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153화 (153/300)

153화 갑을 관계가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

“저는 지금 시점에서 일성 그룹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성이 처음 이 같은 말을 했을 때, 이호승은 내심 화가 났다.

비록 조언을 받는 처지였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견제를 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인건비가 높아질 거라는 소리를 듣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어쩌면 한성이 단순히 자신을 견제하려고 저런 말을 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래 자동차가 큰 소란에 빠질 거라고?’

심지어 한성은 미래 자동차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말까지 하였다.

7월이라는 정확한 시기까지 언급하며, 미래 자동차가 인건비 문제 때문에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식으로 말을 한 것이다.

사실 이호승이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터무니없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부터 무서운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 미래 자동차였다.

미국에다 수십만 대를 수출하며 경이적인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다.

연 매출 1조는 진즉에 넘었고 2조를 노리고 있는 상황.

이호승이 자동차 사업 진출을 꿈꾸는 이유도 혜성 자동차보다는 미래 자동차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미래 자동차이건만, 한성은 위기가 찾아올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니,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한성 회장이 한 말이다. 새겨들을 가치는 있어.’

나이가 30대 초반에 불과한 한성이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재벌 총수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는데, 이호승은 특히 한성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단순히 한성에게 반도체 사업부를 빼앗겼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리 봐도 식견이 뛰어난 정도가 아니란 말이지.’

재계 10위에서 4위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4년 정도에 불과했다.

식견이 좋다는 이유로 이 같은 성과를 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한성은 투자까지 잘했다.

몇 달 전에 화제가 됐던, 한성의 주식 수익률은 열 배에 가까웠었고, 심지어 그마저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한성이 주로 투자하는 곳은 일본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일본에 투자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권력자들은 물론이요, 미국의 권력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플라자 합의를 예상하다니, 이게 과연 정상적일까?

이 정도면 사실상 미래를 예견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호승은 한성 본인이 신내림 받은 무당이거나, 아니면 무당을 곁에 두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한성의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은 경악스러웠다.

‘만약 이번에도 이한성 회장의 말이 맞는다면…….’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만약 한성의 말이 맞는다면,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높일 필요가 있었다.

안 그래도 높았던 한성에 대한 평가가 더 높아질 수 없는 그런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호승은 반드시 혜성 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지난 일을 잊고 한성의 오른팔이 되겠다는 심정으로 혜성 그룹의 동맹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한성을 적으로 돌렸다간 좋을 게 없었으니.

‘시스템 반도체도 진출해야겠지. 이한성 회장이 추천했던 것이니 말이야.’

* * *

(이제는 무당 행세라도 하려는 거냐?)

노사가 혼내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니,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당 행세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이호승 회장이라면 제 말을 잘 따라줄 거 같아서, 저의 능력을 보여줬을 뿐입니다.”

(그러다 이호승 회장이 미래 회장에게 이야기하면 어쩌려고?)

나는 그 말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보복해주면 그만입니다.”

(확실히 네가 날 닮긴 했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동차가 잘 나가긴 하더군. 미국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생기고 있고 말이야.)

미국에서 앱설루트 광고가 나가기 시작했다.

워낙 인지도가 없어서 광고에 상당한 힘을 실었는데,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뉴 코렌드를 판매했을 당시, 제품이 아닌 브랜드 전체를 홍보한 게 나름대로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미국인들도 우리 회사가 단순한 동양 회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혜성 그룹은 반도체도 만들고 가전제품도 만들며 호텔이나 백화점 사업까지 하였다.

광고 영상에서 이 모든 것들이 담기니, 누가 봐도 혜성 그룹은 미국의 500대 기업들과 겨뤄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혜성 자동차가 렉서스의 위치를 대신할 수도 있겠구나.)

“렉서스요?”

(일본을 대표하는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80년대 후반인가 90년대 초반에 미국에 진출했었지.)

“성공했습니까?”

(당연히, 성공했으니 내가 지금 거론하는 거 아니겠냐?)

노사의 말을 듣고 나는 미간을 좁혔다.

미국에서 도요타는 미래 자동차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미지란 다름 아닌 ‘싸구려’ 이미지였다.

그야말로 싸서 사는 자동차였는데, 그래도 도요타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출이 아닌, 경상이익이 우리 돈으로 무려 2조 7천억 원이었다.

미래 자동차와 비교할 게 아니라, 미래 그룹 전체를 가져와도 도요타 하나에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필 도요타에서 프리미엄 자동차까지 성공시키다니.’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시간을 지체해서 도요타보다 늦게 프리미엄 시장에 진출했다면, 이도 저도 못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케팅에 더 힘을 쏟아야겠군요.”

(렉서스가 이름을 날린 것은 90년대부터니 벌써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노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제 역사가 어떻게 바뀔지 노사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앱설루트를 보고서 렉서스의 미국 진출이 몇 년 앞당겨질 수도 있는 일.

심지어 노사는 자동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노사의 말만 듣고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올해는 포석을 쌓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더욱더 공격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겠어.’

혜성 자동차의 흑자 전환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지만, 그것도 나중으로 미뤄야 할 거 같았다.

