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네가 하면 나도 해
솔직히 예상을 아예 못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호승 부회장의 입장에서 혜성 그룹과 나만큼 원망스러운 존재도 없을 터.
그러니 반 혜성 동맹인지 뭔지 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나와 혜성 그룹을 견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성 그룹의 부회장으로서 자존심이 있지,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호승 부회장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반 혜성 동맹에 일성 그룹이 끼어든다면, 위협적인 세력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일성 그룹 전체가 반 혜성 동맹에 가담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세력을 불릴 수밖에 없겠어.’
괜히 나 혼자서 세 개의 그룹과 맞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저들이 세력을 모은다면 나 역시 세력을 모아주면 그만이었다.
‘우리 혜성 그룹을 싫어하는 재벌들도 많지만, 일성 그룹을 싫어하는 재벌들도 적지 않지.’
쌍호 그룹이나 샤롯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쌍호 그룹의 김종우 회장의 경우 나만큼은 아니지만, 젊은 나이인데도 성격이 오만하여 적이 많았다.
이들이 뭉치는 것을 싫어할 재벌 총수들은 절대 적다고 볼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나에게는 주식의 신이란 별명이 있지.’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인정민 실장에게 말했다.
“실장님. 제 주식 계좌 하나를 은밀하게 언론에 퍼뜨려주십시오.”
“주식 계좌를요?”
“사람들이 제 천문학적인 자금력에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의구심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면 주식 계좌를 공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거 같습니다.”
인정민 실장은 눈을 빛냈다.
눈치가 빠른 그이니, 내가 단순히 의구심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계좌를 공개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저에게 일을 맡기시면, 늦어도 이틀 뒤에는 전 국민이 회장님의 주식 수익률을 알게 될 겁니다. 하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 *
확실히 인정민 실장의 일 처리는 빨랐다.
일을 맡긴 둘째 날부터 재계에 소문이 퍼지더니, 셋째 날부터는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혜성 그룹 자금력의 비밀을 파헤치다!>
<최근 1년간의 수익률 8,930%!>
<이한성 회장, 그는 주식의 신인가?>
<3백억이 넘는 재산을 주식으로 번 이한성 회장. 하지만 지금 공개된 재산조차 일부에 불과하다고 추정!>
진봉현 비서실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아침부터 아주 난리가 난 거 같습니다.”
“예, 어떻게 제 주식 계좌가 공개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따로 조사하고는 있는데, 태신 증권에서도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고 있습니다.”
“더 조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습니다.”
“예? 아, 알겠습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까?”
“거의 모든 언론에서 기자회견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과 재벌 총수들이 면담을 요청한 것 말고는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어떤 기업에서 저와 만나자고 합니까?”
“10대 기업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정우 그룹과 은성 그룹, 그리고 도레미 그룹에서 회장님과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정우 그룹’이란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권오중 회장도 내 투자 수익률을 보니 군침이 돌았나 보지?’
지금은 투자 광풍의 시대였다.
작년부터 주식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주식에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데, 재벌 총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은성 그룹이라. 딱 좋은 상대로군.’
재계에서는 은성 그룹과 일성 그룹 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가장 사이가 좋았던 두 그룹이 지금은 철천지원수처럼 서로를 대했기 때문이었다.
은성 그룹의 회장은 지금도 일성이란 소리만 들어도 이를 갈고 있으니, 그와 힘을 합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은성 그룹 회장님과 가장 먼저 만나고 싶군요.”
“예, 회장님의 뜻을 은성 그룹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론들의 기자 회견 요청에는 어떻게 답변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언론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죠. 적당히 성명만 내면 될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이 물러나자 나는 이호승 부회장을 생각하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일개 부회장인 당신과 혜성 그룹의 회장인 내가 세력 다툼을 하면 누가 이길까?’
원래라면 다른 그룹과 힘을 합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쌍호 그룹이나 샤롯 그룹 때문에 다른 그룹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호승 부회장이 먼저 선을 넘은 이상, 나로선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잘 됐어. 이참에 세력을 모아서 일성 그룹을 확실하게 짓밟는다면 이호승 부회장의 여론도 더욱더 안 좋아지겠지.’
이미 지금도 이호승 부회장의 여론은 그리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명승 사장이 의혹을 제기한 게 효과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일성 그룹의 상황까지 안 좋아진다면, 이호승 부회장을 실각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나저나 권오중 회장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지금 이 시기에 나를 찾는 걸 보면 그도 내 투자 수익률을 보고 움직인 게 분명하였다.
돈 욕심이라면 샤롯의 신진호 회장과 거의 엇비슷한 그이니, 탐이 날 수밖에 없을 터.
‘한번 만나는 것도 손해는 아니겠지.’
