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이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어
“음, 저가 브랜드로 안착하면 이미지를 극복하는 게 어렵다는 말씀은 저도 동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격을 높일 경우, 아예 인지도 자체가 생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다.
우리가 무슨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도 아니고, 제값 주고 파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고가 자동차라면 더더욱 인지도가 중요했으니, 혜성 자동차라면 판매량이 거의 0에 근접할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저가 브랜드로 안착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다른 자동차 기업의 총수들과 달리, 나는 1~2년을 보고 사업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감수해야 합니다. 설령 지금 당장 적자를 본다 해도 말입니다.”
“다른 자동차들은 해외에서 잘나가는데 우리만 못 나간다면 언론에서 우리의 자동차를 헐뜯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국내 시장에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긴 했다.
특히 권오중 회장이 내 앞에서 온갖 잘난 척을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 화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업은 이성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욕을 먹어도 몇 년만 지나면 누가 옳았는지 판명이 날 겁니다. 그때는 우리 혜성 자동차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자동차 브랜드가 될 겁니다.”
아마 다른 자동차 기업들은 올해나 내년까지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쟁의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인건비가 급격히 상승하는 고충도 겪겠지만, 어쨌든 원화가 저평가되고 있었기에 수출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저가 자동차라면 수십만 대를 수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미래 자동차는 이미 수십만 대를 수출하고 있었고.
하지만 90년대와 그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은 조금 손해 보더라도 고가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것이 좋았다.
뭐 사실 손해라고 해봤자, 원가를 생각하면 별로 손해가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앱설루트 원가가 5백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지?’
1만 달러면 한국 돈으로 8백만 원이니, 한 대를 팔면 거의 3백만 원이 남는 셈이었다.
물론 이 3백만 원에서 세금 제외하고 유통 비용 제외하고 판매비(딜러) 비용과 마케팅 비용을 제외하면 백만 원도 안 남겠지만, 어쨌든 적자는 아니었다.
이러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고가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수출가는 1만 달러 이상으로 결정짓겠습니다.”
“제 의견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예의상 감사하다고 전하였다.
그러자 하운철 사장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나와 하운철 사장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노사에게 물었다.
(글쎄, 전에도 말했듯 자동차에 있어서는 나보다 네가 더 전문가다. 해운이나 건설, 조선업이면 모를까, 나도 자동차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언을 줄 수 없어.)
“그래도 노사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흠, 일단 고가 브랜드로 자리 잡으려는 것은 잘한 선택인 거 같다. 미래 자동차도 나중에 저가 브랜드를 극복하려고 온갖 발악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거든.)
뭐 그럴 거 같았다.
처음 수출할 때부터 고작 4천 달러 정도 되는 돈에 차를 팔았으니, 미국인들이 미래 자동차를 저가 브랜드로 인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동차 노동자들의 인건비도 올해부터 급격하게 상승할 테니, 영업이익이 큰 고가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미래를 생각했을 땐 나쁘지 않지.)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노동쟁의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노동조합도 많이 늘어날 것이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인건비가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지금이야 자동차를 저렴하게 팔아도 이윤이 많이 남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이윤도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리라.
‘슬슬 인건비도 올리고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겠어.’
자동차 업계에서 임금이 가장 높은 게 혜성 자동차였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였다.
자칫 하면 미래 자동차처럼 공격적인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기에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사실이야. 저가 브랜드라고 나쁜 것은 아니거든. 일단 매출 자체는 상당하니 말이야.)
내가 속으로 직원들의 인건비를 생각하고 있을 때, 노사가 그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자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였다.
“사실 그와 관련해서 제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동차 브랜드를 두 개로 나누면 어떨 거 같습니까?”
(두 개로?)
“예.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는 겁니다.”
노사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답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노사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나지만, 너도 욕심이 엄청나구나. 아무리 그래도 지금 시점에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생각을 하다니.)
“어차피 미래 자동차가 인수할 것을 아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기화 자동차는 기술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은 자동차 기업이었다.
업계 2위에 인지도 역시 매력적이었으니, 인수할 수만 있으면 인수하는 게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하지. 아직은 기화가 힘이 있을 때이니, 몇 년 정도는 참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가 브랜드는 기화 자동차로, 고가 브랜드는 혜성 자동차로 할 생각이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혜성 자동차로는 벤츠만큼의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가 되는 게 목표였고 기화 자동차로는 미래 자동차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자동차 메이커가 되는 게 목표였다.
물론 둘 다 아직은 현실성이 없게 느껴지는 목표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성 반도체도 결국에 인수했는데, 기화 자동차라고 인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벤츠급의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자동차 메이커가 되는 목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목표를 이루었다.
솔직히 벤츠급의 자동차 메이커가 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낸 목표들에 비교했을 때 그리 난도가 높은 편도 아니었다.
* * *
처음 혜성 자동차에서 승용차를 새로 출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발을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곧 출시한다니. 승용차라는 게 그리 쉽게 생산할 수 있는 거였나?”
“그러게 말이야. 자동차를 우습게 보는 것도 아니고.”
“거기 회장이 원래 추진력이 장난 아니잖아. 2.28 조치가 끝났다고 하니까, 일단 출시 선언부터 하고 본 거겠지.”
“진짜로 그런 거라면 이거 실망인데?”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혜성 자동차의 신차 출시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기화 자동차 또한, 3월 말에 승용차를 출시한다고는 했지만, 기화 자동차는 몇 년 전에 승용차를 생산한 적이 있었던 회사였다.
