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부회장 자리도 줄 수 있어
다음 날, 나와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 사의 향후 사업 추진 계획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내가 거의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대화였는데, 내가 가장 강조한 것은 ‘인재’였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비교했을 때, 인재의 힘이 훨씬 더 중요시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스티브의 성격이 조금 유하게 바뀌어서 인재를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겠어.’
안 그래도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스티브 잡스였다.
내가 스티브 잡스와 손을 잡으려는 이유도 바로 그 명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
그런데 스티브 잡스가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함을 챙겼으니, 인재가 구름처럼 모여들지 않을까 싶었다.
“또한,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처럼 기업용 사용자만 노리기보단, 일반 사용자도 같이 노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반 사용자를요?”
“예. PC 보급률은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몇 년 뒤에는 가정에 컴퓨터 한 대씩 두는 게 이상하지 않은 날이 올 겁니다. 그러니 저희는 마이크로소프트보다 먼저 일반 사용자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치 애플이 개인 PC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처럼, 넥스트 역시도 개인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식의 조언을 하였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잠깐 동안은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였는데, IBM을 상대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확실히, 지금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의 발전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지요. 일반 사용자들도 그래서 불만이 많은 상황이고 말입니다.”
“예, 넥스트가 나서서 일반 사용자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에야 일반 사용자를 노려도 매출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프트웨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도 기업을 대상으로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것이고.
하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일반 사용자의 규모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
한국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전 국민이 컴퓨터를 사용할 정도였다.
이러니 일반용 소프트웨어 시장을 선점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의 캐시카우가 되어줄 기업용 소프트웨어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인수 합병도 적극적으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미스터 리의 투자금이 들어오는 즉시, 인수하려는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회사입니까?”
“노벨이라고, 네트웨어라는 네트워크 운영체제를 제작하는 회사입니다.”
“아. 노벨을 인수하신단 말씀입니까?”
나는 놀랐다.
왜냐하면 나도 노사의 말을 듣고서 노벨이란 곳을 인수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오, 미스터 리도 노벨을 알고 계십니까?”
“예.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저 역시 노벨을 인수하려고 했었습니다.”
“정말입니까?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당연히 실패했겠죠? 성공했다면 제가 알았을 테니.”
그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스티브의 말씀처럼 인수에는 실패했습니다.”
“얼마를 부르셨기에?”
“인수가를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못했습니다. 자금이 넉넉해서인지, 저희를 상대해 주지도 않았었거든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스티브라면 노벨의 CEO도 만남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스티브 잡스는 내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미국 내에서는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HS 인베스트먼트와 IT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한 명인 스티브 잡스는 아무래도 급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설령 회사 매각에 부정적이라고 해도 스티브 잡스와의 만남 자체를 거절할 일은 없으리라.
‘우리 회사도 어서 유명해져야 할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스티브 잡스에게 말했다.
“꼭 인수에 성공했으면 좋겠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 넥스트 사가 없었다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회사가 바로 노벨일 거 같으니 말입니다.”
“노벨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십니까?”
“예. 저는 노벨이 적어도 천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천만 달러라. 알겠습니다. 미스터 리가 노벨을 그리 높게 평가하니, 저도 최대한의 금액으로 인수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꼭 사업적인 이야기만 나눈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등등.
나이가 비슷해서인지, 아니면 같은 사업가라서 그런지 대화가 제법 잘 통했다.
물론 배울 점도 많았고 말이다.
“다음에는 제가 미국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언제든 오십시오. 그때는 제가 환대해드리겠습니다.”
아쉽게도 스티브 잡스의 한국 일정은 짧았다.
워낙 바쁜 사람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훗날을 기약하며 스티브 잡스를 떠나보냈다.
* * *
스티브 잡스는 나와 이야기했던 대로,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소프트웨어 사업에 집중하는 행보를 보였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대거 모집하는 동시에 네트워크 운영체제를 제작한 노벨이란 회사에 인수 제안을 한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미국 언론은 이 같은 스티브 잡스의 행보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벌써 빌 게이츠와의 대결 구도를 보도하는 언론도 있을 정도였다.
“와우, 그때 봤던 스티브 잡스란 사람이 이렇게나 유명한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
양준현이 새삼스럽게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의 소식을 전해 듣고 저러는 거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인이라도 받아 놓을 걸 그랬습니다.”
“대화 한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주제에 사인은 무슨.”
“하하, 제가 영어 점수는 잘 나오는데 이상하게 회화는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외국인 앞에만 가면 도저히 입을 못 열겠습니다.”
넉살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으로 외국에 나갈 일이 많아질 테니 비즈니스 영어 회화는 확실하게 익혀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사실 외국 여자랑 사귀는 게 인생의 목표 중의 하나였습니다. 회화가 안 되면 연애는 꿈도 못 꾸니 어떻게든 해내 보겠습니다.”
회사 일 때문에 공부하겠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한다.
뭐, 원래 이런 놈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볼 때마다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회장님.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어떤 이야기?”
“제 본가인 세계 그룹 이야기 말입니다. 한제인 부회장이 결국에 그룹을 떠나게 된다던데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 그룹의 동향에 대해서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는 나였다.
