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이제 받을 때가 됐지
‘뭐 일단 그거는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지.’
솔직히 우리 그룹에서 준비하고 있는 야구단이 입찰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다른 그룹에서도 야구단 창단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호남 야구팬들의 반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였다.
“야구위원회는 비서실장님께서 계속 살펴주세요. 야구단을 노리는 다른 기업들의 동향도 잘 살펴주시고요.”
“예, 저만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일성 그룹의 이병건 회장과 만나기로 한 날짜가 언제였었죠?”
몇 달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병건 회장은 답을 주지 않았다.
반도체 사업에 미련이 남은 탓이었다.
하지만 도쿄의 땅값이 미친 듯이 오르고, 내가 추천했다고 알려진 주식 종목들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자 생각이 달라진 듯 보였다.
아직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시점에 나와 만나자고 한 것을 보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다음 주 일요일입니다.”
“딱 열흘 남았군요.”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그룹을 경영하는 데 있어, 반도체만큼 중요한 사업이 없었기에, 이병건 회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긴장이 되었다.
“회장님의 바람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긴장하는 것을 느꼈는지, 진봉현 비서실장이 나를 응원해 주었다.
“예, 저도 이참에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얻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 같습니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구태여 노사가 알려준 미래가 아니더라도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는 나로선 탐을 낼 수밖에 없었다.
메모리 반도체에 한해서는 일본이나 미국의 기술력을 거의 따라잡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부디 일성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만약 내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면 남은 건 전쟁뿐이었다.
일본이나 미국이 D램 사업을 접을 때, 같은 한국 기업끼리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결코 득이 될 것이 없는 전쟁이었기에, 이쯤 해서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회장님, 찾으셨습니까?”
그룹 부회장인 이호승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병건 회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곧 혜성 그룹의 회장과 만날 예정이다.”
“이한성 회장과 말입니까?”
“그래.”
이호승은 미간을 좁혔다.
그로선 결코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병건 회장이 한성과 어떤 대화를 나누든 간에 그에게 이익이 갈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시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실 생각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걸 묻는구나. 반도체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다.”
그건 이호승도 알고 있었다.
다만 반도체 사업과 관련해서 어떤 대화를 나눌지가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설마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하신 건 아니겠지?’
이병건 회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걱정이 된 이호승은 다급히 말을 꺼냈다.
반도체 사업부를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회장님. 전에도 보고드렸듯, 반도체 시장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입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사조차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의 철수를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일본 업체들도 철수를 고민하고 있고 말입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세계 시장에 첫 상용 D램을 선보였고, 한때 세계 시장 100%에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보였던 인텔사가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인텔사조차 포기하는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가망이 없을 거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는 이호승처럼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희망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병건 회장 또한 후자 쪽이었다.
그 역시 인텔사를 비롯하여 일본과 미국의 업체들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접으면서 일성 전자에게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나라고 그 사실을 모를까?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혜성이 문제다. 혜성이 치킨 게임을 계속 벌인다면, 결국 우리는 적자를 볼 수밖에 없어.”
활로가 열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성의 야욕이었다.
한성은 이병건 회장처럼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적당히 이익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성과 혜성 그룹의 목표는 옛 인텔사에 버금가는 시장 점유율을 가지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지배자가 되는 걸 원하고 있었기에, 일본이나 미국의 업체들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철수해도 혜성 그룹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몇 해 동안 적자가 누적되고 있던 일성 그룹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말했었지? 혜성 그룹과의 협상에서 실패한다면, 내가 내린 결정은 하나뿐이라고. 나는 너에게 충분한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장님! 반도체 사업부는 그룹의…….”
이호승이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이병건 회장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룹의 미래라고? 도대체 그 소리를 언제까지 할 거야! 지금 미래를 걱정할 때냐? 반도체에서 나는 적자 때문에 당장 망할 처지인데?”
“회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년이 되면 흑자가 날 거라고.”
“그건 혜성 그룹이 저렇게 라인을 증설하지 않을 때 했던 이야기다. 내년이면 혜성 반도체의 생산량이 우리를 능가하게 될 텐데, 그들과 경쟁이 되겠냐?”
“자금력에서 승부를 보면 됩니다.”
“하! 자금력이라고?”
이병건 회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혜성 그룹과 자금력 승부라니.
한성과의 대화로 혜성 그룹의 자금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유추하게 된 이병건 회장으로선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너는 아직도 혜성 그룹의 힘을 모르는 것이야?”