지금은 그런 상징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미국 시장에 안착하여 도요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물론 지금의 두 기업을 비교하면 과연 경쟁이 될지가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소식은 들었느냐? 대양 상선의 회장이 자살했다는 소식?)

“예. 들었습니다.”

대양 상선의 회장이 자살한 일명 대양 상선 사건은 재계의 사람들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일반인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는데, 그만큼 인구에 회자가 된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빚이 대부분이라고 하나 1조 원에 가까운 자산 규모를 가진 기업의 회장이 자살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곧 대양 상선이 법정 관리 절차를 밟게 될 거야.)

“그렇습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다.

‘설마 대양 상선을 인수하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노사가 대양 상선의 장점을 언급하며 인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대양 상선이 비록 법정 관리 절차를 밟게 되지만, 그 회사의 잠재력은 무시 못 하는 수준이야. 대외 신용도도 한국에서 거의 제일가는 수준이고, 선박은 90척에 적재 톤수는 350만이 넘어.)

“제가 알기로 적자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적자야 5백억 가까이 되긴 하지. 하지만 그거는 원리금 상환 등 금융비용이 9백억이나 되어서 그런 거야. 빚만 갚는다면 오히려 흑자를 본다는 뜻이지.)

“노사께서는 제가 대양 상선을 인수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인수하는 게 이득이다. 전에도 말했듯, 해운업의 불황은 곧 끝나게 될 거야. 불황이 끝나는 것을 넘어 엄청난 호황기를 겪게 돼.)

뭐 그거는 이미 많이 듣던 이야기다.

애초에 노사가 중견 기업을 일구어냈던 배경도 해운의 활황이 있어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사와 나는 상황이 아주 다른데.’

노사야 맨주먹에서 일어나는 상황이었으니 해운의 활황으로 중견 기업까지 일구어낼 수 있었던 거고, 나는 이미 재계 4위의 대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이었다.

솔직히 나에게 있어 해운업은 크게 관심이 가지 않는 사업이었다.

‘그래도 노사가 원한다면 인수를 하긴 해야겠지.’

노사에게 입은 은혜가 있는데 이 정도야 못 해줄 게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지금 당장 대양 상선을 인수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대양 상선을 인수하는 방향으로 움직여보겠습니다.”

(그래. 어차피 내년까지는 법정 관리 기간이 이어질 테니, 내년쯤에 인수하는 것이 좋을 거다.)

다행히, 노사도 지금 당장 인수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도 지금 내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올해는 무조건 반도체와 자동차에 집중해야지.’

지금까진 자동차에만 집중했지만, 이제부턴 반도체에도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메모리 반도체의 신화가 시작될 날도 멀지 않았으니까.

* * *

1987년 5월 11일.

나는 미국에 갔다.

일성 전자, 아니, 혜성 반도체의 최첨단 반도체 공장이 준공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장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시설들이 척 보기에도 최첨단으로 보입니다. 제가 듣기로 이런 시설이 미국 내에도 얼마 없다던데, 참으로 대단합니다.”

머코스키 상원의원이 대견하다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미국 정치인인 그로서는 자신의 지역구에 엄청난 투자를 해주는 내가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캘리포니아 부지사, 샌호제이 시장 등도 나를 환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성 전자에서 이 공장을 준공하기 위해 들인 자금은 무려 6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수백억이나 하는 규모였으니, 이렇게 나를 환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허, 이 회장 덕분에 미국 정계의 인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군요.”

“영어를 굉장히 세련되게 잘하십니다. 권 차관님.”

“이 회장만큼 잘하겠어요?”

권원성 과기처 차관이 미소를 짓더니 불쑥 물었다.

“여기서 어떤 제품을 생산하나요?”

“4메가 DRAM급 이상의 최첨단 메모리 제품을 생산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고집적 게이트 어레이와 로직 반도체 등, 고가치 제품 역시 생산할 수 있습니다.”

“허어, 엄청나군요. 그야말로 한국 반도체 산업에 새 이정표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겠어요.”

“일성이 한 일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

“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일성의 반도체를 먹은 게 이 회장 아니에요? 결과만 봤을 때, 이 공장 또한 이 회장의 공이죠. 하하.”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일성 반도체를 흡수한 것은 혜성 그룹이었으니, 일성 반도체의 모든 유산도 내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기업들이 그걸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건데.’

단순히 한국의 경쟁 기업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 업체들.

그중에 일성에서 반도체를 매입하던 기업들이, 혜성으로 흡수 합병되자 거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애플에서도 반도체 매입을 중단하겠다는 통보를 했다지?’

나는 냉소를 지었다.

스티브 잡스가 일성과 계약을 맺은 뒤, 애플은 지금까지 일성 전자와의 계약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가 혜성으로 넘어오니 갑자기 애플에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통보를 전해왔다.

혜성 말고 다른 일본 반도체 회사와 계약을 하려고 그러는 거 같았다.

‘과연 누가 후회하게 될지 두고 보자고.’

구태여 애플을 붙잡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몇 달만 지나도 갑을 관계가 바뀔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