* * *
은성 그룹 회장, 구자성은 내가 지금껏 만나봤던 다른 재벌 총수들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김종우 회장이나 권오중 회장, 신진호 회장 등, 대부분의 재벌 총수들은 다혈질이거나 권위주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세계 그룹의 회장인 양희수 회장도 나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지만, 그룹 내부에서는 대단히 권위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은성 그룹의 구자성 회장은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나를 대하면서도 철저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내가 혜성 그룹의 회장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구자성 회장의 성격이 그러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구 회장님.”
“아니에요. 인연이 없었을 뿐이지, 지금부터 자주 뵙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곧 아이를 출산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 내달 안에 출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되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던 구자성 회장은 주식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였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실제 수익률을 보니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더군요. 진심으로 이 회장의 능력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자성 회장의 눈빛은 정말 나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1년 만에 수십억으로 3백억을 벌었으니 부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조차도 내 여러 계좌 중의 하나일 뿐인데 말이야.’
내 진짜 자산은 일본에 있었다.
일본 부동산에만 현재 가치로 따져도 수천억이 넘는 거금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으로선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비밀 자금이었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에게도 그 운을 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구자성 회장님도 주식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요즘 주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저도 조금씩 투자를 해보고 있는데, 상승장인데도 별로 재미를 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설령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오른다 해도 남들이 더 많은 수익을 본다면 마치 손해를 본 것처럼 느끼곤 했다.
구자성 회장도 지금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의 앞에 있는 내가 1년 만에 8,930%라는 경이적인 수익을 본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굴리는 자금이 워낙에 크다 보니, 한국에서는 이익을 보기가 어려울 거 같습니다.”
“이 회장도 지금 한국에서 투자하고 있지 않나요?”
“저는 대부분의 자산을 해외에서 굴리고 있습니다. 신문에 적힌 제 계좌는 국내용일 뿐, 해외 계좌는 따로 있습니다.”
“그런가요?”
구자성 회장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백억이나 되는 거금을 굴리고 있는데도 그저 국내용이라고만 말하니 그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회장. 혹시…….”
“예, 말씀하십시오.”
“저에게도 조언 같은 거 해주실 수 있을까요.”
“조언이라면?”
“이 회장에게 주식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60대인 그가 30대의 나에게 배움을 구하다니.
그게 아무리 주식이라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구자성 회장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오, 그래요?”
“이미 세계 그룹의 양희수 회장도 저에게 투자를 위임하신 상태입니다. 현재 일본에서 투자하고 있는데,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익을 거두고 있습니다.”
내 말에 구자성 회장은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저를 그냥 도와주지는 않을 거 같은데, 이 회장. 혹시 저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하나 있긴 합니다.”
“어떤 겁니까?”
“일성을 타도하는 것에 협력해 주십시오.”
“일성 타도라.”
구자성 회장은 턱을 쓰다듬었다.
“아시겠지만, 지금 일성 그룹은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렇죠. 이병건 회장이 쓰러지면서 큰 혼란이 있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적이 약해졌는데,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흠.”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나에게서 받게 될 투자 조언도 조언이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일성 그룹과의 원한이었다.
구자성 회장은 이병건 회장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일성 그룹을 흔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 회장이 일성 그룹을 공격하려는 것은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가 탐이 나서겠죠?”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그럼 힘을 보태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약속하면 되겠냐고 물으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성에서 반도체를 독점하려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가전제품 사업까지 독점할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마치 부탁하듯 그리 말했지만 사실 이건 경고였다.
반도체에서 시장을 독점하는 건 용납해도 가전제품까지 시장을 독점하려 드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물론입니다. 저는 일성 전자의 지위만 가져도 만족합니다.”
실제로도 나는 은성 전자와 1, 2위를 다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국내 가전에서 1, 2위를 다툰다는 것은 미래에 세계 가전의 1, 2위를 다툰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 말이다.
* * *
“아니, 하필 이런 시기에 이한성 그놈의 계좌가 공개될 게 뭐랍니까.”
김종우 회장이 한탄하듯 말하자, 신진호 회장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이한성이 우리의 동맹을 눈치채고서 일부러 공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그렇다면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요.”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반 혜성 동맹의 규모를 키우는 것도 어려워진 거 같습니다. 다들 이한성의 투자 수익률에 눈이 돌아가서 혜성 그룹을 적대하는 것을 꺼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안 그래도 ‘주식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별명을 증명이라도 한 것처럼 확실한 증거가 신문으로 보도되니, 재벌 총수들조차 한성과 친해지고 싶어 안달을 내기 시작했다.
돈을 맡기기만 하면 1년에 열 배에 가까운 이익을 거두니, 재벌 총수들로선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이 모임에 참여한 듯싶군.’
이호승 부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 혜성 동맹에 가담한 것이, 벌써 후회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