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미끼를 물었군
“인정민이가, 결국 회장님의 제안에 응하기로 하였습니다.”
허영만의 말에 신진호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10억을 제시하는데 안 넘어오고 배길까?”
애초에 김종우가 실수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혜성 그룹 회장의 심복을 겨우 월 천만 원에 매수하려고 하다니.
이왕 매수하려 들 거면 통 크게 억 단위는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100% 신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에게 넘어온 척 연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야?”
“인정민은 이한성 회장의 심복입니다. 10억이 큰돈이라 해도 안심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신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예 10억을 받고 입을 꾹 다물 수도 있는 일이지.’
물론 10억을 일시금으로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인정민의 뭐를 믿고 한 번에 10억을 다 준단 말인가.
정보가 들어오면 그 정보의 가치를 매겨 얼마씩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선수금으로 1억 정도는 줘야 할 것이기에, 인정민이 배신한다면 돈도 돈이지만,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할 거 같았다.
“뭐, 인정민만 매수했다면 그렇게 의심해도 괜찮겠지. 그런데 우리는 인정민만 매수한 게 아니잖아?”
인정민 말고도 매수한 한성 주택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있는 한, 혜성 그룹의 수작에 놀아날 일은 없을 것이다.
* * *
선수금으로 1억을 건네주자, 인정민은 혜성 그룹의 중요 정보들을 물어와 주었다.
혜성 그룹 회장의 사생활부터 혜성 그룹이 준비하고 있는 사업들까지.
‘돈값을 하는군.’
신진호가 그렇게 만족스러워 할 때, 인정민이 또다시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었다.
그 정보는 다름 아닌, 혜성 그룹이 팬더 웨스트윈드라는 기업을 인수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정보였다.
“자동차 사업을 더욱더 확장하려는 건가?”
확실히, 혜성 그룹은 작년부터 자동차와 전자 쪽의 사업에 집중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팬더 웨스트윈드도 나름대로 유명했던 영국의 자동차 회사이니, 혜성 그룹에서 인수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김 회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가 말입니까?”
“우리가 팬더 사를 인수하면 어떨 거 같냐고 물은 겁니다.”
신진호는 인정민에게 얻은 정보를 김종우에게 바로 공유해 주었다.
반 혜성 동맹을 결성했는데, 굳이 정보를 숨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자동차 사업에 진출할 생각이긴 했습니다.”
“그럼 팬더 사는 김 회장이 인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진호로선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혜성 그룹이 탐내는 회사이니, 미래 잠재력은 있을 거 같지만, 그렇다고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쌍호 그룹이 나서서 인수해준다면 그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혜성 그룹의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는 애초에 자동차 사업에 욕심이 없습니다. 김 회장이 저 대신 혜성 그룹을 물 먹여 준다면 반대할 이유가 있을 리 없지요.”
“흠, 그러면 돈도 조금만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종우가 당당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신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천하의 쌍호 그룹이 돈을 빌려 달라니요?”
“반 혜성 그룹을 결성하지 않았습니까? 혜성 그룹과 인수 경쟁을 해야 하는데, 컨소시엄을 이루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혜성 그룹의 자본력을 생각하면 쌍호 그룹 혼자 상대하기에는 버겁긴 했다.
하지만 신진호로서는 그룹의 현금 유동성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 쌍호 그룹에 돈을 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인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팬더 사의 인수가만 높인다고 생각하세요. 혜성 그룹이 팬더 사의 인수가로 얼마를 생각하는지 몰라도, 백억 정도만 인수가를 높여도 혜성 그룹의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그가 그리 설득했지만, 김종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팬더 웨스트윈드를 인수하는 것에 단단히 꽂힌 모양이었다.
“이한성, 그놈의 안목은 신 회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팬더 웨스트윈드는 분명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저도 이한성의 안목을 인정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한성의 경우는 자동차 회사가 이미 있으니 일종에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팬더 사를 인수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설령 그렇다 한들, 팬더 웨스트윈드를 인수한다고 손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신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자동차광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달려들 줄이야.’
순간적으로 김종우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같은 적을 두고 싸우는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의 뜻이 그렇다면, 일단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신진호는 즉답을 피한 채 그 같이 대꾸하였다.
일단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팬더 웨스트윈드라는 기업의 사정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인정민이 팬더 웨스트윈드 인수와 관련해서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었다.
“혜성 그룹에서 인수가를 350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신진호가 생각하기에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한때 잘 나갔던 자동차 회사라고 해도, 지금은 망한 지 10년 가까이 된 회사였다.
매출도 보잘것없었고, 기술력도 그리 높다고 보기 어려웠다.
‘새로 개발하고 있는 신차가 어지간히 잘 나왔나 보지?’
혜성 그룹에서 팬더 웨스트윈드의 가치를 잘못 측정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혜성 그룹에서 무수히 많은 회사를 인수했지만, 반도체 공장을 제외하면 전부 다 성공적인 인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심지어 그 반도체 공장도 일단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성공이라면 성공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신진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그가 파악하지 못한 팬더 웨스트윈드의 숨겨진 진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침, 김종우가 그를 찾아와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렇게 손 놓고 있으실 겁니까? 혜성에서 350억을 불렀습니다. 도진 그룹에서 언제 팬더 웨스트윈드를 매각할지 모른단 말입니다.”
