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끼리끼리 모였네
“그리고 황인범 회장님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황인범 회장님이라면 혹시 명동의 그?”
“예, 그분 맞습니다.”
“그, 그분은 대기업 회장들도 쉽게 뵐 수 없는 분 아닙니까? 그분이 과연 저를 보려고 할지…….”
은퇴했는지, 요즘 소식은 거의 들려오지 않고 있지만, 황인범 회장은 명동을 대표하는 큰손 중의 큰손이었다.
굴리는 자금만 수천억이란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는데, 이 천문학적인 자금력 때문에 대기업 회장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말이다.
“저와 굉장히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한제인은 넙죽 허리를 숙였다.
비록 사채업자라고는 하나, 은행보다도 더 신용도가 있는 것이 황인범 회장이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준다는데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 * *
“황 회장님,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끌끌, 자네가 하는 사업인데 오히려 투자할 기회를 줘서 내가 다 고맙네.”
황 노인의 말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의 누구도 혜성 반도체가 새로 추진하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이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메모리 반도체도 적자가 나는 판에 시스템 반도체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서 언론에서는 ‘만용’을 부린다는 자극적인 표현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황 노인은 혜성 반도체에 추가적인 투자를 해주었다.
덤으로 한제인의 동현 반도체에도 투자하였고 말이다.
“이번에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시스템 반도체의 성공은 100% 확신할 수 없었다.
10년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황 노인이 믿어주었는데 내가 나를 안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련히 잘할 거라 믿네.”
“명동에서는 완전히 은퇴하신 겁니까?”
“끌끌. 자네가 있는데 사채업을 계속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자네에게 투자하는 것이 더 돈이 되는데 말이야.”
“그러면 앞으로도 저를 계속 도와주십시오. 지난번에 갑자기 은퇴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많이 서운했었습니다.”
“서운하기는. 나 없이도 잘만 사업하던데?”
“그럴 리가요. 황 회장님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줘야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뭐 알았네. 사채업을 다시 시작하지는 않겠지만, 은퇴 생활이 적적하기도 하니, 가끔 자네를 상대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황 노인은 다시금 끌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황 노인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정우 그룹의 권오중 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정작 내가 찾는 사람은 안 오고 왜 이 사람이 찾아온 거야?’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기에, 나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축하 좀 받으려고.”
“축하라니요?”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 보군. 팬더 사를 우리가 인수하게 되었는데 말이야.”
권오중 회장은 이죽거리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팬더 사를 누가 가져가나 했더니 결국, 정우에서 가져갔네.’
내 입장에서는 폭탄 돌리기나 다를 게 없는 인수전이었다.
그런데 권오중 회장은 마치 엄청난 선물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뭔가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게도 느껴졌다.
“축하합니다. 아주 좋은 회사를 인수하셨군요.”
“혜성에서 포기하지 않았으면 우리에게 기회가 안 왔을 텐데, 나에게 기회를 줘서 참 고마워.”
고맙다니.
과연 저 말이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였다.
‘이러다 정우 그룹의 몰락이 앞당겨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혜성 그룹도 재미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니, 지금은 크게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고, 경고 좀 하려고.”
“경고라니요?”
“요즘 반도체에서 돈을 막 쓰고 있는 거 같은데, 조금 자중하는 게 좋을 거야. 쌍호와 샤롯에서 혜성을 노리고 있거든.”
의외였다.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권오중 회장이 이런 경고를 다 해주다니.
“정우에서는 저희를 노릴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내가 팬더 사를 인수한 이유가 뭔데? 나는 혜성 자동차를 노리는 거지, 혜성 그룹 전체를 노리는 것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아무튼, 사내 유보금에 여유를 두는 게 좋을 거다. 괜히 그런 허접한 것들에게 당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다.
나를 도와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잘난 척을 하려는 것인지.
‘뭐가 됐건, 반 혜성 동맹이라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어.’
권오중 회장이 팬더 사를 인수하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일이 번거로워졌다.
물론 크게 상관은 없었다.
팬더 사 인수전의 여파로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 간에 분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두 그룹이 합심해도 별로 무섭지가 않은데 내부 다툼까지 벌이고 있으니, 나로선 크게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복수해야 할지만 고민이 될 뿐이었다.
* * *
“이호승 부회장, 저희가 든든한 동맹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쌍호의 김종우 회장이 불쑥 찾아와서는 그 같이 말하자, 이호승 부회장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 반 혜성 동맹이란 것에 가입하라는 말씀입니까?”
“지금 후계 구도가 어지럽게 된 것이 이한성, 그놈 때문이 아닙니까?”
“…….”
“부회장에게도 혜성이 적이고 우리에게도 혜성이 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맹을 맺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한성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다는 점이었다.
‘뭐 사실 지금도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 이한성 회장이 반도체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야.’
