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런 멍청이가 다 있나
예상했던 대로, 내가 자존심을 이유로 들먹이자, 임원들도 할 수 없이 내 뜻에 따라주었다.
그룹 회장의 자존심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임원들과 소통하기로 약속을 했는데도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쓰게 웃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다음부터는 주의를 해야 할 거 같았다.
스티브 잡스처럼 독불장군 같은 별명이 붙는 건 별로 원치 않았으니까.
물론 한국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말이다.
“이현진 회장님, 저쪽보다 30억을 더 높여서 인수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회의가 끝나는 즉시 이현진 회장에게 430억으로 인수하겠다는 내용을 전하였다.
-오오, 430억을요?
“예.”
-역시 이 회장은 통이 커요! 단번에 30억을 더 높이 부르다니. 하하하!
이현진 회장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우리 혜성 그룹에 매각하겠다고 딱 지어 말하지는 않았다.
쌍호 그룹에 이 소식을 전해서 인수가를 더 높이려는 수작이었다.
‘그렇게 인수가를 높여준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어차피 나도 팬더 웨스트윈드를 인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현진 회장의 수작을 기껍게 여겼다.
그가 욕심을 부릴수록 쌍호 그룹과 샤롯 그룹이 더 큰돈을 써야 할 테니 말이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김종우 회장을 도발해서라도 인수가를 높여야겠어.’
김종우 회장이 430억을 넘어 그 이상의 인수가를 부르게끔 도발을 해보기로 하였다.
* * *
“귀한 분이 누추한 곳에 오셨네?”
빈정거리듯 말을 건네는 김종우 회장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전에 이야기가 잘 끝난 줄 알았는데,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셔서 놀랐습니다.”
“그때는 내가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고, 지금은 잃을 게 없어졌거든.”
“그래서 저와 다시 전쟁하자는 겁니까?”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니,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전쟁을 선포할 용기는 없었는지, 한발 뒤로 물러나는 자세로 대꾸했다.
“전쟁이라. 그냥 자동차 회사 하나 인수하려는 거뿐인데, 너무 확대 해석하는 거 아닌가?”
“저희가 인수하려는 회사를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연히 겹친 거뿐이야. 자네가 공개적으로 인수를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알고 그랬겠어?”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인수를 포기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아니, 미안하지만 내가 자동차광이라서 어렵게 온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김종우 회장이 그리 말하자, 나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였다.
“쌍호 그룹이 지금 시점에 자동차 사업을 시작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텐데요? 자동차 사업이란 게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 자네는? 혜성 그룹도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게 2년 정도밖에 안 됐잖아? 아, 이제 3년인가?”
“혜성 그룹과 쌍호 그룹이 같습니까? 재계 순위만 봐도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텐데요.”
내 말에 김종우 회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쌍호 그룹을 무시하는 발언에 분노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네에게 중공업을 팔지만 않았으면, 혜성이나 쌍호나 그게 그거야!”
“그렇게 자위하셔도 의미는 없습니다. 이미 쌍호 중공업은 혜성 엔진으로 이름이 바뀐 지 오래입니다.”
“이익!”
“팬더 웨스트윈드는 포기하십시오. 분하시겠지만, 저희 혜성 그룹을 상대로 자금력 승부를 겨뤄봐야 쌍호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나는 김종우 회장을 달래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김종우 회장은 나의 달래는 말투에 오히려 더 화를 냈다.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정녕 끝까지 가자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포기할 거 같아?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주먹을 쥐고 일어서는 김종우 회장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역시 단순하기 그지없군.’
내가 430억을 불렀으니, 어쩌면 그는 450억 아니, 그 이상을 부르지 않을까 싶었다.
‘이왕 올릴 거, 500억까지 올리면 좋겠는데, 그건 힘들겠지? 아무리 김종우 회장이 단순하다고 해도 말이야.’
저래 봬도 재계 10위권 안에 드는 재벌 총수였다.
450억은커녕 300억 원의 가치도 없는 팬더 웨스트윈드를 500억 이상의 돈을 주고 인수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 * *
“김 회장. 혜성 그룹 회장이랑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팬더 웨스트윈드를 포기하라고 하더군요. 저를 아주 우습게 보는 태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어떻게 하기로 했냐니요. 당연히, 그놈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왔습니다. 돈으로 놈을 찍어눌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진호 회장은 씩씩거리는 김종우 회장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도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김종우 회장은 그보다 더 심한 다혈질이었다.
“저는 200억 이상 쓸 생각이 없습니다.”
“신 회장님! 갑자기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갑자기라니, 저는 처음부터 200억만 쓰기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신진호 회장의 뻔뻔한 말에 김종우 회장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팬더 웨스트윈드의 가치를 생각하면 200억을 투자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했다.
“신 회장의 뜻이 그렇다면, 나머지 금액은 쌍호 그룹의 자금으로 채우겠습니다. 당연히 지분도 자금 비율에 맞춰 저희 측이 더 많이 가져가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죠. 지분이야 김 회장이 더 가져가는 게 바르다고 봅니다. 그런데, 인수가로 얼마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김종우 회장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혜성 그룹에서 430억까지 부른 것이 확인된 상황이었다.