“음…….”
“팬더 웨스트윈드를 인수하면 그놈이 더 잘나가게 될 텐데, 분하지도 않습니까? 안 그래도 혜성 자동차가 연 매출이 4천억을 돌파할 것이라며 언론이 떠들썩한데, 팬더 웨스트윈드까지 인수하면 5천억 이상도 가능할 겁니다!”
연 매출 5천억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한성, 그놈이 잘나가는 모습이 꼴 보기 싫은 건 사실이야. 쌍호 그룹과 손을 잡아서라도 한 번쯤 제동을 걸기는 해야 해.’
결국 신진호는 김종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좋습니다!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거로 하죠.”
“하하! 역시 신 회장님입니다.”
“그 대신,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저도 지분을 나눠 가지는 거로 하겠습니다.”
“자동차 사업에 욕심이 없으시다고 하셨지 않았습니까.”
“투자로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김종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돈을 빌려주기만 하면 좋았을 텐데, 일을 번거롭게 만들었다.
“이번 전쟁에, 얼마 정도의 자금을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혜성 그룹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4백억은 필요할 거 같으니, 최소한 2백억은 투자하겠습니다.”
“2백억이라.”
인수가가 4백억이라면, 지분을 50대 50으로 나눠야 했다.
팬더 웨스트윈드의 경영권을 독차지하고 싶은 김종우로선 껄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자금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결국 신진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 * *
팬더 웨스트윈드를 소유하고 있는 도진 그룹 회장, 이현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회장. 팬더 사 매각은 지금 당장 결정하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달 안으로 결정을 내리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도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다른 기업에서 인수를 제안하지 뭡니까? 그것도 무려 4백억의 인수가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물론 겉으로만 인상을 쓰는 것이다.
속으로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군.’
혹시나 미끼를 물지 않으면 걱정했었다.
팬더 웨스트윈드를 인수할 생각이 없으니, 협상을 파투 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든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미끼를 문 이상, 더는 걱정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됐다.
팬더 웨스트윈드는 가치가 몇 배로 불린 채 반 혜성 동맹인지 뭔지 하는 두 재벌 그룹에 넘어갈 테니까.
“아니, 이현진 회장님. 이건 상도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아도 그걸 내색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사납게 말했다.
그러자 이현진이 미안하단 얼굴로 다시금 사과하였다.
“이 회장, 미안해요. 미안해. 그런데 내 입장도 이해해 주세요. 내가 팬더 사를 몇 년이나 갖고 있었는지 알잖아요? 손해를 만회하려면 조금 더 비싸게 팔 수밖에 없어요.”
“하아.”
한숨을 내쉰 나는 태도를 바꿔 이현진에게 부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바로 매각을 결정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도 자금을 더 모아오겠습니다.”
내 말에 이현진은 크게 반색하였다.
4백억도 엄청난 액수인데, 내가 그것보다 더 큰 액수를 부를 듯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죠! 다른 제안자에게는 내가 잘 타이를 테니, 자금을 모은 뒤에 연락을 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하하하, 잘 들어가세요. 바로 연락하시고요.”
기분 좋게 웃으며 자작하는 이현진의 모습을 보며 나도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쌍호 그룹에서 아마 450억까지는 동원할 거 같다.)
노사가 불쑥 나타나 그리 말하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저희는 430억 정도를 불러야겠군요.”
(뭐 450억을 불러도 따라올 거 같기는 한데, 안전하게 가려면 430억 정도가 좋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350억이었을 때도 말이 안 되는 인수가였다.
그런데 450억까지 뻥튀기를 한다니.
만약 그대로 인수한다면 쌍호 그룹의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심할 것이다.
‘심지어 인수하고 끝나는 게 아니지. 김종우 회장이라면 자동차 사업에 엄청나게 투자할 텐데, 그때는 적자가 못 해도 천억은 되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물론 아직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기에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여러분도 이미 들었겠지만, 팬더 사 인수전에 다른 경쟁자가 끼어들었습니다. 바로 쌍호 그룹입니다.”
“예, 들었습니다.”
“쌍호 그룹이 끼어들었는데, 인수가가 겨우 몇십억 높아졌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임원들을 불러 모은 나는, 팬더 웨스트윈드의 인수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자 임원들은 강하게 만류하였다.
특히 혜성 자동차의 대표인 하운철이 가장 강하게 반대하였는데, 팬더 웨스트윈드의 인수가는 결국에 혜성 자동차가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회장님! 팬더 사의 매출은 고작해야 4백억에 불과합니다. 4백억밖에 안 되는 자동차 기업을 4백억에 인수한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겁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대로 인수를 포기한다면, 팬더 사를 4백억 주고 인수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저희를 우습게 볼 겁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임원들을 설득하려면 이런 식의 억지를 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팬더 웨스트윈드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