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빅 5에서 빅 4로
‘신기하군. 저분을 여기서 보다니.’
대통령을 봤을 때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김태중 선생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색달랐다.
‘뭐, 한때 존경했던 분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노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김영산 총재와 김태중 선생을 가장 존경했었다.
지금 내가 들뜬 기분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번 대화를 시도해 봐.)
그때, 노사가 불쑥 나타나서는 그 같이 말했다.
‘김태중 선생과 대화를 해보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생뚱맞게 느껴지는 요구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사의 설명을 듣자, 납득이 되었다.
(올해가 1987년이잖아. 5공도 이제 끝물이야. 역사가 바뀌어 김영산이나 김태중, 둘 중 한 명이 올해 대통령이 될 수 있으니, 기회가 생겼을 때 안면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음.”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야 5공의 감시가 두려워서라도 김태중 선생이나 김영산 총재에게 사적으로 접촉할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기회가 생겼다면, 굳이 접촉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하게, 두 사람은 훗날 대통령이 될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김태중 선생에게 다가가 목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김태중 선생이 반갑다는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이한성 회장님.”
“저도 평소에 존경하던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 그래요?”
내가 존경한다고 해서 그런지, 김태중 선생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 총재님께서 혜성 그룹에 관해 좋은 말들을 많이 해줬습니다.”
“김영산 총재님, 말씀입니까?”
김태중 선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속으로 반색하였다.
아무래도 김영산 총재는 여전히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았다.
“영광이군요. 김영산 총재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오늘의 만남은 꼭 총재님께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김태중 선생과 안면을 튼 나는 슬슬 마무리 인사를 하려고 했다.
아무리 장소가 장소라 해도, 김태중 선생과 오래 대화를 나눈다면 뒤에서 말들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5공의 권력자들이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었고.
“저는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한성 회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
“이것 좀 받아주시겠습니까?”
김태중 선생이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누군가의 연락처가 적혀 있는 종이였다.
“이것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저를 찾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여기에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분명 아무에게나 주는 연락처가 아닐 것이다.
5공의 감시를 생각하면, 극히 일부 인사들에게만 건네주는 연락처일 터.
‘나를 대단히 좋게 본 모양이군.’
김영산 총재가 나에 대해 어지간히 좋게 이야기해 준 듯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아무런 접촉이 없었던 김태중 선생이 이렇게 나올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연락하겠습니다.”
내 말에 김태중 선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김태중 선생에게 다시금 목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소득이 없지는 않구나.)
노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김태중 선생에게 연락처를 받은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았다.
* * *
이병건 회장의 빈소를 방문한 이후 나는 일성 그룹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비록 이명승 사장은 나의 도움을 거절했지만, 그가 유지은의 고모부인 이상 나는 그를 더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은 이호승 부회장이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언론부터가 이호승 부회장이 하루빨리 회장직에 올라 일성 그룹의 혼란을 잠재워야 한다고 촉구할 정도였다.
이에 일성 임원들도 부화뇌동하고 있었다.
“이명승 사장은 왜 이렇게 조용하답니까?”
(아무래도 이병건의 죽음으로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아직도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니. 조금 실망이군요.”
나는 쓰게 웃었다.
이명승 사장의 성격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재벌 총수에게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마음이 굳세지 못하고 유약한 성격을 가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 조언에 잘 따라주는 모습을 보며 성격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따르릉!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누군가 했더니, 이명승 사장의 전화였다.
‘이 사람도 양반은 못 되는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이명승 사장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토요일에 동생과 만나서 협상을 할 생각이에요.
“이호승 부회장과 협상을 한단 말씀입니까?”
-예.
무슨 협상을 하려는 것일까?
내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마침 이명승 사장이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일성 그룹 회장직을 동생에게 넘겨줄까 합니다.
“…….”
회장을 포기한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현재 여론이나 세력은 조금 밀린다고 볼 수 있었지만, 지분율로 따지면 오히려 유리한 것은 이명승 사장 쪽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일성 전자의 지분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병건 회장의 다른 자식들도 이호승 부회장보다는 이명승 사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니, 작정하고 싸워 보면 충분히 승산은 있었다.
“불리하다고도 볼 수 없는 상황인데, 구태여 회장직을 포기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명승 사장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더는 불효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불효자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병건 회장님께서, 아니, 아버지께서 병환에 시달리고 계실 때, 저는 동생과 다투기 바빴어요. 그놈의 회장직이 뭐라고, 불효막심한 짓을 저지른 거죠.
“그건 다 이유가 있었지 않습니까?”
-글쎄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떤 이유든 다 변명 같게 느껴져요. 그저 제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인 거죠.
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노사와 같은 심정이었다.
불효자가 되기 싫어서 일성 그룹 회장직을 포기한다니.
이미 불효를 저지른 시점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회장에게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창업하신 일성 그룹이 더 혼란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아닙니다. 저에게 사과하실 것은 없습니다.”
