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두고 보자고
나는 한제인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됐다.’
재벌이 아니고서야, 혜성 그룹의 부회장 자리가 탐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막말로 국회의원이나 장관급 고위 정부 인사라 해도 혜성 그룹의 부회장 자리가 내심 탐날 것이다.
그들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만, 부회장 자리는 나와의 협상만 잘하면 몇십 년이고 임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내 자식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부회장 자리를 뺏길 걱정도 없었고 말이다.
권력자들도 이런데, 한제인처럼 야인이 된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제인의 입에서 예상했던 것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감사합니다가 아닌, 죄송하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 말은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예, 저는 혜성 그룹에 입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에게 좋은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런 답변밖에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몸값을 올리려고 수작 부리는 건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혜성 모직의 대표 자리를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다른 재벌 그룹에서 제안을 받은 게 있습니까?”
“아닙니다. 영입 제안을 한 것은 혜성 그룹이 처음입니다.”
“그러면 혹시 영입을 거절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저도 사업을 해볼까 합니다. 누구의 밑에서가 아닌, 제 손으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동현 그룹을 설립하려는 것인가.’
동현 그룹.
노사의 세계에서 한제인이 세운 그룹 이름이었다.
중견 그룹까지 성장할 기업이었는데, 사실 내가 한제인을 영입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 동현 그룹 때문이었다.
맨주먹에서 중견 그룹을 일으킨다는 것은,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지금이 호황기라고는 하나, 사업이 반드시 성공하리란 법은 없는데, 가정을 생각해서라도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사업을 권유하는 게 맞겠지만, 나는 그를 영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안정적인 직장을 강조하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한제인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인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장인어른이 세계 그룹 회장이신데 가정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설령 실패한다 해도 사업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영입 대신 투자는 어떻습니까?”
몸을 일으키던 한제인이 내 말을 듣고는 도로 앉았다.
“제 회사에 투자하시겠단 말씀입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현 그룹이 성공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데, 한제인과의 관계를 매정하게 끊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어떤 사업을 할지도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저의 뭐를 보고서 투자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야 한제인 부회장님을 믿고 투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괜히 한제인 부회장님을 혜성 모직의 대표로 영입하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내 말에 한제인은 크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 그룹에서 버림당한 처지인 그를 이렇게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리라.
물론 미래를 알고 있으니, 높게 평가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저를 이렇게까지 믿어 주신다니, 저로서는 감사하단 말밖엔 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죄송하단 말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설마 저의 투자를 받지 않겠다는 겁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외국의 회사들이야 돈이 있다고 해서 투자를 못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노벨에 투자하려 했을 때도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투자를 거절했었으니 말이다.
인지도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인데, 한국에서도 그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회장님의 투자를 받는다면, 제 뜻대로 사업을 펼칠 수 없을 거 같다는 점이 우려스럽습니다.”
“저는 제 사업하기도 바쁜 사람입니다. 한제인 부회장님의 경영권에 간섭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만약 한제인 부회장님이 자기 사업을 한다면, 부회장님의 경쟁자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장인어른께 이미 사업하겠단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장인어른이 계시는 한, 세계 그룹의 임원들이 제가 세울 회사를 상대로 수작을 부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양 회장님이 은퇴한 뒤에는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한제인은 말이 없어졌다.
그도 양희수 회장이 은퇴한 이후가 걱정이었던 것이다.
“저의 투자를 받으면 외압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꼭 세계 그룹만이 아니라, 다른 재벌이나 정부의 외압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흠…….”
“지분을 그리 많이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30% 정도만 주시면, 저는 만족하겠습니다.”
어차피 그의 경영권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단지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시험 삼아 투자하는 거뿐이었다.
‘나비효과 때문에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내가 투자를 해준다면 원래의 동현 그룹보다는 훨씬 커질 수가 있어.’
내 투자를 받았으니 당연히 성공 가능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투자를 받았을 때의 이점은 투자 자금뿐만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성공이 확실하지만, 대기업이란 이유로 또는 시장의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업 아이템이 꽤 많았다.
이러한 혜성 그룹이 할 수 없는 사업 아이템을 동현 그룹에 넘겨도 동현 그룹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30%까지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제 회사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그야 한제인 부회장님이 하실 사업 아이템을 듣고 결정해야 할 문제겠지요.”
한제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자신이 하려는 사업 아이템을 설명해 주었다.
‘패션 브랜드라, 나쁘지는 않군.’
신발 전문가라서 그런지, 사업 아이템으로 패션을 선택하였다.
본인이 알고 있는 패션 브랜드 중, 세계에 통할 만한 브랜드들을 외국에 수출하겠다는 것이 그의 사업 아이템이었다.
물론 내수도 놓치지 않으려는지 이런저런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다.
‘인맥이 좋으니까 승산은 있겠어.’
패션을 보는 눈도 있고, 폭넓은 인맥에 절대 적다고 할 수 없는 자본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금이 호황기이기도 하니, 한제인의 사업이 실패할 일은 없을 듯싶었다.
“30%의 지분을 사들이는데, 30억을 드리겠습니다.”
“30억이요?”
“예, 어떻습니까?”
한제인은 30억이란 말에 눈을 부릅떴다.
아직 시작도 안 한 회사를 백억의 가치를 지녔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감사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게끔, 꼭 성공하겠습니다!”
나는 기대가 되었다.
원래도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인물이 내 투자까지 받을 때 어디까지 날아오를지 너무도 궁금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양희수 회장님이 후회하게 될 확률은 100%겠지?’
한제인이 어서 성공하여 세계 그룹의 다른 임원들도 후회하게 만들어줬으면 싶었다.