한제인 부회장이 팽당한 일도 당연히 파악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보네요? 하긴, 형님이나 아버지가 미리 이야기해 줬겠군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너에게 한제인 부회장은 어떤 사람이지?”
“매형이긴 한데, 나이 차이도 워낙 있고 하니, 엄한 삼촌 같은 사람이었죠. 뭐.”
“그래도 완전히 남은 아니었나 보군.”
“저야 워낙에 붙임성이 좋지 않습니까. 흐흐, 매형들도 그렇고 다른 사장들도 그렇고 세계 그룹에서 저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거 하나는 대단한 거 같았다.
명색이 세계 그룹의 차남인데, 누구의 미움도 받지 않는다니.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만약 한제인 부회장을 우리 그룹에 영입하면 어떨 거 같아?”
나는 불쑥 그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양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제인 부회장을 혜성 그룹으로 영입한다고요?”
“그래. 아마 혜성 모직의 대표로 영입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혜성 그룹의 모태 기업인 혜성 모직.
나에게도 뜻깊은 계열사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원래 혜성 모직의 대표로 내 외사촌인 종태 형을 임명하려고 했었다.
기존의 민제훈 대표야, 상무였던 나에게 잘 대해줬다는 이유로 계속 앉혀놓고 있는 거지, 업무 능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실질적으로 대표 업무를 보는 것은 부대표인 종태 형이었기에, 그대로 대표직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게 처음 품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는데, 종태 형은 계열사 한 곳에 묶어두는 것보단, 중앙으로 불러들이는 게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태 형의 분석 능력과 기획 능력, 전략적인 사고와 실행 능력이 아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종태 형을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한제인 부회장을 혜성 모직의 대표로 앉히면 딱 좋을 거 같았다.
“민제훈 대표는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슬슬 은퇴할 때가 됐잖아? 퇴직금도 넉넉히 줄 것이니, 민제훈 대표도 만족하고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
“흠, 그럼 회장님이 걱정하시는 건 저희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뭐, 아버지야 특별한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버지 성격상, 한제인 부회장에게 미안해서라도 아무 말 못 할 겁니다. 오히려 회장님께 부탁을 드리려고 올 수도 있고요. 한제인 부회장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양희수 회장의 성격을 생각하면 상황이 그렇게 될 거 같기는 했다.
“그럼 한제인 부회장을 영입해도 문제 될 게 없다는 뜻이로군.”
“문제 될 건 없겠지만, 과연 한제인 부회장이 혜성 그룹으로 오려고 하겠습니까?”
“오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나?”
“글쎄요? 한제인 부회장이 겨우 대표직에 만족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후계자 자리를 노린 걸 보면 알겠지만, 제 매형이 의외로 야망이 큰 편입니다.”
“그냥 평범한 계열사도 아니고 혜성 모직의 대표 자리인데 만족을 못 한다고?”
야망이 크다는 사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혜성 모직은 올해 3천억 이상의 매출이 예상되는 계열사였다.
재계 10위권 바깥의 대기업이었으면, 핵심 계열사로 취급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왠지 저는 설득이 쉽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가족이니 양준현의 추측이 어쩌면 더 정확할 수도 있었다.
내가 계획했던 대로 안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일단 영입은 시도해 봐야겠지?’
영입 제안을 한다고 손해 볼 것이 없다면,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일단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나았다.
* * *
한제인은 양희수 회장에게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담담한 태도로 양희수 회장에게 인사하고 세계 그룹을 떠났다.
아내와 이혼하지 않는 이상, 양희수 회장과의 관계가 끝날 일은 없었지만, 세계 그룹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혜성 그룹 회장님이 나를 찾고 있다고?”
야인이 된 그에게 양준현이 찾아왔다.
혜성 그룹의 비서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양준현은 한성의 뜻을 전달해 주었다.
‘이미 다 끝난 상황에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인제 와서 그를 지지하겠다고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온 한제인이었다.
제아무리 한성의 힘이 강해도 지금의 한제인을 세계 그룹의 후계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일단 만나보자.’
다음 날, 혜성 그룹의 회장이 그의 저택에 방문하였다.
본래는 한제인이 직접 혜성 그룹 사옥을 찾아가려 했는데, 한성이 한사코 고집하며 그의 저택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설마, 나를 영입하려는 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혜성 그룹 회장쯤 되는 인사가 이 같은 예우를 대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영입한 것처럼 어쩌면 한성도 그를 영입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 다른 계획이 없으시다면 혜성 그룹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혜성 모직의 대표로 영입하겠습니다.”
“혜성 모직의 대표라…….”
한제인은 겉으로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매우 놀랐다.
‘인재를 중시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다른 그룹의 부회장이었던 사람을 주요 계열사의 대표로 앉히려 하다니.
실로 파격적인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저희 그룹에는 부회장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당장 부회장 자리를 드리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희 혜성 그룹에서 능력을 보여주신다면 부회장 자리 못 드릴 것도 없지요.”
한제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세계 그룹에서도 부회장 자리에 있었다지만, 지금의 세계 그룹과 혜성 그룹은 속되게 말하면 급이 달랐다.
혜성은 무려 빅 5로 언급될 정도로 규모가 큰 기업이었던 것이다.