이명승 사장이 반도체 사업부를 얻기 전에 이런 결정을 내렸으면 한사코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반도체 사업부를 얻고 난 이후였기에,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었다.
조금 아쉽긴 해도,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성의 회장직을 포기한다 해도 그룹 전체를 넘겨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간단했다.
이명승 사장을 자극하여 일성 그룹을 반으로 쪼개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빅 5가 아니라, 재계 4위의 기업이 될 수도 있겠는데?’
빅 5의 말단에서 순식간에 재계 4위의 기업이 될 기회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명승 사장이 다른 계열사에 욕심을 내야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이 회장께 전화를 드렸어요. 이 회장, 저에게 조언을 주세요. 과연 어떤 계열사를 가져가는 게 공정하다고 생각하세요?
“일성 화재는 무조건 가져와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성 화재를 거론하였다.
참고로 일성 화재는 유지은의 부친인 유정석이 대표로 있는 기업이었는데, 보험사로는 국내 1위였다.
(좋은 조언을 해줬다. 일성도 일성 화재 덕을 본 적이 많았지. 이호승으로선 일성 화재를 잃으면 꽤 타격이 클 거다.)
일성 화재는 지금도 훌륭한 캐시카우지만, 미래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캐시카우가 되는 곳이다.
그러니 가져올 수 있을 때 가져오는 것이 좋았다.
“물론 다른 금융 부문의 계열사들도 가져와야 합니다. 제일제당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과연 동생이 그렇게 많은 계열사를 넘겨주려 할지 의문이에요.
“넘겨받아야죠. 회장직을 포기하는데 그 정도도 못 받으면 안 됩니다.”
-음. 그렇게 되면 일성 그룹이 너무 작아지는 게 아닐까요?
“사장님이 받게 될 일성 계열사들도 결국 일성 그룹입니다. 이병건 회장님의 유산은 이명승 사장님 아래에서 더 커지게 될 겁니다.”
이명승 사장은 고민이 되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고민이 끝나자, 결국 내 말대로 하기로 하였다.
그 역시 자신의 사람들을 챙기려면 계열사를 많이 받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성 그룹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뭐, 반도체가 너에게 갔고 그룹의 규모도 많이 쪼그라들었지만 말이야.)
통화가 끝나고 노사가 그리 말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많이 바뀐 거 아닌가?’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노사에게 물었다.
“이호승 부회장이 어떻게 나올 거로 생각하십니까?”
(이명승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지. 그놈은 회장 자리를 얻는 걸 가장 우선시할 놈이니 말이야.)
“그렇다면 일성 그룹의 재계 순위도 많이 내려가겠군요.”
(일단 혜성 그룹이 재계 4위가 되는 건 확정이라고 봐도 될 거다.)
“4위라.”
기분이 묘했다.
혜성 그룹이 더 커져서 순위가 올라간 게 아니라, 일성 그룹이 작아져서 순위가 올라가다니.
‘그래도 어쨌든 4위는 4위지.’
언젠가 꿈꿔왔던 빅 4의 위치.
이제 그 자리가 나의 것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빅 4를 넘어, 유일무이한 위치에 서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반도체에서 터져주고 자동차도 기대만큼만 터져준다면 미래 그룹을 넘어서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반도체와 자동차.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에도 이 두 산업이 혜성 그룹의 핵심 산업이었다.
* * *
“좋은 종목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한성 회장님!”
도레미 그룹의 정성완 회장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런 정성완 회장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정 회장님께서 저를 도와주셔서, 저도 약간의 도움을 준 것뿐인데 말입니다.”
“하하.”
정성완 회장은 반 일성 동맹을 결성할 때 참여했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사실 일성을 타도하겠다는 생각보단 나에게 투자 조언을 받기 위해 동맹에 참여한 것이었는데, 표정을 보니 꽤 짭짤하게 번 거 같았다.
“그나저나 일성 그룹이 저리됐으니, 혜성 그룹이 재계 4위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거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한성 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이 저리 끝날 줄은 정말 예상 못 했습니다. 설마 이명승 사장이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그룹을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린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이명승 사장도 정말 대단한 거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회장직을, 그것도 일성 그룹의 회장직을 포기하다니.”
이명승 사장은 나의 조언을 얻고 나서 바로 이호승 부회장과 협상에 들어갔다.
나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그는 회장직을 포기하는 대가로 제일제당과 일성 화재를 비롯한 금융 부문의 계열사를 요구하였는데, 이것만 해도 일성 그룹 전체에서 30%에 가까운 규모였다.
당연히 이호승 부회장은 난색을 보였다.
안 그래도 반도체 사업부를 포기하면서 그룹의 규모가 줄어들었는데 여러 계열사를 요구하니 난감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를 말하자면 이호승 부회장은 결국 이명승 사장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내가 일성 전자의 지분을 14%나 가지고 있는데 어쩌겠어?’
금융 부문의 계열사를 포기할 것이냐, 일성 전자를 포기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성 그룹은 반으로 쪼개졌고, 이명승 사장은 일성에서 따로 독립하여 JS 그룹을 세우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