한성의 태도를 보았을 때, 450억까지는 계속 따라올 게 분명할 터.
“어중간하게 가느니, 통 크게 5백억을 부를까 합니다.”
“5백억? 정말 5백억으로 인수할 생각입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이한성, 그놈이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5백억이라니. 팬더 사의 가치가 그 정도는 절대 아닐 텐데.”
“우리의 목적이 뭡니까? 이한성, 그놈을 물 먹이는 게 목적 아닙니까?”
“뭐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튼 저는 5백억을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한성, 그놈도 반도체에 투자하는 돈이 많아서 5백억 이상은 못 부를 겁니다.”
그 말에 신진호 회장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야 당연히 못 부르지. 누가 팬더 사 같은 기업을 인수하려고 5백억이나 써?’
도진 그룹만 어부지리를 취하게 될 거 같았다.
물론 신진호 회장으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가 쓰는 돈은 200억이고, 한성의 안목을 생각했을 때, 팬더 웨스트윈드의 가치는 언젠가 오를 게 분명하니까.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도진 그룹 이현진 회장의 전화가 왔다.
“그쪽에서 5백억을 불렀단 말입니까?”
-예! 김종우 회장이 여기까지가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한계라며 500억을 제시했습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5백억이라니!
내가 예상했던 450억보다 무려 50억이나 올라간 액수였다.
(250억도 안 될 기업을, 두 배 이상 비싸게 인수하는 멍청이가 다 있구나.)
그러게 말이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으면 시장의 평가를 무시하고 5백억이나 부른 거야?’
쌍호 그룹이라고 팬더 웨스트윈드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5백억은커녕 250억도 안 될 기업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5백억을 부른 것은 나를 의식한 결과라고밖에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마 이 5백억이 저들의 맥시멈 금액일 거다.)
그야 그럴 것이다.
인수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막대한 투자까지 해야 한다.
만약 인수로만 5백억 이상을 지출한다면 저들의 사내 유보금으로는 앞으로의 투자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회장.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역시 이 회장이라도 5백억 이상은 힘들겠지요?
이현진 회장이 은근하게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내가 김종우 회장에게 써먹었던 수법을 이번에는 이현진 회장이 나에게 써먹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나는 김종우 회장과 달랐다.
이런 수법에 놀아날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일주일 안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그러세요. 이 회장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려드려야죠!
나는 결정을 미루는 시늉을 하였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김종우 회장이 더 높은 인수가를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쌍호 그룹이 5백억을 불렀다면, 곧 언론에서 난리가 나겠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야 그럴 것이다.
안 그래도 혜성 그룹과 쌍호 그룹의 대결을 주목하고 있던 언론이었다.
그런데 쌍호 그룹이 결정타를 날리듯, 5백억을 불렀으니 더욱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여기서 인수 경쟁을 포기하면 언론이 나를 비웃겠군요.”
“……설마 그러겠습니까. 오히려 이성적인 결단을 내렸다며 회장님의 뜻을 지지해줄 겁니다.”
과연 어떨까.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내야 할 언론에서 인수 경쟁을 포기한 기업에 좋은 반응을 해줄 거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혜성 그룹이 쌍호 그룹에 패배했다며, 내 자존심을 건들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언론이 어떻게 나오든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언론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시기는 지났으니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 말이야.’
내 적들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물 먹이려 들다가는 본인이 오히려 물 먹이게 된다는 사실을.
다음 날이 되자, 하운철 대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거의 비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회장님! 5백억은 절대 안 됩니다. 팬더 사를 5백억 이상 주고 인수하기에는 저희가 입을 손해가 막심합니다!”
원래도 팬더 사 인수를 반대했던 하운철 대표였다.
그런데 지금은 인수가가 무려 5백억까지 뛰었으니, 저렇게 펄쩍 뛰며 반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늘 자 신문을 보셨습니까? 김종우 회장이 저를 비웃으며 자신이 승리했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5백억을 신차 개발에 사용한다면, 개발 예정 기간을 1년 가까이 단축할 수 있습니다.”
“회사의 이익이 제 명예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입니까?”
“겨우 이런 일에 회장님의 명예가 손상되겠습니까? 김종우 회장의 발언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최후에 웃는 자가 이긴 겁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내가 직접 영입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나와 하는 생각이 똑같았다.
“알겠습니다. 하운철 대표의 뜻대로 하지요.”
“그, 그렇다면?”
“팬더 사 인수는 포기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하운철 대표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한때 동화 그룹의 총수였던 하운철 대표다.
그룹의 총수가 자존심을 버리고 회사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하운철 대표로서는 크게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팬더 사를 인수할 생각이 없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일로 임원들의 분위기는 더 좋아지겠군.’
비록 언론이나 다른 재벌 총수들이 나를 비웃을 수는 있었지만, 적어도 그룹 내부에서의 반응은 다를 것이다.
하운철 대표의 뜻을 받아들여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고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