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인텔의 직원들을 영입해
(이왕이면 인텔사가 해고한 임직원도 영입할 수 있는 대로 영입해 봐.)
“인텔사의 임직원이요?”
(인텔의 임직원 중 상당수가 메모리 사업부에 몰려 있고, 핵심 경영진이나 엔지니어들도 메모리 사업부 출신이 많아. 이번에 인텔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으니, 인텔이 곧 그들을 구조 조정할 게 분명해.)
“하긴, 메모리 반도체를 포기했는데 직원들을 계속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긴 하죠.”
미래의 한국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한국에서는 직원을 대거 해고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스티브 잡스도 구조 조정을 한 적이 있었고, 다른 회사에서도 직원을 해고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러니 인텔사가 메모리 사업부를 구조 조정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과연 인텔의 직원들이 혜성 그룹에 들어오려고 할까요?”
인텔사 임직원들이 모두 능력자란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인데 직원들의 능력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능력이 좋은 만큼, 그들을 데려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비전이 낮아졌으니, 그들도 당장 다른 회사에 들어갈 수는 없을 거야. 높은 연봉만 제시한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그렇습니까.”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미국인들을 대거 고용한다니.
뭔가 기분이 이상한 거 같았다.
‘그래도 혜성 그룹은 글로벌 기업이 되어야 하니, 능력이 좋으면 어떤 국적의 사람이든 무조건 영입하는 게 맞아.’
설령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인 소련의 사람이라도 능력이 좋으면 영입하는 게 좋았다.
뭐, 소련이 곧 망할 것을 알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만 말이다.
* * *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회장인데, 그 정도 돈이야 못 빌려주겠습니까. 하하하. 자금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오세요.”
“감사합니다.”
이광수 은행장의 확답을 들은 나는 반색하였다.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언제든지 인수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병건 회장을 만나기만 하면 되겠어.’
하지만 그때 안 좋은 소식이 신문으로 전해졌다.
<이병건 회장,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져!>
<일성 그룹의 운명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도 아니고, 하필 이 시점에 이병건 회장이 쓰러지다니.
‘거의 다 넘어온 상태였는데!’
잘하면 올해 안에 일성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병건 회장이 쓰러지니, 앞날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병건 회장이 하루빨리 퇴원하게 된다면 모를까, 이대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호승, 그놈이 일을 벌인 거 같구나.)
“일을 벌였다니요? 설마 자신의 부친을 상대로 패륜 짓을 벌였단 말입니까?”
(뭘 그리 놀래? 재벌 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
(원래라면 내년에 쓰러져야 할 양반이야. 그런데 갑자기 쓰러지니까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지.)
“흠.”
노사가 그렇게 말하니 공교롭게 느껴지기는 했다.
하필 이 시점에, 그것도 반도체 사업을 접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이병건 회장이 쓰러지다니.
(뭐가 됐든, 이명승이랑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거 같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나보다 더 급한 쪽은 이명승일 것이다.
이대로 이병건 회장에 별세하기라도 한다면 일성 그룹의 회장이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나는 이호승의 뒷조사를 하러 갈 테니, 너는 너대로 이명승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해봐.)
“예, 알겠습니다.”
노사가 물러나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쉬운 일이 없군.’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만 얻으면 IMF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반도체 사업부 하나 얻는 게 지난하기만 하였다.
통 크게 1,500억을 제시했음에도 상황이 이러했다.
물론 이병건 회장이 멀쩡했다면 인수 협상이 성공했겠지만 말이다.
“회장님, 이명승 제일제당 사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역시나 나보다 더 급했던 것인지, 이명승 사장이 황급히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를 보며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병건 회장님이 갑자기 쓰러지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도 아는 게 없어요. 회장님께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들었습니다!”
이명승 사장의 말에 나는 실망했다.
그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을 줄이야.
“병원에는 찾아뵙지 않은 겁니까?”
“면회를 할 수 없다며, 회장님의 얼굴을 뵙지도 못했어요. 의사들이 무사하다고는 하는데, 직접 뵙질 못하니 답답해 죽겠습니다.”
이명승 사장은 그답지 않게 흥분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하기야,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졌다는데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명승 사장님.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지금은 흥분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나는 이명승 사장을 진정시켰다.
어쩌면 이호승 부회장에게 일성 그룹 회장직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명승 사장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후우, 그렇죠. 진정하겠습니다.”
“그룹의 임원들과는 만나보셨습니까?”
“예, 비서실장과 몇몇 임원들과는 만나봤는데, 그들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는 분위기더군요.”
“이호승 부회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병원에서 회장님의 곁을 지키고 있다 합니다.”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자신은 이병건 회장을 면회하지 못하고 있는데 동생은 이병건 회장의 곁을 지키고 있다 하니, 이명승 사장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호승 부회장이 수를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호승이가 수를 쓰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요?”
