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시스템 반도체도 키워야 해
그 뒤로 나는 미국 내에서의 뉴 코렌드 인지도와 스티브 잡스의 동향에 관해서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에서 뉴 코렌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미국인만이 뉴 코렌드를 알고 있고, 대부분의 미국인은 혜성 자동차는커녕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릅니다.
신은규 대표의 솔직한 말을 듣자, 실망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혜성 자동차에서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거의 미국을 점령한 기분을 느꼈었는데, 실상은 전혀 아니라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긴 했다.
혁신적인 광고로 화제가 됐던 미래 자동차조차 미국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뉴 코렌드가 미국에서 어느 정도 매출이 나오고 있다지만, 그래봤자 천억도 안 되는 수준.
미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뉴 코렌드의 점유율은 SUV만으로 따져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군.’
자동차는 조금 더 멀리 봐야 할 거 같았다.
뭐, 지금 당장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것부터가 염치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스티브 잡스와 넥스트사에 대한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워낙에 유명 인사다 보니, 그를 언급하는 기사가 많습니다. 특히 노벨사를 인수한 일로 벌써 마이크로소프트의 대항마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역시 스티브 잡스는 대단했다.
넥스트사가 소프트웨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지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떤 소프트웨어 회사들보다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젠 아예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쟁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넥스트사도 인텔과 큰 관련이 있군.’
넥스트가 인수한 노벨이란 회사는 현재 인텔의 X86 컴퓨터에 네트워크 운영 체제를 이식한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나도 인텔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인텔은 나라는 개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겠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스티브 잡스의 동향을 살펴주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텔사의 퇴직자들을 영입하면서 넥스트사의 여론을 계속 살피겠습니다.
“신은규 대표님께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미국의 일은 잘되고 있군.’
솔직히 조금 걱정하기도 했었다.
스티브 잡스가 내 뜻대로 움직여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매출이야 아직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인텔과의 협력도 잘되고 있었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들도 속속 결과물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대로 쭉 성장한다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대항마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 같았다.
‘일본이야 뭐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겠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판매권을 얻어온 손정의 사장이었다.
일본의 SW 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판매권만으로 상당한 이익을 보게 될 터.
그런데 손정의 사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화와 관련된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다.
노사도 이 시스템에 대해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으니, 손정의 사장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쭉쭉 성장할 거 같았다.
* * *
존 도어는 인텔에서 시스템 반도체를 담당하는 엔지니어였다.
여기서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더 이상 인텔의 엔지니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나까지 해고를 할 줄이야!’
무려 2천 명이 넘는 직원들이 해고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존 도어는 메모리 반도체가 아닌, 시스템 반도체의 기술자였기에, 이번 구조 조정과는 관련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근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팀장에게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빌어먹을. 첨단 기술인 반도체가 이렇게까지 외면을 받다니.’
다른 기업에 입사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메모리 반도체뿐만이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도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라 불리던 인텔조차도 반도체 사업에서 비롯된 천문학적인 적자로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렸을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HS 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신은규라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존 도어에게 한 명의 동양인이 찾아왔다.
한국이란 국적을 가진 동양인이었는데, 그는 존 도어에게 영입 의사를 밝혔다.
‘차라리 나에게 투자를 해주는 거면 모를까, 하필 입사를 제안하다니. 한국이란 나라는 일성 전자 말고는 아는 게 없는데…….’
일성 전자는 인텔의 직원이었던 존 도어조차 알 정도로 유명하였다.
후진국이라 생각했던 한국의 기업이 인텔조차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한국과 관련된 정보는 딱 일성 전자 하나에 불과하였다.
다른 기업은커녕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신은규의 제안을 고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미스터 신의 제안을 받아 보려고.”
“뭐? 한국 기업에 입사하겠다는 거야?”
존 도어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동료가 신은규의 제안을 받아 혜성 반도체란 곳에 입사하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가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회사의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 돈만 많이 주면 그거로 된 거지.”
“돈 많이 주면 뭐 해. 우리의 기술만 쏙 빼버리고 해고할 게 뻔한데?”
“내가 알아봤는데, 거기 기업도 기술이 상당한 편이야. 인텔과 비교해도 격차가 많아 봐야 2년에서 3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
“일성도 아니고 혜성이란 곳이 그렇게 기술력이 좋다고?”
“혜성은 자동차도 만들고 수십 층짜리 빌딩도 만드는 곳이야. 한국에서의 재계 순위도 일성과 크게 차이가 없어.”
그의 동료는 혜성 그룹이란 곳을 자세하게 알아본 듯했다.
그룹의 규모와 사업 영역, 기술력 등을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동차 회사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존 도어가 관심을 가진 건 오직 하나였다.
자동차.
워낙에 자동차를 좋아하는 존 도어다 보니, 혜성 그룹에서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말을 듣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뉴 코렌드라고 알아?”