“이한성 회장이 천문학적인 자본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도쿄에 엄청난 크기의 땅을 사들였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도쿄의 땅을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은 이미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만큼 일본의 땅값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도쿄의 땅을 오래전부터 사들였다고 알려진 한성의 자금은 실로 엄청날 것이 분명하였다.
어쩌면 국내 부자 순위를 넘어, 세계 부자 순위에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딴 소리를 해?”
“하지만 개인은 개인에 불과합니다. 이한성 회장이 무슨 대통령도 아니고 우리 일성 그룹의 자금력을 능가할 만큼의 자금력을 보유하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보유하고 있다면? 네 추측이 잘못됐다면 어쩔 거냐?”
“그 정도의 자금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팬더 사 인수전에서 발을 뺐겠습니까? 상대는 고작해야 쌍호 그룹인데?”
“머리를 쓴 것이지. 일부로 인수가를 높인 뒤에 자신의 경쟁자인 정우 그룹과 쌍호 그룹을 동시에 진흙탕 싸움 속에 밀어 넣지 않았느냐?”
이병건 회장의 말에도 이호승은 여전히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혜성 그룹이 두려워서 반도체 사업부를 포기한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성 그룹 회장이 인수가로 제시한 돈이 1,500억이다! 그것도 한 달이면 마련한다고 했어. 그런데도 혜성 그룹에 현금이 없다고?”
“……!”
“더 이야기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겠구나. 됐다. 내가 혜성 그룹 회장과 직접 이야기를 할 테니, 너는 그저 결과를 듣기만 해라.”
“회, 회장님!”
이호승이 다급히 이병건 회장을 붙잡았지만, 이병건 회장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기로 마음의 결심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혜성 그룹이 두려워서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한다니.’
이호승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병건 회장의 결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돈이 많으면 어쨌단 말인가. 정부를 이용하면 되는 일인데.’
혜성 그룹의 현금 동원력이 일성 그룹의 그것을 능가할 수는 있었다.
일성은 계속해서 적자가 누적되고 있으니, 사내 유보금이 그렇게 여유 있는 상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성 그룹이 혜성 그룹보다 자금력이 부족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혜성 그룹은 일성 그룹과 같은 한국 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같은 한국 기업 간의 치킨 게임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두 기업 사이를 중재하려고 들 터.
그리고 정부의 중재는 일성 그룹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성 그룹도 5공 정권과는 그리 친한 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혜성 그룹보다는 나았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지신 듯하군.”
이호승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이병건 회장은 일성 그룹의 창업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예전의 이병건 회장이 아니었다.
판단력도 흐려졌고 심지어 노환에, 병까지 들었다.
말 그대로 퇴물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호승으로선 퇴물이 되어버린 이병건 회장이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 * *
“인텔이 메모리 반도체를 포기했으니, 내년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노사께서 이야기한 대로 흘러갈 거 같군요.”
아시안 게임의 결과도 그렇고, 나비효과가 제법 많이 발생하기는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반도체의 미래는 크게 바뀐 거 같지가 않았다.
노사가 이야기했던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봤을 때, 원 역사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니 말이야.)
“다행이긴 한데, 조금 아쉽긴 하군요.”
(뭐가 아쉬워?)
“우리 혜성 반도체가 반도체 역사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나는 역사를 많이 바꾸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뉴 코렌드부터, 편의점이나 혜성 모직의 여러 브랜드 등, 원래라면 지금 시점에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보자면, 내가 지금까지 이룬 성과들은 지극히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원래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변화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일성 반도체를 인수할 준비나 해라.)
내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자, 노사가 쓴소리하였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일성 반도체요? 이병건 회장과 만나기로 하기는 했는데, 혹시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계신 겁니까?”
(반도체 사업부를 정리하기로 했다. 너와 자금력 승부를 겨룰 자신이 없었던 게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노사의 확답을 들으니 안심이 되면서도 실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일성의 반도체를 얻는구나!’
1,500억을 주기로 했지만 아깝지 않았다.
일성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를 가짐으로써 1,500억이 아닌, 수십조 이상의 이익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부동산을 조금 정리해야겠군요.”
(그보다는 네가 보유한 주식을 담보로 은행권에 돈을 빌리는 게 나을 거다.)
“하긴, 주식도 많이 올랐으니 1,500억 정도는 빌릴 수 있겠습니다.”
나는 일본 부동산에만 모든 자산을 올인하지 않았다.
여전히 일부 자산은 국내에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혜성 그룹의 지분 말고도 여러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의 주식도 일본의 부동산만큼은 아니지만,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기에 내 국내 자산도 엄청나게 불어난 상태였다.
그러니 은행권에 천억 이상의 돈을 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