가기도 두려울 정도예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는 듯했다.
‘이제 곧 남영동에서 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겠군.’
오늘이 5월 18일이었다.
지금쯤이면 경찰에서 그동안 은폐했던 진실을 천주교 신부들이 폭로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천주교 신부들의 폭로로 민주화 운동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주부, 회사원들 그리고 택시 기사와 버스 기사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청 앞으로 모여들 거다.
결과적으로 5공 정권은 항복을 선언하여, 마침내 내각제 개헌을 포기하고 직선제로 개헌하겠다는 합의안을 통과시킨다.
한마디로 5공 정권의 몰락도 이제 몇 달이 채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근데 문제는 5공 정권이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지.’
부자가 망해도 3년이 간다는 말이 있다.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것도 여당 대표가 되어 영구적인 집권을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같은 수작이 무산된 이후로도 끊임없이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데, 아마 원 역사처럼 노태호 대표를 이용할 게 분명했다.
노태호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다 괜찮아질 겁니다.”
나는 속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유지은에게는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구태여 안 좋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니 진봉현 비서실장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미국에서의 일은 잘되셨습니까?”
“예. 공장의 시설을 보니, 생산 능력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이더군요.”
“고려일보에서도 혜성 반도체가 미국 내의 어떤 기업보다 뛰어난 반도체 회사가 되었다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렇습니까?”
“물론 다른 언론에서는 여전히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반도체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거 같습니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었다.
기술력은 이미 선진국의 그것을 따라잡은 상태였지만, 기술력이 좋다고 당장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치킨 게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11월이 되면 그때는 더 이상 나를 비난할 신문사는 없을 거야.’
11월.
딱 11월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그때가 되면 언론도 더는 나를 비난하지 못한다.
비난하기는커녕 나를 찬양하기 바빠질 터.
그렇기에 나는 언론의 반응을 무덤덤하게 넘기기로 하였다.
“혹시 제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저를 찾는 손님이 없었습니까?”
내가 그리 묻자, 진봉현 비서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다른 기업에서도 회장님을 찾았지만, 가장 중요한 손님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당 대표인, 노태호 대표의 사람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노태호 대표의 사람이요?”
“예. 회장님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연락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노태호 대표가 나를 찾는다니.
별로 마음에 드는 소식은 아니었다.
‘아마 돈 때문인 거 같은데.’
여당은 아직 내각제 추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태호 대표쯤 되는 사람이라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5공 정권이 민주화 세력에 항복을 선언하는 그런 사태 말이다.
그러니 노태호 대표도 대선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대선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노태호 대표를 만나서 좋을 게 없었다.
괜히 돈만 뜯길 게 분명했으니.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니라, 수십억, 어쩌면 백억이 넘는 돈을 말이다.
하지만 노사가 말해준 대로 역사가 흘러간다면, 차기 대통령은 노태호 대표였다.
노태호 대표에게 밉보인다면 좋을 게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일단 한 번 연락해보긴 해봐야겠군요.”
“예, 시국이 시국인 만큼 노태호 대표와 척을 쳐봐야 좋을 게 없을 거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최근 들어 시국이 많이 어수선한데, 혜성 자동차의 생산직 노동자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미국에서의 성과가 성과다 보니, 굉장히 고무되어 있습니다. 작년에는 아쉽게도 흑자 전환에 실패했었는데, 올해는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라며 들떠있는 분위기입니다.”
“파업하거나,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그런 움직임은 없습니까?”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면 자연스레 노동 운동도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래 자동차의 경우는 이미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상태였다.
그러니 나로서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조합까지는 아니어도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끈끈해진 거 같다는 우려가 임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기는 합니다.”
끈끈해진 거야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협동심이 강해진 거로 해석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회사에 불만을 가지게 될 경우 문제가 생길 요소가 있었다.
“한 번쯤, 생산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겠군요.”
“공장을 방문하시려는 겁니까?”
“예. 미국에서도 공장에 방문했는데, 한국이라고 방문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공장에 직접 방문하여 생산직 근로자들의 고충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덤으로 금일봉도 크게 하사하고 말이다.
* * *
-일요일에 화월관에서 보는 거로 합시다.
노태호 대표에게 전화하니 그가 다짜고짜 약속을 정하였다.
‘이래서 군 출신 권력자들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뭐, 김태중 선생이나 김영산 총재라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노사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두 사람은 천생 권력자나 다를 게 없어 보였고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재계 4위의 재벌 총수를 이렇게 오라 가라, 제 부하에게 지시 내리듯 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언짢았지만, 그렇다고 노태호 대표와의 약속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의 권력도 권력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노태호 대표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5공 정권이야 안기부고, 경찰이고 간에 내가 워낙에 촘촘히 인맥을 형성하여 정권 차원에서의 탄압을 막아냈었지만, 노태호 정권은 또 다르다.
정권 초기에는 인맥이고 뭐고 없을 테니, 그때 작정하고 나를 공격한다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숙이고 들어가기는 숙이고 들어가되, 노태호 대표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면 그때는 나도 다른 수를 쓸 수밖에 없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