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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137화 (137/300)

137화 그런 건 안 줘도 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윤희봉 장관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괜찮습니다. 팬더 사에는 이미 미련을 접은 상태이니, 굳이 도움을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대표님이 하자는 대로 하세요. 우리 당의 대표님께서 나선다면 정우 그룹이고, 쌍호 그룹이고, 전부 다 인수를 포기하게 될 겁니다. 혜성 그룹은 팬더 사를 거저먹으면 되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쌍호 그룹을 물 먹이려고 일부러 인수가를 높여왔건만,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거저먹기는 뭘 거저먹어! 팬더 사를 인수하면 탈 날 게 분명한데!’

전혀 원하지 않는 도움이었다.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저 대표님의 마음만 받겠다고 대신 전해주십시오.”

사실 마음을 받는 것도 그리 원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노태호 대표이지 않은가.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고,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니, 별로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대통령이 될 인물이기도 했고.

-흠, 흔치 않은 기횐데…….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대표님의 도움을 받겠습니까. 괜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 하니, 알겠습니다. 이 일은 그냥 묻어두는 거로 하지요.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역시 이 회장은 범상치 않아요. 다른 총수들 같았으면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렇습니까?”

-어쨌든, 노 대표님께서 이 회장께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세요.

나는 쓰게 웃었다.

대통령은 나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을 텐데, 정작 후계자 취급을 받는 노태호 대표는 왜 나를 좋게 보는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노태호가 너를 어지간히 좋게 보는 모양이구나.)

윤희봉 장관과의 통화가 끝나자 노사가 그같이 말했다.

“노사께서 보시기에도 그렇게 보이시죠?”

(팬더 사의 인수전에 개입하면서까지 너에게 은혜를 갚으려 했으니, 두말할 것도 없지 않으냐.)

“이걸 긍정적으로 봐야 할지, 부정적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됐든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지금의 대통령과는 친해지고 싶어도 친해질 수 없는 관계였지만, 노태호 대표와는 친해질 기회가 생긴 상태였다.

그룹을 위해서라면 이 기회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글쎄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노사를 보며 속으로 ‘아차!’ 하였다.

5공을 복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노사에게 괜한 말을 한 듯싶었다.

노태호 대표도 신군부의 핵심 인물 중의 한 명인데 말이다.

(나비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노태호 그놈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무려 5년이란 시간 동안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로 있을 테니 말이야.)

“노사께서는 나비효과가 발생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나비효과는 발생하긴 할 거다. 단지, 그 방향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나도 알 수가 없어. 민주 진영이 승리할 수도 있고, 원 역사처럼 되거나 오히려 더 악화할 수도 있지.)

“이왕이면 역사가 바뀌어서 바로 민주화가 되었으면 싶군요.”

노사가 민주화 투쟁을 한 정치인들에게 실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내년 12월에 치러질 대선에서 패배한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김영산 대표와 김태중 선생을 존경했던 노사지만, 이들의 분열로 대선에서 패배하자, 그 뒤로는 줄곧 정치인을 불신하였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 역시도 그렇게 되겠지?’

절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였다.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고 혜성 그룹과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내년의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이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야당을 지지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 결론은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유지하라는 거다. 멀어질 필요도 없지만, 일부로 가까워질 필요도 없어.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태호 대표가 대통령이 되든, 아니면 중간에 어떤 이유로 낙마하든 간에 노사의 말처럼 가깝게 지낼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어차피 그의 권력은 단 5년에 불과한 시한부 권력이었으니까.

* * *

아시안 게임 조직 위원회의 간부인 박철용이 중국인 기자로 보이는 자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새끼들,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 모양이군.)

노사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노태호가 갑자기 왜 한성에게 관심을 두는지 알고 싶어서 아시안 게임 조직 위원회를 관찰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수상하게 느껴지는 장면을 목격하니 가슴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테러를 그렇게 막아내다니. 역시 한국의 기술력은 아시아에서 다섯 순위 안에 드는 거 같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어떤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북한의 시도는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흠, 북괴가 아시안 게임을 또 방해하려고 든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김 위원장이 아시안 게임이 성공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을 꺼내시는 걸 보면 우리를 도와주실 의향이 있으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저희는 북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큰형이 아우의 일을 모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하하.”

“하하,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국에서 우리를 잘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다 보면 서로 상부상조할 일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명백했다.

우리를 도와주면 북한의 정보를 넘겨주겠다.

바로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리나라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경제 개혁에 있어서 한국만큼 훌륭한 모델은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많은 조언을 해주시고, 이번에 또 아시안 게임이 있지 않습니까?”