혜성 그룹에서 시스템 반도체를 포함한 종합 반도체를 추구한다는 말을 듣고 이호승 부회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천문학적인 적자가 나고 있는데 시스템 반도체에까지 도전한다니.
이 정도면 반도체에 그룹의 운명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심지어 인텔의 임직원까지 대거 영입했다고 한다.
혜성 그룹은 1983년, 일성 그룹에서 반도체 시장에 도전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걸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러니 이호승 부회장으로선 한성과 협상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도체 사업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근데 과연 이자들을 믿어도 될까?’
쌍호 그룹이고 샤롯 그룹이고 빅 5인 일성 그룹의 시선에서 보자면 실로 보잘것없는 기업들이었다.
그룹의 총매출이라고 해봤자 2조는커녕 1조를 간신히 넘는 수준.
두 그룹의 매출을 합쳐도 일성 그룹에 비빌 수 없었기에 이들을 믿고 혜성 그룹에 대적하는 것이 옳을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을 신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반 혜성 동맹이란 것을 결성한 지 반년도 넘었다는데, 그동안 한 게 뭐입니까?”
김종우 회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기에 말문이 막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팬더’ 사를 거론하였다.
“이한성, 그놈이 팬더 사를 인수하려는 거, 저희가 막았습니다.”
“팬더 사는 정우 그룹에서 인수하는 거로 결정 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그렇긴 한데, 어찌 되었건 이한성 그놈이 팬더 사를 포기한 것은 우리가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우만 나섰으면 과연 그놈이 포기했겠습니까?”
그의 말에도 이호승 부회장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이한성 회장은 팬더 사를 인수할 생각이 있었던 걸까?’
이병건 회장이 남긴 말이 신경 쓰였다.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을 물 먹이려고 일부러 팬더 사를 인수하는 시늉을 했다는 그 말 말이다.
‘혜성 그룹이 올해 반도체에 투자한 돈만 천억이 넘는다. 지금도 계속 투자를 거듭하고 있고 말이야. 이것만 봐도 혜성 그룹이 자금력이 부족해서 팬더 사를 포기한 것은 절대 아닐 거란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병건 회장의 말이 맞는 거 같았다.
즉, 쌍호 그룹이고 샤롯 그룹이고 한성의 손에 놀아났다는 뜻이었다.
물론 본인들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동맹에 가입하지는 않겠지만, 긍정적으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신뢰가 단 1도 안 가는 자들이었지만, 한성을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만 있다면 반 혜성 동맹에 가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반 혜성 동맹이 제 역할을 해준다면 한성도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에 더는 관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 * *
1986년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덧 연말.
나는 오랜만에 유지은과 오붓한 시간을 나누었다.
유지은은 출산이 임박해서 배가 남산만 했다.
“한성 씨. 일성 그룹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식사가 끝나고 유지은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일성 그룹이 언론에 자주 나와서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글쎄요. 아마 한동안은 계속 혼란스럽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 한성 씨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죠?”
“예. 일성 그룹 회장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혼란이 지속될 겁니다.”
“큰일이네요. 이병건 회장님이 무사히 퇴원하셔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임신한 몸으로 괜한 일에 마음 써봤자 좋을 게 없었다.
뭐, 사실상 친가나 다를 게 없으니 괜한 일이라고도 볼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성 씨.”
“예?”
“우리 혜성 가는 이런 일이 안 생기겠죠?”
평소에는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역시 임신을 해서 그런지 성격이 예민해진 거 같았다.
나는 속으로 쓰게 웃고는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나 역시 우리 혜성 그룹이 일성 그룹처럼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내가 겪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자식들은 화목한 가정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이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을 여럿 낫게 되면, 결국 돈 문제로, 경영권 문제로 싸우게 되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으리라.
‘아직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닌데, 노사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생각이 많아지는군.’
노사는 늘 말한다.
가족을 믿지 말라고.
설령 자식이라 해도 지분을 함부로 넘기지 말라고 말이다.
예전에 노사가 이런 말을 할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막상 유지은의 출산이 임박해지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호승 부회장처럼 패륜 짓을 벌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형제끼리 싸우게 될 수도 있었다.
‘과연 재벌 그룹에서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야.’
* * *
1986년이 가고 1987년이 되었다.
해가 지났음에도 일성 그룹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병건 회장의 부재로 후계 다툼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이호승 부회장은 아직도 나를 안 만나주는군. 반도체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1987년이 되었으니, 일성 그룹의 후계 경쟁에도 더욱더 깊게 개입해야 할 거 같았다.
이병건 회장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회장님. 저 인정민입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유지은의 출산이 임박해서 일찍 퇴근하니, 인정민이 집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쌍호 회장과 샤롯 회장이 동석한 자리에 일성의 이호승 부회장이 나타났습니다.
“세 명이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는 미간을 구겼다.
김종우 회장과 신진호 회장이 서로 만나는 거야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이호승 부회장이 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찌 보면 반 혜성 동맹에 일성 그룹이 끼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