“당연히 알지. 올해 출시된 크고 아름다운 SUV잖아.”
“그거 만든 회사가 바로 혜성이야!”
존 도어는 입을 떡 벌렸다.
“일본 회사에서 만든 거 아니었어?”
“일본은 도요타고, 뉴 코렌드는 혜성에서 만든 거야.”
혜성에서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껏해야 오토바이나 만들면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뉴 코렌드가 혜성 자동차에서 생산한 자동차라는 소리를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비록 인지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마니아층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차가 바로 뉴 코렌드였기 때문이었다.
‘혜성 그룹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회사였잖아?’
호기심이 생긴 존 도어는 따로 혜성 그룹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덤으로 HS 인베스트먼트도 조사해봤는데, 신기하게도 이 회사가 인텔과도 관련이 있었다.
HS 인베스트먼트가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사에 5천만 달러를 투자했고, 넥스트사가 노벨이란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노벨은 존 도어도 알고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였기에 이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파면 팔수록 대단한데? 동아시아의 회사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어.’
혜성 반도체라는 회사도 만만치 않았다.
동료가 이야기처럼 했던 대로, 기술력의 수준이 인텔의 뒤를 바짝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혜성에 입사하면 혜성을 인텔의 경쟁자로 만들 수 있을까?’
해고당한 처지에서 인텔의 경영진에 서운한 감정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거창하게 복수까지는 아니어도, 인텔의 경영진을 후회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무래도 이호승이 일을 벌인 게 맞는 거 같다.)
노사가 불쑥 나타나 그리 말하자 나는 흠칫하였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 게 아니라, 그의 말이 담긴 의미에 놀란 것이다.
‘이호승이 패륜을 저질렀다니.’
인상만 봤을 때는 절대 그럴 거 같지 않아 보였는데, 역시 사람 속은 들여다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 같았다.
“증거를 찾아내신 겁니까?”
(아쉽게도 증거는 찾아내기는 힘들겠어. 이호승, 그놈이 워낙 철두철미한 놈이라 증거를 남겨둘 거 같지는 않거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증거만 찾아낸다면 일이 쉽게 풀렸을 텐데, 정말 아쉽기 그지없었다.
“이병건 회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금 살아있긴 한 겁니까?”
(뇌사에 빠졌다고 봐야 한다.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최악이군요.”
하필 이런 시기에 뇌사라니.
이병건 회장에게서 직접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얻어내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포기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도 다른 거는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명승이 의혹을 제기한 것 때문에, 다른 재벌의 총수들도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어.)
“오, 그렇습니까?”
다행이었다.
이명승 사장이 가만히 있었다면 이호승 부회장의 뜻대로 일성 그룹의 후계 구도가 완성되었을 텐데, 이명승 사장이 내 조언을 받고서 움직인 결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당분간은 이호승 부회장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호승 부회장도 급해질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내가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 한다. 또 허튼수작을 벌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당장 너에게 시킬 일은 따로 없다. 너는 그저 이명승을 케어하는 것에만 집중해. 심지가 굳지 못한 놈이니, 괜한 일에 흔들릴 수도 있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병건 회장이 뇌사 상태에 빠졌으니, 이제 이명승 사장의 가치도 더욱 커졌다고 봐야 했다.
귀찮더라도 이명승 사장에게 깊은 관심을 주어야 할 거 같았다.
그래야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이호승을 감시하러 갈 테니, 너는 이명승만 잘 신경 써.)
“예, 지금 가시려고 합니까?”
(왜? 더 할 이야기 있어?)
“인텔 직원들을 영입했는데, 시스템 반도체의 전문가들도 몇 명 영입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습니까?”
처음에는 인텔 직원들을 대거 영입했다는 소식에 큰 기쁨을 느꼈었다.
솔직히 백 명은커녕 열 명도 영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150명에 가까운 인원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시스템 반도체의 기술자를 어떻게 취급할지가 문제였다.
일성도 마찬가지였지만, 혜성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만 집중해서 키우고 있었기에 시스템 반도체의 기술자가 사실상 애물단지처럼 느껴졌다.
(시스템 반도체라……. 솔직히 퀄컴의 대주주가 된 시점에서 시스템 반도체를 키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퀄컴이 시스템 반도체의 최강자가 될 기업이니 말이야.)
“그러면 저희는 그냥 지금까지처럼 메모리 반도체에만 집중하면 되겠습니까?”
(흠, 아니다. 생각해 보니, 퀄컴에만 의존하는 것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아. 지금까지 메모리 반도체에만 집중했던 이유는 설계의 비중이 작고 양산 효과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미래를 생각하면 결국 시스템 반도체도 키워야 해.)
“그런데 시스템 반도체를 키우려면 상당한 투자가 필요할 텐데, 지금의 혜성 그룹이 그 정도의 투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노사는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생산 시설은 대만의 TMSC를 따라서 만들면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