“이병건 회장님이 갑자기 쓰러진 일, 어쩌면 이호승 부회장이 벌인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이명승 사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명승 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호승이가 비록 야망이 크다고는 해도 효심이 깊은 편이에요. 절대 그런 불효막심한 짓을 벌이지는 않을 겁니다.”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기 직전의 상황이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음…….”
“어쨌거나, 이병건 회장님이 정말로 병 때문에 쓰러진 거라고 해도 이호승 부회장을 저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성 그룹의 장남이신 이명승 사장님께서 회장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그렇죠. 이치에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난다고 생각해요.”
“의혹을 제기하십시오. 이호승 부회장이 일성 그룹의 회장이 되려고 비열한 수작을 부린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선 여론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였다.
그래야지만, 이호승 부회장이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만 하면 되나요?”
“아닙니다. 그보다 중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거죠?”
“임원들을 회유해야 합니다. 이호승 부회장보다 더 많은 임원을 말입니다.”
지금 당장 이호승 부회장과 세력 싸움을 벌이기는 역부족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주어진다면 또 모른다.
이명승 사장이 이호승 부회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면, 이명승 사장 쪽으로 넘어올 임원들도 적지 않을 터.
그들을 잘 규합한다면 이호승 부회장과의 세력 다툼에서도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회장님께서 쓰러졌는데, 그런 행동을 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사장님은 이병건 회장이 영영 깨어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만약 중간에 이병건 회장이 무사히 깨어나기만 한다면야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정답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병건 회장이 1987년에 별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설령 이병건 회장이 지금 무사히 깨어난다 해도, 이병건 회장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명승 사장은 공격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후우, 알겠어요. 회장님이 화를 낼까 걱정스럽긴 해도, 일단 이 회장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예, 저도 언론을 이용해서 이호승 부회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할 테니, 임원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이 회장.”
“아닙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이명승 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과연 어떻게 될지.’
이병건 회장이 쓰러지면서 일성 그룹의 후계 구도가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사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령 이명승 사장이 일성 그룹의 회장이 되지 못하더라도,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는 내가 가져야 한다.’
어쩌면 이호승 부회장과도 한번 만남을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이호승 부회장이라면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지만 말이다.
* * *
예상치 못한 변수로 반도체 사업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동차야 아직 미국에서만 인지도를 얻는 수준이었으나, 미국 한 곳에서만 매출이 상당하게 나오고 있었다.
내년에 승용차를 출시하면 그때는 정말 미국에서만 수천 억대의 매출을 기대해 봐도 좋을 듯싶었다.
호텔이나 백화점도 아시안 게임을 통해서 꽤 선전하고 있었다.
아시안 게임은 끝났어도 여전히 외국 관광객의 수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국내 관광객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태였고 말이다.
‘문제는 혜성 건설인데.’
건설 쪽은 아직 특별히 호재가 없었다.
매출이야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지만, 몇 년 전과 비교해봐도 기껏해야 천억 정도 늘었을 뿐이었다.
연 매출이 6천억이다 보니 아직은 그룹 내에서 가장 매출이 높았으나, 영업이익으로 따지자면 3위에 불과했다.
심지어 매출 순위도 내년이면 전자, 자동차에 밀려 3위로 떨어질 전망이었으니, 여러모로 건설에 신경 써야 할 거 같았다.
‘정권이 바뀌기만 한다면야 건설을 키우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혜성 건설은 시공 능력으로 따지면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었다.
중동에서도 알아줄 정도였는데, 혜성 아파트라는 남부럽지 않은 아파트 브랜드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혜성 건설이 매출 성장세가 저조해진 것은 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다른 기업들은 5공과의 유대 관계를 이용하여 각종 건설 공사를 따내는데 우리 그룹은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매출이 정체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인텔사 퇴직자들과 관련해서 보고드릴 게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건설을 어떻게 키울지 혼자 고민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HS 인베스트먼트를 관리하는 신은규의 전화가 왔다.
참고로 신은규는 현재 인텔사 퇴직자들을 혜성 그룹으로 영입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룹에 미국 전문가가 따로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신은규에게 일을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예, 신은규 대표님. 영입은 잘 되고 있습니까?”
-미국 지부를 설립한 쪽으로 가닥을 잡아서 그런지, 인텔사 직원들의 거부 반응이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원래는 인텔사 직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한국이 어딘지도 모를 인텔사 직원들이 아무리 많은 연봉을 제시한다 해도 한국으로 올 리는 없을 거라는 노사의 말에 방향을 바꾸었다.
아예 혜성 반도체의 미국 지부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차라리 잘 됐어. 나중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면, 독점으로 인해 기술이 정체할 수도 있었는데 미국 지부가 생기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한국 본사와 미국 지부 사이를 경쟁케 한다면 기술력이 더욱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몇 명이나 올 거 같습니까?”
-잘만 하면 백 명 정도는 영입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 그래요?”
나는 반색하였다.
백 명이라면 지부를 설립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