반면에 혜성 자동차는 혜성 자동차가 인수했던 동화 자동차나 거하 자동차, 고림 자동차를 포함해도 승용차를 생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SUV와 이륜차, 버스 등만 생산하였던 것이다.
그런 혜성 자동차가 갑자기 승용차를 생산한다고 하니 의아해하면서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 뉴 코렌드 잘나가고 있잖아? 내가 보기에 뉴 코렌드가 웬만한 자동차들보다 더 만들기 힘들어 보이던데?”
물론 일부 사람들은 혜성 자동차의 신차를 기대하기도 했다.
혜성 자동차에서 생산하고 있는 뉴 코렌드가 기술이면 기술, 디자인이면 디자인,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자동차였기 때문이었다.
“SUV와 일반 승용차가 같아? 그리고 뉴 코렌드가 신문에서나 떠들썩하게 나왔지, 실질적인 판매량은 1만 대도 안 될걸?”
“그래?”
“혜성 자동차는 모기업이 워낙에 커서 인지도가 높아 보이는 거지, 자동차 업계에서는 4위밖에 안 돼. 그런데 4위밖에 안 되는 회사에서 갑자기 승용차를 출시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야.”
하지만 주된 여론은 ‘섣부르다.’였다.
승용차를 출시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바로 출시하는 것은 이르다는 게 주된 여론이었다.
“그거 들었어? 혜성 자동차에서 새로 출시하는 자동차가 뉴 코렌드처럼 벤츠와 합작해서 만든 거라던데? 심지어 3년 전부터 준비했데!”
하지만 이 같은 여론도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자 완전히 뒤바뀌었다.
혜성 자동차의 신차, 앱설루트가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출시하는 자동차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개발하고 출시를 준비하던 자동차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와! 이한성 회장이 식견 좋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어떻게 이걸 예상하고 승용차를 개발했지?”
“심지어 벤츠와 합작했다잖아. 벤츠와!”
이렇게 여론이 뒤바뀌었을 때, 마침내 앱설루트의 실물이 공개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앱설루트의 실물을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언론사 기자들이었다.
“뉴 코렌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데? 이거 사실상 벤츠 아니야?”
“그러게. 디자인 자체는 벤츠의 차기작이라고 해도 믿겠어.”
“벤츠랑 합작해서 그런지, 안전성도 상당하다더라. 내가 알기로 40% 오프셋 충돌 테스트를 통과했다던데?”
“40%? 그 정도면 국내 제일 아니야?”
“당연히 국내 제일이지. 충돌 안전성만큼은 이 차를 따라올 차가 없어.”
“옵션도 들어보니까 온갖 첨단 장비들로 도배되어 있다던데, 디자인도 그렇고 성능도 그렇고 다 마음에 드네?”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벤츠를 언급하였다.
단순히 벤츠의 이름값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앱설루트의 디자인에서 벤츠 특유의 색깔이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벤츠는 누구나 인정하는 자동차 메이커였으니 말이다.
“승차감도 진짜 마음에 드는군. 말랑말랑한 게, 이거 타고 운전하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겠어.”
“마음에 드는 게 승차감뿐이겠어? 디자인도 고급스럽고 심지어 안전하기까지 하잖아? 솔직히 이 정도면 정우든, 기화든, 미래든 다 이기겠는데?”
“이제 중요한 것은 가격이야.”
가격!
앱설루트를 구경한 기자들은 가격만 낮다면 기록적인 판매량도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내 앱설루트의 가격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뭐? 1,200만 원?”
“아니, 벤츠와 합작해서 비싼 건 알겠는데 SUV도 아니고 일반 승용차가 1,200만 원은 좀 심하지 않나?”
“이한성 회장이 마침내 실책을 저질렀군.”
기자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1,200만 원은 지나칠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
이 정도 가격이라면 앱설루트를 구매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기자들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나, 김문순 의원인데. 혜성에서 출시한 자동차가 얼마라고?”
“우리 영감님께서 앱설루트를 주문 제작하고 싶다는데, 가능하겠나?”
일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1,200만 원이라는 고가의 가격이 더 메리트 있게 느껴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고위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동차에 함부로 돈을 쓸 수가 없었다.
비싼 자동차는 대부분 외제차였고, 외제차에 큰돈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앱설루트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자동차였다.
비록 1,200만 원이나 하는 초고가의 자동차였지만, 어쨌든 국내산은 국내산이라는 뜻이었다.
외제차에 비하면 눈치가 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국회의사당 아니야? 국회의사당에 왜 이렇게 외제차가 많아?”
“김 사장.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저 자동차들 봐봐. 내가 차는 잘 모르지만, 벤츠라는 독일 회사 거 아닌가?”
“김 사장이 차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군! 저건 벤츠가 아니라, 벤츠와 합작한 혜성에서 만든 자동차일세!”
“혜성 자동차? 거기서 승용차도 만들었나?”
“정치인이고 대기업 임원이고 요즘 저 차를 안 타는 사람이 없네. 김 사장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유행에 뒤처지면 안 되지!”
그리고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앱설루트를 타기 시작하자, 돈이 조금 있다 하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 앱설루트를 타기 시작하였다.
디자인부터가 고급스러운데 인지도까지 더해지자 앱설루트를 타는 게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으로 번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