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드디어 얻었군
결국 반 혜성 동맹에서의 대책 회의는 이번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끝났다.
그저, 각 그룹에서 혜성 그룹을 견제하자는 그런 이야기만 나누고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부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은성 전자에서 대대적인 할인 공세를 한다고 합니다.”
이호승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초부터 할인 공세를 한다니. 작년에 매출도 많이 올렸으면서 왜 그런답니까?”
갑작스럽게 호황기가 찾아온 터라, 은성 전자의 제품은 그야말로 생산하는 족족 팔려나갔다.
얼마나 판매가 잘 되는지, 오히려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은성 전자가 할인 공세를 한다고 하니 이호승 부회장으로선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할인율은 얼마나 된답니까?”
“새로 출시된 제품들도 최소 20% 이상 할인한다고 합니다.”
“20%요?”
“그리고 고려일보에서 전하기를, 광고 내용도 수정하겠다는데 아무래도 저희를 저격하는 거 같습니다.”
“허!”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은성 전자의 견제를 받게 되다니.
‘곤란하기 그지없군.’
사실 은성 그룹의 입장에선 일성 그룹을 견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일성 그룹은 누가 봐도 혼란에 빠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호승 부회장은 구자성 회장의 성격이라면, 일성 그룹을 공격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
구자성 회장은 정도를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의 예상을 깨고서 구자성 회장이 견제하기 시작했으니, 그로선 실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부회장님, 혜성 그룹에서도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혜성에서도요?”
“예, 가전에다 컴퓨터까지 할인 공세를 하고 있습니다.”
가전에서 1위와 3위의 시장 점유율을 보이는 두 전자 회사가 동시에 할인 공세를 하니, 일성 전자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일성 전자가 그리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반도체 사업부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상황.
여기에 가전을 대대적으로 할인해서 판다면, 영업이익이 줄어들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반도체 사업부의 적자를 감당하는 게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은성 그룹 회장님께 연락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한성과는 만나봤자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한성이 요구할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겨우 이 정도의 압박에 굴복해서 반도체를 포기할 수는 없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서 구자성 회장을 만났지만, 오히려 구자성 회장을 만나고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부회장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구 회장님이 저희 회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업가 아닙니까? 감정에 휘둘려서 저희를 공격하신다면,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만 어부지리를 보게 될 겁니다.”
“제가 감정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입니까?”
“…….”
“오히려 저는 이호승 부회장이 감정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반도체 말입니다. 반도체를 일찍이 포기했다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겠어요?”
구자성 회장의 말에 이호승 부회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마 구자성 회장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한성 회장에게 따로 들은 것이 있으십니까? 만약 그에게 어떤 제안을 받은 거라면, 저에게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더 좋은 조건을 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 같군요. 이호승 부회장이 주식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호승 부회장은 미간을 좁혔다.
주식이라니.
아무래도 구자성 회장 역시 한성의 투자 수익률을 보고 눈이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호승 부회장님. 반 혜성 동맹이란 것에 가담했다면서요?”
“예, 저도 그런 곳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한성 회장이 저희 그룹의 일에 관여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혜성에서도 반 일성 동맹을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은성 그룹 역시 그 동맹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 반 일성 동맹이라고요?”
“혜성 그룹을 적대하는 파벌도 생겼는데 일성 그룹이라고 적대하는 파벌이 없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호승 부회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런 자들이랑 어울리는 게 아니었어.’
아무래도 반 혜성 동맹에 가담한 것은 최악의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는 게 그나마 이호승 부회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란 겁니다.”
구자성 회장의 말에 이호승 부회장은 다시금 입술을 깨물더니, 그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구자성 회장님이 저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간단합니다. 저는 혜성 그룹과 뜻을 함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한성 회장이 원하는 대로 이명승 사장이 일성 그룹의 회장직을 잇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아…….”
그 말을 들으니 납득이 갔다.
하긴, 은성 그룹 입장에서는 이호승 부회장이 회장직을 잇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러면 혜성 그룹과 일성 그룹이 동맹 관계가 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구자성 회장님의 조언은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거창하게 조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제 생각을 몇 마디 한 거뿐이니까. 아무튼,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구자성 회장을 떠나보낸 이호승 부회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반 일성 동맹이라…….’
은성 그룹과 혜성 그룹이 뭉친 것만 봐도 이미 반 혜성 동맹보다 위협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구자성 회장은 두 그룹이 끝이 아니라는 식으로 암시하였다.
