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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45화 (145/300)

145화 동현 반도체에 맡겨 봐

나는 더 끌지 않기로 하였다.

이보다 좋은 조건에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이호승 부회장께서 시원시원하게 결정을 내리셨는데, 더 입씨름해봐야 의미가 없을 거 같습니다. 부회장이 제안하신 대로 1,200억에 인수하는 거로 결정짓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었음에도 이호승 부회장은 별로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하기야,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할 생각이 없음에도 억지로 매각해야 하는 상황인데, 심지어 인수가까지 낮추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의 상황을 생각해줄 이유가 없었다.

이호승 부회장이 중간에 끼지만 않았다면 지금처럼 복잡하게 돌아갈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뭐 결과적으로 이쪽이 나에게 더 이득이긴 했지만 말이야.’

일성 그룹도 분열되었고, 반도체 사업부도 더 저렴하게 인수하였다.

나로서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게 있지.’

반 혜성 동맹.

이제는 이 유치한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저는 오늘의 일로 우리 둘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저는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반 혜성 동맹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였다.

“앞으로 제가 그 모임에 참여할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확언하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이호승 부회장을 향한 조소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을 향한 조소였다.

‘신진호 회장과 김종우 회장이 이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갖은 수를 썼다고 했는데, 이렇게 쉽게 탈퇴를 하다니.’

서로 간에 얼마나 신뢰가 없었던 것일까.

하기야, 두 사람 다 그리 믿음직한 인물은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반 일성 동맹을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사실 반 일성 동맹을 계속 유지해 일성 그룹을 압박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병건 회장의 부재로 일성 그룹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반도체 사업에만 몰두해야 할 때였다.

국내에서 경쟁하는 것도 좋지만, 이젠 세계를 무대로 싸워야 할 때이니, 일성 그룹과는 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이명승 사장에겐 미안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명승 사장도 이해해 주겠지. 뭐, 이미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 해주기도 했고 말이야.’

나는 처음부터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하면 더는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애초에 내가 원하던 것은 반도체였고, 나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명승 사장과의 관계를 끊거나, 내칠 생각은 없었다.

지지도 계속해주긴 할 것이다.

단지, 혜성 그룹 차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명승 사장을 도와줄 일은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회장님.”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일성에서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스템 반도체요?”

이호승 부회장의 물음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겠다면서 시스템 반도체를 시작하겠다니.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아직 반도체에 욕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D램은 도저히 회장님께서 용납을 안 해주실 거 같으니, 시스템 반도체 쪽으로 방향을 바꿔볼까 합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호승 부회장도 나만큼이나 반도체 사업을 탐내던 사람이었다.

차선으로 시스템 반도체를 선택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경쟁자라는 이유로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닐 거 같았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는 미국 기업이든, 일본 기업이든 전부 포기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일성 전자만을 유력한 경쟁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달랐다.

혜성 반도체고, 일성 전자고 간에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상태.

두 기업은 서로 경쟁하기보단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같은 한국 기업이었으니 말이다.

‘덤으로 일성 전자가 동현 반도체에 외주를 의뢰한다면 주요 손님을 하나 얻는 셈이니 나쁠 것도 없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는 이호승 부회장에게 말했다.

“제가 용납해주고 안 해주고가 뭐 있겠습니까? 이호승 부회장님의 뜻대로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다만, 조언을 한 가지 해주고 싶은데 혹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떤 조언이든 겸허히 받아들일 테니, 망설이지 말고 해주십시오.”

나는 그에게 시스템 반도체는 오직 연구만 하는 것이 좋을 거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개발만 해도 투자 비용이 상당한데, 생산 시설까지 지으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논리였다.

실제로 시스템 반도체는 양산 효과가 작기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보다 투자 비용이 더 들어가게 된다.

지금의 일성 그룹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걱정인 것은 파운드리 기업에 대한 신뢰도입니다.”

“설계를 빼돌려서 자체 생산하면 어쩔지 걱정하시는 겁니까?”

“예, 저희가 어렵게 개발해도 파운드리 기업이 배신하면 저희는 극심한 손해를 보게 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추천해드리고 싶은 기업이 있습니다. 동현 반도체라고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한국 기업입니다.”

“동현 반도체요?”

이호승 부회장은 그렇게 되물었지만, 눈빛은 동현 반도체가 어떤 기업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나에 대해 조사했으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면서 동현 반도체에 백억이 넘는 돈을 투자했으니 말이다.

“예. 자본금만 3백억이 넘는 곳인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업의 모토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동현 반도체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었다.

내 지분이 30%에 황 노인의 지분 15%가 들어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라.”