“예, 제가 또 아시안 게임에서 한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 선수들을 차별하거나 심사에 불이익을 주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선수들이 조금 과격해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 대회에서 우승했다 보니 선수들의 부담감이 상당해서 말입니다.”

“그 말씀은?”

“너그럽게 봐달라는 의미입니다. 너그럽게.”

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대놓고 편파 심사를 해달라고 요구하는군. 역시 중국은 중국이다, 이건가?’

미래의 중국이 얼마나 답이 없는 나라인지 아는 노사였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이라고 답이 있는 나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지금의 우리나라도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거야.’

박철용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흔쾌히 말했다.

“하하, 우리가 일본처럼 속이 좁은 나라도 아니고, 그 정도야 너그럽게 이해 못 하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역시, 한국은 말이 잘 통하는 거 같습니다. 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치켜세우더니,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세한 이야기란, 어떤 스포츠에서 심사의 이익을 줄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물론 편파적으로 심사를 해주는 대가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앞서 얘기했듯, 중국에서는 북한의 정보를 제공해 주기로 하였다.

한국이 도와줌으로써 중국이 얼마나 많은 금메달을 따느냐에 따라 정보의 질이 달라진다는 식이었다.

(하필 혜성 그룹에서 후원하고 있는 스포츠들을 팔아먹다니.)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던 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단순히 편파 심사로 나라에 해가 갈 뿐만 아니라, 혜성 그룹에도 해가 갈 거 같았다.

박철용이 우승 가능성이 적은 스포츠들을 중국에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이다.

(과연 너희들의 생각처럼 돌아갈지 두고 보자고.)

노사에게는 저들의 비열한 수작을 방해할 힘이 있었다.

구태여 한성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그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 *

“드디어 아시안 게임이 끝났군요.”

1986년 10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아시안 게임이 끝이 났다.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끝났군.’

9월 초에 테러 기도 사건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경기 운영도 편파 판정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을 제외하면 성공적이었고 그 외에 다른 것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혜성 호텔의 보고에 따르면 외국 관광객들도 대단히 만족해하는 반응이었다.

한국을 재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나?

사실상 연습이나 다름없는 86 아시안 게임에서 이 정도면 88 올림픽도 기대해 봐도 좋을 듯싶었다.

‘88 올림픽 때는 우리나라가 진짜 세계를 놀라게 했으면 좋겠네.’

워낙 애국심을 자극하는 신문 기사를 많이 봐서 그런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우승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이 감탄 섞인 얼굴로 말하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사에게 듣기로 분명 86 아시안 게임의 우승 국가는 중공이었는데…….’

역사가 바뀌었다.

다행히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원래는 2위에 그쳤다면, 이번에는 중공을 제치고 1위가 되었다.

은메달 수는 많이 밀렸지만, 동메달과 금메달을 중공보다 많이 따낸 것이다.

“우리 그룹이 후원했던 선수들도 전부 다 금메달을 땄다는 게 놀랐습니다.”

“예, 비인기 종목이라 걱정했는데, 예상외의 성과였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우리 선수들을 상대했던 중공 선수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악몽을 꿨다나?”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소를 흘렸다.

‘노사께서 무언가를 하신 모양이군.’

요즘 통 모습을 보이지 않던 노사였다.

그런데 중공 선수들이 단체로 악몽을 꿔서 경기를 망쳤다는 소리를 들으니, 노사가 한 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핑계가 참 성의가 없군요. 악몽을 꿨다니.”

“하하, 저도 사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무언가를 잘못 먹고 배탈 난 거면 모를까, 악몽을 꿔서 경기를 망쳤다니.”

“예로부터 미신을 잘 믿는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한 나는, 화제를 전환하며 진봉현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한국 야구위원회와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곧 일정의 불균형 등을 구실로 제 8구단 창단을 추진할 거 같습니다. 지역으로는 전북이 유력합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노사의 말을 듣고 야구단 창단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내가 야구단을 만든다고, 혜성 야구단이 정식 구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야구위원회의 허가가 필요한 것이다.

해서 야구위원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거라면 다른 경쟁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보다는 호남 야구팬들의 반발이 걱정스럽습니다. 지금도 반대 여론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나중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격렬하게 반발할 거 같습니다.”

“호남을 남북으로 분열시킨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예, 아무래도 호남 지역은 정부에게 당한 일이 많으니 그런 식으로 의심을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나는 턱 끝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김태중 선생님을 만나야 할 수도 있겠어.’

전라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은 바로 김태중 선생이었다.

만약 진봉현 비서실장의 예측처럼 야구단 창단 문제로 호남에서 격렬한 반발을 한다고 해도 김태중 선생이 직접 나선다면 반발은 곧바로 수그러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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