* * *
“여기 오다 보니까, 아주 크고 멋진 건물이 보이더군요.”
“어떤 건물을 말하는 겁니까?”
“혜성의 사옥 말입니다. 아직 공사 중인데도 저 정도면, 다 지어지고 나서는 정말 장관일 거 같습니다. 거의 63빌딩과 엇비슷한 크기 아닙니까?”
쌍호 그룹, 김종우 회장의 말에 신진호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잠실에 지어지고 있는 혜성 그룹의 사옥은 그의 역린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짜고짜 역린을 건드니 그로서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왜 갑자기 화를 내시고 그러십니까?”
“내가 혜성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그딴 말을 하는데, 화를 안 낼 수가 있겠어요?”
“신 회장님께서 혜성을 싫어한다니,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재계에서 혜성 그룹과 샤롯 그룹이 사이가 안 좋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통과 호텔 그리고 백화점 사업까지 두 그룹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잠실의 땅을 두고 두 그룹이 대립했던 일은 아직도 재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 저도 혜성 그룹을 아주 싫어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는 수준입니다.”
김종우의 그 같은 말에도 신진호는 뚱한 표정이었다.
쌍호 그룹이 계열사까지 팔아넘기며 혜성 그룹과 화해한 사건 역시, 재계에 잘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신진호도 그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요?”
“우리 두 사람 모두 혜성을 싫어하는데, 같이 힘을 모아보면 어떻겠습니까?”
“반 혜성 동맹이라도 만들자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신진호는 그제야 흥미가 도는지 턱 끝을 쓰다듬었다.
사실 이전의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재계 10위권에 불과한 혜성 그룹을 견제하려고 다른 그룹과 힘을 합치는 것이 뭔가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느껴져서 생각을 철회하였다.
‘지금의 혜성 그룹은 우리 그룹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좀 벅차긴 하지.’
인정하긴 싫었지만, 현실이 그렇다.
샤롯 그룹은 이제 막 재계 10위권에 진입했다면, 혜성 그룹은 빅5에 거론되고 있었다.
체급만 봐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뭐 저도 그런 동맹이라면,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안 그래도 혜성이 잘 나가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나쁘던 참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괜찮냐니요? 어떤 걸 물으시는 겁니까?”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혜성 회장이 혹여나 김 회장의 약점이라도 잡아 놨으면 어쩌시려고요?”
그 말에 김종우는 코웃음 쳤다.
“어차피 이한성 그놈 때문에, 아내와도 이혼한 상황입니다. 여기서 잃을 게 뭐가 있다고 그딴 걸 두려워하겠습니까?”
한성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김종우의 방탕한 사생활을 여러 경로를 통해 폭로하였다.
여대생과 놀아난 일이나, 몰래 첩을 둔 일 등, 김종우의 온갖 비밀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세간에 폭로된 것이다.
이때의 일로 김종우는 결국 아내와 이혼하는 상황까지 처했다.
“그렇게 강한 의지를 갖고 계신다면,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군요. 그런데, 따로 계획을 세우신 겁니까?”
“예. 우선 신진호 회장님과 고림 그룹의 민 회장님을 끌어들여 동맹의 규모를 키우는 게 목표입니다.”
“글쎄요. 민성준 회장이 인제 와서 혜성 그룹을 적대할 거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고림 그룹도 당한 게 있는데 혜성 그룹에 감정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신진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고림 그룹까지 반 혜성 동맹에 합류한다면 큰 힘이 될 거 같기는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일성이나 정우 그룹까지 끌어들이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 거 같습니다.”
“당연하지요. 그들도 자존심이 있는데 혜성 때문에 다른 그룹과 힘을 합치려 들겠습니까?”
정우 그룹이나 일성 그룹이나 혜성 그룹을 싫어하는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빅 4에 속한 기업들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반 혜성 동맹에 참여할 일은 없었다.
“아무튼, 고림 그룹까지 꼈다 칩시다. 그다음의 계획은 뭡니까?”
“신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혜성 그룹이 무서운 이유는 그들에게 막강한 자본력과 정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저도 혜성 그룹을 상대하면서 혜성 그룹의 끝도 없는 자본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었습니다.”
“예, 하지만 저는 혜성 그룹의 자본력보다 정보력이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진호도 동의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이는 혜성 그룹의 정보력이 안기부보다 대단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혜성 그룹을 상대한 두 사람이 보기에도 혜성 그룹의 정보력은 안기부를 뛰어넘었다.
특히 김종우의 경우, 혜성 그룹의 정보실에서 미국산 첨단 도청 기기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혜성 그룹의 정보력은 설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서 저는 가장 먼저 혜성 그룹의 정보력부터 무용지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보라면 이한성 그자가 철저하게 신경 쓰고 있을 텐데,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경찰 간부 출신의 인정민이라는 자가 정보 계통의 일을 총책임 지고 있습니다. 이자를 어떻게든 포섭하기만 한다면 혜성 그룹의 눈과 귀를 막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김종우의 그 같은 말에 신진호는 눈을 빛냈다.
인정민이 한성의 측근이란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혜성 그룹의 정보를 총괄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나도 따로 조사해 봐야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야.’
신진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만 하면 한성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 * *
‘반 혜성 동맹이라. 정말 예상했던 대로 일을 벌이는군.’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노사는 같잖다는 듯, 조소를 지었다.
김종우의 동향이 뭔가 수상하게 느껴져서 집중적으로 감시했더니만,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인정민을 포섭하겠다고? 과연 네놈들의 의도대로 될지 두고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