어쩌면 세계 그룹처럼 혜성 그룹과 친한 관계의 재벌들도 반 일성 동맹에 가담할 수도 있으리라.
‘이한성 회장이 사모펀드라도 만들어서 재벌 총수들의 투자를 받는다고 한다면, 반 일성 동맹의 규모도 지금보다 훨씬 커지게 될 거야.’
그의 이 같은 예상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도레미 그룹에서도 저희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단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호텔과 백화점에서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뭡니까?”
“정우 그룹의 낌새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도레미 그룹에 정우 그룹까지?
만약 두 개의 그룹까지 반 일성 동맹에 가담한다면 일성 그룹은 절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빅 5에서 세 개의 기업이 일성 그룹을 적대하는데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심지어 일성 그룹이 하나로 똘똘 뭉친 상태도 아닌데 말이다.
“부회장님, 아무래도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호승 부회장은 침음을 삼켰다.
이젠 그의 심복들까지도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만큼 그룹의 상황이 심각했던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고 했었던 건가.’
절대 반도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혜성 그룹은 너무도 강대하였다.
그야말로 숨도 쉬기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지금 당장 일성 그룹이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룹이 무너지지는 않아도 내가 몰락하겠지.’
사내의 여론은 이미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는 것으로 결정된 상황.
회장도 아니고 일개 부회장에 불과한 이호승이 끝까지 집착을 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이한성 회장과 약속을 잡아주십시오.”
이호승 부회장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혜성 그룹에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 * *
1월 17일.
마침내 유지은이 아이를 출산하였다.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다.
언론에서도 내 득남 소식을 떠들썩하게 보도할 정도였다.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지은 씨인데…… 이거 참.’
뭐가 됐건, 많은 사람이 축하해 주니 기분은 좋았다.
“회장님, 이호승 부회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다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나와 만남을 계속 거부해왔던 이호승 부회장이 혜성 그룹 본사로 찾아온 것이다.
‘역시 나를 찾아온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이호승 부회장은 현재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유리하기 그지없었던 후계 판도가 뒤집히기 직전의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반도체 사업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승세가 뒤집힐 게 분명하니, 그로선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 혜성 동맹과 반 일성 동맹의 주축이 만났지만, 서로 웃는 얼굴이었다.
나도 그렇고 이호승 부회장도 그렇고 그 유치한 모임에 그리 진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득남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이 태한이라고 했던가요?”
“예. 이태한입니다.”
“저희 자녀들과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군요.”
이호승 부회장의 말에 나는 속으로 어처구니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자녀들은 중고등학생인데 이제 1살인 태한이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속으로는 황당해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호승 부회장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뜻이었으니, 나도 긍정적으로 반응해 줄 수밖에 없었다.
“우선 회장님께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과라면?”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 등이 결성한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반 혜성 동맹이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애매하게 표현하는 이호승 부회장이었다.
하기야, 내 면전에서 대놓고 반 혜성 동맹이란 소리를 할 수는 없었을 거다.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 김종우 회장이 억지를 부렸다는데, 부회장께서도 그거에 넘어가신 거겠지요.”
“아, 정확하십니다.”
“그런데 사과만 하려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사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안이라. 반도체입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호승 부회장도 더 끌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게 저희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이지 않습니까? 제가 이 반도체 사업부를 회장님께 매각하겠습니다.”
“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체, 고민하는 얼굴로 턱 끝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호승 부회장이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갑자기 태도를 바꿀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저희 반도체를 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수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제안했던 금액만 맞춰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1,500억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지금 그 정도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할 거 같습니다.”
“예?”
이호승 부회장이 황당한 얼굴을 하자, 나는 되도 않는 변명을 하였다.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느라 자본이 부족하다는 둥, 메모리 반도체의 사업성이 예전만 못한 거 같다는 둥.
당연하겠지만 인수가를 낮추려는 수작이었다.
‘그러게, 진즉에 팔았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이제 급한 쪽은 이호승 부회장이었다.
그런데 구태여 1,500억을 주고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
이호승 부회장도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1,200억! 1,200억을 올해 안에만 주십시오. 여기까지가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우 그룹은 팬더 사라는 가치 없는 자동차 회사를 3백억보다 비싸게 주고 인수했는데, 나는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3백억이나 깎아서 인수하였다.
미래의 반도체 가치를 생각하면 실로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잔금 납부 기간이 거의 1년이니,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