“저를 믿고 계신다면, 이 회사에 생산을 위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이호승 부회장의 입장에서는 나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이 말이 그에겐 압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만약 생산을 다른 기업에 위탁하게 된다면, 동현 반도체를 우선적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이호승 부회장과의 대화가 끝이 났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시스템 반도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모든 것에서 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군. 아니, 노사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뭐가 됐건, 기쁜 일이었다.

* * *

“일성 반도체의 인수가는 1,200억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짝짝짝!

내가 이호승 부회장과의 협상 결과를 이야기하자, 혜성 그룹 임원들이 반색한 기색으로 손뼉을 쳤다.

이미 그들도 내가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예상했던 인수가가 1,500억이란 사실도.

그렇다 보니, 인수가를 무려 3백억이나 줄였다는 소식에 임원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도체에 투자를 거듭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 임원들이 적지 않지.’

나는 임원들의 표정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당연히 혜성 반도체의 임원들은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사의 규모가 배로 커졌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혜성 전자의 임원들은 뭔가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전자보다 반도체가 더 커지게 생겼으니, 반도체로 넘어가지 않은 걸 후회하는 거 같았다.

다른 임원들, 특히 자동차 쪽의 임원들은 우려하는 기색이 강했다.

천문학적인 적자를 보고 있는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했으니, 앞으로 혜성 자동차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 것으로 지레짐작하고서 우려하는 것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반도체 시장의 상황은 곧 나아질 겁니다. 인텔도 포기하였고, 다른 미국의 기업들도 철수를 논의하는 중입니다. 일본의 기업들도 상황이 좋지 않으니, 곧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혜성 반도체의 김정연 대표가 내 말에 호응해 주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아마 언론에서는 말들이 많을 겁니다. 제 선택이 천추의 한이 될 거라는 식의 보도를 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제 선택을 믿어주십시오. 올해 안에, 혜성 반도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겁니다.”

내 확신 어린 말투에 임원들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자신감 넘치는 말투를 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짝짝짝!

임원들은 다시 손뼉을 쳤다.

이번엔 표정들이 아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작년이었으면 설득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역시 인텔이 나가떨어지니까 설득하기도 편해졌어.’

내가 말한 대로 시장이 흘러가고 있으니 임원들로서도 믿음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2분기나 3분기쯤 되면 그때부터는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4분기 때는 그런 걸 생각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고 말이다.

“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임원 회의가 끝이 나자, 진봉현 비서실장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수고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임원들도 더는 걱정을 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다만 회장님의 말씀처럼 언론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걱정스럽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일성 전자를 타깃 삼아 반도체 매각론을 설파하던 언론들이었다.

이제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가 혜성으로 넘어왔으니 언론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 나이가 나이이니, 이병건 회장에게 했던 것처럼 노망났다는 식의 기사는 쓰지 않겠군.’

아마 나는 노망난 게 아니라, 젊은 혈기가 그룹 전체를 망칠 거라는 식의 기사를 쓰지 않을까 싶었다.

“언론이 뭐라고 하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됩니다.”

“하하, 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보다, 명예 회장님께서는 따로 말씀하신 게 없으십니까?”

“그저 회장님을 믿는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임원들이 나를 믿고 이한철 명예회장도 나를 믿는다면, 반도체 사업과 관련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거 같았다.

‘일성 직원들만 잘 다독이면 되겠어.’

* * *

김종우 회장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이호승 그 작자가 반도체 사업부를 혜성에게 매각했답니다.”

“재계에 파다하게 퍼진 이야긴데, 제가 못 들었겠습니까. 당연히 저도 들었습니다.”

“아니,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반 혜성 동맹에 끼워주었더니, 우리에게 말도 안 하고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다니.”

“우리를 배신했다고 봐야지요.”

“빌어먹을! 역시 신 회장님도 그렇게 보십니까?”

“배신한 게 아니라면 왜 지금까지도 연락 한 번 없겠습니까? 이미 이호승 부회장은 반 혜성 동맹에 탈퇴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뭔가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탈퇴한다니. 그자는 우리의 모임이 무슨 장난 같이 느껴졌나 봅니다.”

그 말에 신진호 회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는 이호승 부회장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반 혜성 동맹에 들어왔더니, 일성 그룹을 적대하는 반 일성 동맹이 결성되어 버렸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손해만 잔뜩 본 셈이었다.

그러니 이호승 부회장의 입장에서는 반 혜성 동맹을 나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신 회장님. 계속 이대로 있을 겁니까?”

“그러면요?”

“혜성 그룹의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우리만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겁니다.”

신진호 회장은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지금은 뭐,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연 매출이 3조에 가까워지고 있는 혜성 그룹이었다.

규모만 봤을 때는 이미 두 기업을 아득히 초월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죠. 어차피 혜성 그룹은 자멸하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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